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Book Review

정부의 원리

by 박인식

양재진

마름모

2025년 7월 18일


국민학교에 입학한 해에 5.16이 일어났다. 제3공화국이 들어서고, 삼선개헌이 이루어지고, 10월 유신이 이어진 끝에 10.26이 일어날 때까지 대통령은 박정희였다. 그래서 대통령의 다른 이름이 박정희인 줄 알고 살았다. 이후 대통령이 바뀌기는 했는데,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이었다. 아마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언제가 되면 우리도 대통령감으로 자라난 정치인을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오랫동안 내게 민주주의의 표상은 수정헌법과 표현의 자유로 대표되는 미국이었다. 이제는 민주주의와 무관한 나라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이 정치 수준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건 아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우리도 미국과 같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런 부끄러운 현실이 5년 단임 대통령제의 결과인가? 4년 중임제나,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책임제 같은 다른 정치 체제였다면 좀 나았을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제도가 아니라 극한 대결도 마다치 않는 양당 체제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국 정치의 실패를 5년 단임제 대통령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재임 기간이 너무 짧아서 장기 비전 없이 재임 기간 내 결과를 보려고 조급하게 밀어붙이기만 한다거나, 3년째부터는 레임덕에 빠져 국정 운영의 동력을 상실한다거나, 국민으로부터 재평가받지 않으니 국민 요구에 둔감하고 반응성이 떨어진다며 비판한다. 하지만 4년 중임이 되면 첫 4년은 재선을 위해 더 단기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정책 위주로 국정을 운영하며, 향후 4년은 5년 단임제와 다를 바 없다. 레임덕도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의원내각제가 곧 민주정치를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다. 정당이 정치의 중심이 되는 만큼, 정당의 질과 정당 체제에 내각제의 성패가 달려있다. 한국 정당의 낮은 수준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극한 대결도 마다하지 않는 양당 체제인 점을 고려해야 한다.”


저자는 극단적인 양당 체제를 지적했지만 내게는 정당의 질과 정당의 체제가 문제라는 말로 들린다. 솔직히 우리나라에 정당다운 정당이 존재하기는 한 건지 의심스럽다. 도대체 무엇을 추구하는 정당인지도 불분명하고, 일관성이나 논리는 고사하고 결정한 걸 뒤집기를 손바닥 뒤집기보다 더 쉽게 생각하니 이들에게 원칙을 기대하는 건 연목구어와 다를 바 없다. 게다가 요즘엔 패거리 지어 다니며 시정잡배만도 못한 일을 고개 빳빳이 들고 잘했다고 내세우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굳이 사람을 키워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저 꿩 잡는 게 매라고 그때그때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사람을 필요한 대로 끌어다 쓰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한국의 정당은 공직 후보자를 키우는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선거에 나설 인사는 당장 외부에서 영입한다. 그리고 한두 번 당선되고 나면 다른 영입 인사로 교체해버린다. 지역에서 활동하고 노동조합, 경제단체, 의사협회 등의 직능단체와 협력하며, 지역과 사회경제적 문제를 연계해 당 차원에서 논의하는 당원들은 어느덧 뒤로 밀려났다. 대신 온라인에서 손가락만 까딱하는 팬덤 당원들이 당 대표 선출부처 공천까지 좌지우지한다. 일부 정당에서는 직접민주주의라며 당원들이 당 대표와 직거래하고 홍위병처럼 극렬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팬덤 당원들과 외부에서 영입된 인사들이 당론이라는 이름으로 당쟁에 동원되고, 초짜 의원들은 당론에만 끌려다니다가 그냥 버려지는 형국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정책 정당의 길은 요원하다.”


정당 활동에서 정책이 실종되었으니 과연 정당이 자리싸움 말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남았을까? 그런데도 국회에서 발의되는 법률은 이루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몇 년 전, 차별금지법 때문에 광풍이 일었을 때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아보려고 2007년 법무부에서 제안한 이래 2020년까지 무려 아홉 차례나 발의와 제안이 이루어진 차별금지법 조항을 하나하나 살핀 일이 있다. 이 중 2020년 이전에 발의된 7건은 보수 기독교계의 완강한 반대로 심의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채 국회 회기 만료로 폐기되거나 발의자가 스스로 철회했고, 두 개 법안이 상정된 상태였다.


