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유대인

by 박인식

슐로모 산드

김승환 역

사월의책

2023년 7월 1일


나는 국민학교 시절 성탄절 잔치 구경하러 교회에 발을 디딘 아래로 지금까지 기독교인으로 살고 있다. 내 나름대로 이스라엘에 대한 이해가 없을 수 없다는 말이다. 50대 중반의 나이로 뒤늦게 현지법인에서 일하게 되면서 이스라엘의 지척이라 할 수 있는 사우디에서 13년을 지냈다. 이스라엘의 환경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곳 광야에서 주변 아랍국가의 눈에 비친 이스라엘을 체감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 이스라엘에 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그동안 가져왔던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숫자에 관한 의아함이 성경의 무대인 요르단을 여행하면서 의심으로까지 발전했다. 아마 숫자에 예민한 이과생의 특성이 한몫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약자와 소수자의 처지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인데, 생각해보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모든 게 은혜일 뿐이다. 그러던 중에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격돌하고 그것이 오늘 이스라엘과 미국이 한편이 되어 이란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최근에 이스라엘에 관한 책을 연속해서 읽게 된 배경이다. 그런 내게 <만들어진 유대인>이라는 책은 제목만으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특히 ‘만들어진(invention)’이라는 표현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요 몇 년 사이에 일란 파페와 홍미정 교수의 일련의 저서를 읽으면서 '유대 전쟁 이후 로마제국의 강제 추방으로 유랑하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을 이천 년만에 성취한 유대인’이 사실은 허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경 형성사에 한동안 심취했다. 요르단을 다녀와 가졌던 의심 때문이었다. 우선 숫자가 맞지 않았다. 장정만 60만, 가족까지 최소 2백 만이 넘는 이들이 머물렀다는 모압 광야는 6만이 머물기도 부족했다. 거기서 비롯된 숫자에 관한 의심은 구약성경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성경을 글자 그대로 믿은 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사람이 기록한 것이니 기록자의 상황과 지식을 뛰어넘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표현하려니 은유와 상징이 동원되었을 거라는 정도의 이해는 있었다. 하지만 성경 형성사를 읽어 가면서, 성경은 특정한 기록자에 의해 어느 한 시점에 기록된 것이라기보다는 구전으로 내려오던 게 기록이 되고, 그 기록이 필사로 전해져오면서 필사자의 의도에 따라 가감과 편집이 이루어졌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은 더 이상 성경을 역사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성경을 역사서가 아니라 신앙고백서로 여긴다. 다행히 그 과정에서 신앙이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좀처럼 손대지 않는 벽돌책인 데다가 읽어가면서 막히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한 달 가까이 씨름해야 했다. 얼마쯤 읽다가 다시 목차로 돌아가 살핀 후 2장 ‘역사가 된 신화’와 3장 ‘너무 많은 유대인’을 중심으로 읽기로 했다. 그것만이라도 제대로 이해한다면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깝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저자는 이스라엘에 뚜렷한 역사학이 존재하지 않아 왔다고 말한다. 성경을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끔 어떤 연구 결과로 단절 없는 직선적 유대 역사라는 그림을 위협해도 그 연구는 거의 인용되지 않았다. 민족적 긴급 상황이라는 자물쇠가 지배 서사를 옥죄어 어떤 것도 이탈하지 못하게 했다. 유대 역사학과가 따로 설립되어 일반 역사와 중동 역사학과는 완전히 단절된 채 배타적으로 연구를 수행했다. 이 유대 역사학과들의 고집스러운 배타성 때문에 유대인의 기원과 정체성을 냉철하게 조사할 새로운 역사학이 나올 길도 막혀버리게 되었다. 이스라엘 역사가들에게 유대인이란 ‘이천 년 전에 추방된 민족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역사 기록 어디에도 로마가 유대 전쟁 이후 주민 전체를 강제 추방한 사실이 나타나지 않고, 이처럼 1~2세기에 유대인이 강제 추방당한 일이 없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학문적 반박이 나온 일이 없다고 말한다. 유대인 수난의 또 다른 상징적인 사건인 앗시리아(앗수르)와 바빌로니아(바벨론)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한 사실도 없고 그때 끌려갔던 포로들이 자발적으로 돌아간 기록도 당연히 없으며, 역사적으로 그런 흔적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그런 주장을 이어가는 것은 그래야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 자신도 몇 년 전만 해도 유대인의 추방과 이어지는 유랑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었다면서, 그때도 이천 년 동안 떠나있던 사람이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면 천이백 년 동안 살아온 사람에게 아무 권리도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귀담아들을 만한 말이다. 사우디를 건국한 압둘아지즈 국왕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 건국에 동의해달라고 요청하자 “자기 땅으로 여기는 곳으로 돌아오겠다고 할 수는 있지만, 어떻게 그게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들을 내쫓는 것이 되어야 하느냐”고 반박했다는 기록을 읽으며 어떤 논리로 이걸 반박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이다.


