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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사사기 강해

by 박인식

최주훈

중앙루터교회

2020년 10월 13일


나는 오랜 시간 성경을 글자 그대로 믿었다. 어렸을 때 어디선가 읽었던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던 말씀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젊은 날까지는 믿음이랄 것도 없었으니 성경을 깊이 생각해본 일도 없고, 따라서 궁금한 것도 없었다. 나이가 들어가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약자와 소수자, 그리고 무고히 고통을 당하는 이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눈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기자가 기록한 것으로만 알았던 성경이 실제로는 오랜 기간 여러 사람에 의해 다듬어지고 전승되어온 편집의 산물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미 성경을 행(行)보다는 행간(行間)에 의미를 두고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작년부터 관심을 두어오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보게 되면서 질문이 증폭되었다. 그리고 그 발단은 가나안 정복기를 다룬 여호수아와 사사기이고, 그 정복의 명분이었던 신명기의 ‘가나안 진멸 명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 어느 구절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지 못하겠지만, 내가 성경 전체를 통해 깨닫고 만난 하나님의 성정에 비춰볼 때 ‘가나안 진멸 명령’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명령을 내리실 분도 아니고 내리실 수도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가나안 사람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음에도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을 살려둔 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타락을 암시한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물론 지금까지 성경을 그렇게 해석해왔고 거기에 나름의 논리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모든 가나안 사람을 진멸하라는 명령까지도 지키는 게 온전히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명령은 무조건, 온전히 순종해야 하는가? 그게 혹시 성경을 잘못 읽고 있는 건 아닌가?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은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나? 그때 그 악인은 이스라엘만 지칭하는 말인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인가? 그때는 구약시대라서 그랬다는 반론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 하나님의 본성이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인가?


사사기 첫머리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 땅을 유다의 손에 넘겨주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셨을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걸 우리는 가나안 정복 전쟁이라고 부른다. 정복 전쟁, 과연 그 용어가 성서적인가?


가나안 정복을 보면 지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대하는 논리와 아무런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도 어디에선가 살아야 했으니 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선택지에 ‘공존(共存)’은 들어있지 않은 것일까?


일 년 넘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관련한 책을 읽어오면서 이스라엘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 중 가장 선명하고 반박할 여지를 찾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일란 파페가 자신의 저서인 <이스라엘의 열 가지 신화>에서 언급한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그 땅에 사는 사람들과 공존하는 것이 되어야지 어떻게 그들을 내쫓는 이유가 될 수 있느냐”는 비판이었다. 나는 지금 신학자와 목회자에게 바로 그 점을 묻고 싶다. 그래서 다시 한번 ‘있어서는 안 되는 발칙한 질문’을 되풀이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명령은 무조건, 온전히 순종해야 하는가? 그게 혹시 성경을 잘못 읽고 있는 건 아닌가?”라고.


저자는 이스라엘이 정의를 구현하려는 모든 시도는 다시 또 다른 폭력을 낳게 된다면서,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정의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할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 가나안 진멸이 정의(正義)라는 말인가? 정의(正義)는 누가 정의(定意)하는 것일까? 성경에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意)가 있는가? 그 정의(定意)가 과연 하나님 뜻에 부합하는 것일까? 아, 난 모르겠다. 지금 이스라엘이 자자 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인을 계속 살상하면서 내세우는 논리와 너무도 똑같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 가나안 주민들과 접촉을 금하셨다. 저자는 이것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길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여러 질문이 있을 수 있지만, 그저 하나만 질문하고 싶다. 이것이 지금도 적용해야 할 지침인가?


구약의 모든 사건은 그것이 사실이어서가 아니라 그 사건에 담긴 함의 때문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나안을 진멸하라는 것은 가나안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 섬기는 걸 따라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성경의 주인공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스포츠 중계방송에서 카메라는 모든 선수를 비추지 않는다. 득점은 공의 위치에 따라 결정되고, 그러다 보니 공 잡은 선수를 집중적으로 비추게 마련이다. 성경 역시 다르지 않아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공) 주변인을 집중적으로 비출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계방송에서 카메라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서 선수를 필드에서 내쫓지는 않는다. 성경 역시 메시지이니 공 주변에 있는 선수를 집중해서 비추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왜 주변인은 지우려고만 드는 것일까? 혹시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을 내쫓고 그 자리를 신앙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채우는 건 아닐까?


책을 읽을 때는 그저 질문이던 것을 글로 옮기다 보니 마음이 점점 격해진다.


이 책은 지난봄 몇 달 동안 중앙루터교회 이루어진 수요 성경 공부 교재를 엮어 만든 것이다. 정식으로 출판된 것이 아니고 성경 공부가 낮 시간에 이루어져서 참석할 수 없었던 교우들을 배려한 것이다. 얄팍해서 얕잡아보고 읽기 시작했는데, ‘가나안 진멸 명령’에서 마음이 흔들렸고, 그것 때문에 이 책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여러 유익한 점을 놓쳤다. 그중 두 가지를 꼽자면 여성 목회자에 대한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사사 드보라에 대한 기록과 레위인 첩이 등장하는 19장의 사건이다.


저자는 사사 드보라에 대한 기록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섬길 수 있다는 포용적인 관점”으로 이해한다. 아울러 바울도 그가 기록한 로마서에서 사도로서의 여성 사역자들의 역할을 인정했다고 해석한다. 나는 이것이 저자의 시종일관한 해석이며 그의 삶이 이를 뒷받침한다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아직도 국내 적지 않은 교단에서 여성 안수를 거부하고 있고 그 점에서 저자가 담임하는 우리 교회도 예외는 아니라는 점이 몹시 부끄럽다. 여성 안수 거부를 앞장서 주장하는 이들은 성경이 그렇게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나는 성경 어디를 보고 그런 해석을 내릴 수 있는지 의아하다. 아무래도 그들이 보는 성경과 내가 보는 성경이 다른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디 그런 주장을 계속할 수 있을까.


레위인 첩의 사건이 기록된 19장에 그 첩이 행음하여 친정으로 돌아갔다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첩이 떠난 이유가 불륜(행음)이 아닌 레위인과 심각한 갈등이 있었거나 학대 때문이었을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 본문이 여성의 관점이 아닌 고대 가부장적 시각에서 기록되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따라서 여성이 남편을 떠나는 것 자체가 행음이나 반역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읽을 때마다 의아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가부장적인 시각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결국 성경을 다시 읽어야 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가나안 진멸 명령’도 다시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말은 아닐까?


지금껏 써온 리뷰 대부분과 달리 이번 글은 몹시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감정이 그대로 실렸다. 그래서 쓴 걸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지울 생각은 없다. 이것 또한 내 신앙고백일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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