이때 놀란 것은 21대 국회가 2020년 6월 5일에 개원했는데, 장혜영 의원 등 10명이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날이 6월 29일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국회의원 혼자서 법안을 발의하는 게 아닌 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법안을 발의하려면 법안을 제대로 이해할 뿐 아니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법이 미칠 여파를 헤아리고, 그를 감당할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 게 아닐까. 더구나 대표 발의한 장혜영 의원은 당시 초선이었고, 그것도 비례대표 선정 직전에 당 대표가 독단으로 밀어붙여 후보가 된 사람이니 자신이 국회의원이 되어 차별금지법을 발의하겠다고 꿈조차 꾸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그가 평소에 차별금지법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졌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 달도 안 된 기간에 발의할 만큼 법안 만드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이었을까?


난데없이 국회의 법안 발의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 건 저자가 “의회의 힘이 강하기로 유명한 영국 의회가 고무도장이라고 불릴 만큼 행정 각부에서 만들어 보낸 법안의 97%를 무사통과시킨다”고 설명하는 걸 듣다가 문득 든 질문이었다. 설마하니 행정 각부에서 되지도 않는 법안을 만들고, 그 법안이 내각 회의를 통과하고 총리가 서명했을까. 그리고 그런 법조차 고무도장을 찍어주었을까. 국회 뒷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신이 발의자로 참여한 의원 중 대다수가 법안을 이해하기는커녕 읽어보지도 않고 이름만 빌려주는 경우가 허다하다니 입법을 입법부 의원들에게 맡기는 게 옳은 일일까 하는 말도 되지 않은 의문이 생긴다.


오래전에 정당 정치학자인 박상훈의 글을 읽으면서 과연 어느 정당이 정당으로서 기능하는지 살펴본 일이 있었다. 당시 정의당이 유일하게 그런 정당이었다는 걸 알고 매우 놀랐다. 그 이후로 정의당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지난 대선에서는 처음으로 보수 정당이 아닌 정의당에 표를 던졌다. 하지만 한때 6퍼센트를 넘었던 득표율이 처음으로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쇠락하였다. 지난달 헌법재판소에서 비례대표 의석 배분 기준을 정당 득표율 3퍼센트 이상으로 제한한 공직선거법에 대해 재판관 7대2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 소식에 제대로 된 정당으로 기능하는 정의당이 이를 발판으로 회생하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저자는 비례대표 의석 배분 기준을 현행 3퍼센트에서 오히려 5퍼센트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살펴보니 읽기에 따라서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어 보여 인용한다.


“최소 정당 득표율같이 아주 작은 정당이 의회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치를 두지 않고 정당 득표율 그대로 의석을 나누는 순수 비례대표제를 채택한 프랑스 4공화국과 이탈리아는 의회 안에 정당이 난립했다. 단독 집권이 불가능한 것이다. 반면 영국은 소선거구제를 채택해 1등만 당선되는 체제이므로 유권자들은 당선 가능성이 큰 정당의 후보에게 투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양당제 국가가 된다. 그러니 어떤 당도 단독으로 입법부인 국회의 과반을 차지하게 해서는 안 된다. 비례대표제는 다당제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파편화된 다당제는 막아야 한다. 유효 정당 수 4~5개 정도의 온건 다당제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봉쇄조항을 현행 3퍼센트에서 독일처럼 5퍼센트로 높여야 한다.”


이쯤 되니 저자가 누군지 궁금해진다.


양재진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미국 럿거스대학 정치학 박사. 한국행정학회 편집위원장, 한국사회보장학회장,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장 등을 역임했단다. 저서 중에 <김대중 대통령의 복지노동개혁>이 들어있다. 이것으로는 봉쇄조항을 5퍼센트로 올리자는 그의 주장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짐작하기 쉽지 않다.


사실, 이 책이 정당과 정치에 관한 책인 줄 모르고 읽기 시작했다. <정부의 원리>라는 제목 때문에 행정부 조직을 분석한 것이라 지레짐작한 것이다. 정당정치에 관한 책이라면 앞서 언급한 후마니타스 대표이자 정당 정치학자인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의 저서만 한 것이 없다. 리뷰를 쓰기 전이어서 그 책을 읽고 느꼈던 감동을 되새길 수 없어 아쉽다. 생각난 김에 그의 저서 중 전자책으로 출간된 네 권을 온라인서점 구매목록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정작 읽으려는 <정당의 발견>은 전자책으로 발간되지 않은 데다가 종이책도 절판이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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