그동안 읽은 일련의 이스라엘 관련 서적에서 공통으로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로 이주해 나라를 세운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에 의해 추방되어 유랑했던 유대인의 후손이라는 걸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슐로모 산드에 따르면 추방과 유랑이 일어났다는 기록도 흔적도 없고, 그런 자신의 주장에 학문적인 반박조차 없을 만큼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니, 존재하지 않은 유랑하는 유대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게 오히려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러면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실체적인 역사로 여기는 성경의 기록은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 성경을 논증하는 이들이 자주 성경이 역사적 기록이라는 근거로 삼는 것 중 하나가 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와 <유대 전쟁사>이다. 놀랍게도 이 책에서 저자는 <유대 고대사> 앞부분의 유일한 출처가 성경이라고 주장한다. 천지창조부터 아브라함의 등장, 출애굽을 거쳐 에스더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이야기를 그대로 복사했으며, 성경의 이야기가 끝나고 유다 지역 사람들 이야기를 다루는 부분에 가서야 세속의 출전에 의지했다고 말한다.


결국 성경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이 성경을 복사한 데 지나지 않는다니. 결론을 이미 전제로 사용해 버리는 오류를 순환논증의 오류라고 하는데, 요세푸스의 사례가 그렇다는 게 아닌가. 성경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논증하는 이들이 이걸 몰랐을까?


저자는 성경의 역사성을 논증을 통해 하나씩 무너뜨린다. 그는 성경은 인간이 작성한 자신의 과거를 재구성한 저작이며 신학적 담화라고 말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나 역시 성경을 신앙고백서로 이해하고 있으니 그의 논증 하나하나가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을 읽는 느낌마저 든다.


저자는 천지창조는 물론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 당해 포로로 끌려간 사실도 없고, 끌려간 사실이 없으니 돌아온 사실도 없고, 출애굽도 없었던 일이라고 단언한다. 성서고고학에 따르면 출애굽이 일어난 기원전 13세기 당시에 가나안은 강력한 파라오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300만이 넘는 유대인이 유랑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유대인들이 애굽에 대항하고 애굽을 탈출하고 시내 광야를 유랑했다는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가나안을 유대인에게 정복당했다는 수치스러움 때문에 기록을 없앴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렇게 애굽의 민족적 텍스트를 지우는 것이 그들에게 훨씬 큰 손해일 만큼 그들의 성취는 압도적이었다고 물리친다. 더 나아가 다윗 왕국도 솔로몬 왕국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여리고성은 당시 그럴만한 인구도 없었고,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보다 훨씬 안정된 강국이었고 문화적 성취도 높았고, 남아있는 사마리아의 거대 구조물들도 북이스라엘 왕국의 유산이라는 것이다. 이에 이어 저자는 창조 기사, 노아의 방주로 알려진 대홍수, 야곱이 천사와 씨름한 것까지도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기 역사가 확고하고 정확한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세월이 흐르면서 성경은 점점 구체화하고 가나안 정복, 정복한 가나안 땅을 12지파에 나누어주는 과정, 사사시대와 통일왕국의 기록에 세세한 연대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러한 유대인의 역사는 이스라엘 건국을 앞두고 정치와 결합해 더욱 견고해진다. 심지어 성경이 분명한 자료로 반박될 때 자신들은 그걸 받아들일 의무도 없고, 그게 틀렸을 수도 있다는 논리로 그를 외면한다. 이로써 민족 정체성은 더욱 견고해지고, 그것으로 팔레스타인 점거를 정당화한다.


저자는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유대인, 유대민족에 대한 해석이 허상이었다는데 할애한다. 하지만 그건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이고, 더구나 매우 학술적인 내용이어서 읽기는 했어도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2장과 3장을 통해 관심을 두던 일에 대한 이해를 좀 더 키웠을 뿐이다.


총체적으로 내게는 읽기도 이해하기도 버거운 책이었다. 그래도 건진 게 아주 없지는 않았다. 혹시나 나중에 참고할 일이 있을까 싶어 열심히 밑줄 그어가며 읽었는데, 그 분량이 너무 많아 나중에 필요한 부분 찾는 것도 쉽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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