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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Dec 02. 2020

여행준비의 기술

추억이 풍성해지는 일

박재영

글항아리

2020년 11월


추천사


몇 달 전 일이다. 젊은이 하나가 여러 나라를 다니며 쓰레기 처리 과정을 살펴보고 쓴 책이 온라인에 올랐다. 하는 일이 그것이어서 관심을 가졌다. 검색해보니 추천사를 쓴 이들의 면면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서울시장이 감명 받았고, 교육부장관이 지구환경문제에 거름이 될 거라고 하고, 경기도지사가 쓰레기 문제를 명쾌하게 밝혀준다는 책이 도대체 어떤 책인지 궁금했다. 전 세계를 직접 돌면서 쓰레기의 시작과 끝을 살펴본 최초의 인류라는 글도 있었다. 61개국 157개 도시를 돌며 확인하고 썼다는 그 책을 읽고 앞으로 추천사는 쳐다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책을 읽었다면 낯 뜨거워 차마 그런 추천사를 쓰지는 못했을 것이니 말이다.


까칠하기 짝이 없는 강양구 기자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격찬하며 신간을 추천하는 글을 올렸다. 의아해하면서도 궁금증이 일었다. 책 추천하는 글을 본 기억이 별로 없는데 “아마도 저자가 ‘박재영’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읽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 책을 추천했다. 긴가민가하면서 일단 읽기로 하고 댓글을 달았더니 이진우 기자가 자기는 보증 같은 거 잘 안 하는데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고 오금을 박았다. 책을 읽다 보니 강양구 기자가 저자를 윽박지르다시피 해서 출간을 앞당겼고, 이진우 기자는 추천사까지 썼더란 말이지.


처음 한 장을 읽어놓고 잠깐 덮었다. 더 붙들었다가는 일을 못할 것 같아서였다. 급한 불 꺼놓고 다시 파일을 열고 내쳐 끝까지 읽었다. 읽고 나서 ‘박재영’이 누군지 궁금해졌고, 일단 팟캐스트 <YG와 JYP의 책걸상>과 <나는 의사다> 구독하고 한 꼭지씩 들었다. 음... 앞으로 시간 쪼개 쓰느라 머리 좀 아프게 생겼다.


여행준비


저자는 스스로를 <여행준비러>로 부른다. 밴쿠버로 휴가 떠나는 후배에게 가보지도 않은 셰익스피어 축제를 천연덕스럽게 추천하지만, 그것으로 그 후배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쌓고 돌아온다. <여행준비러>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저자는 “여행준비의 가장 큰 장점은 여행이 풍성해지는 게 아니라 추억이 풍성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개를 격하게 끄떡이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겪어봤으므로.


은혼식을 한 해 앞둔 결혼기념일에 아내에게 유럽여행을 가자고 했다. 나야 출장으로 몇 번 다녀왔지만, 아내는 그때까지 해외여행은커녕 신혼여행 때 제주도 간 것 말고 비행기 타본 일도 없었다. 저녁 먹고 돌아오는 길에 반신반의 하는 아내 손을 붙들고 서점에 가서 커다란 유럽지도를 하나 사들고 왔다. 방 한가득 펼쳐놓고 그날부터 여행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아내와 꼭 함께 다시 찾으리라 마음먹은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출발해 잘츠부르크를 거쳐 로마까지 유럽을 북에서 남으로 종주하리라 생각했다. 날짜를 따져보니 못해도 두 주는 걸릴 여정이었다. 직장에 매어 있는 사람이 엄두 낼 수 있는 기간이 아니었다.


틈틈이 아내와 함께 여행안내서를 읽고, 여정을 짜고, 숙소는 물론 하다못해 매끼 먹을 음식점까지 다 찾아 놨다. 한 해 꼬박 무엇을 돌아보고, 어디서 자며,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고 때로는 의견이 맞지 않아 투닥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휴가 일정을 잡고 몇 달 전부터 그때 자리 비우는데 문제가 없도록 다른 부서에, 거래처에 오금을 박아두었다.


여러 고비가 있었지만 끝내 두 주 휴가 받아내는데 성공하고 아내와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한 해를 꼬박 궁리해 계획을 세우고 계획이 틀어질 때 대안까지 마련해 놓았으니 여행 일정이 흐트러지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니었겠나. 얼마나 여행안내서를 들여다봤는지 숙소도 음식점도 너무나 익숙했다. 지금도 당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진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준비해서 알차게 여행을 마쳤기 때문이 아니라, 한 해 동안 아내와 함께 궁리하며 기대했던 그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달에 결혼 40주년을 맞았다. 과연 금혼식을 맞을 수 있을까 했는데 이미 코앞이다. 은혼여행을 한 해 동안 준비했으니 금혼여행을 십 년 준비하는 건 어떨까? 저자는 여행준비에 가장 중요한 것이 여행의 명분을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그건 그들 이야기이고, 나이 먹은 우리가 괘념할 일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나이 먹어 좋은 일이 이렇게나 많구나. 아내는 돈은 제대로 써야한다는 사람인데다가 나보다 여행을 좋아하니 금혼여행 동의 얻는 건 일도 아니겠다. 그러면 어디 ‘박재영’의 힘을 한 번 빌려 볼까?


걸어서 세계 속으로


<걸어서 세계 속으로> 주제곡이 오카리나 연주자 한태주의 <물놀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그 노래 들으면 마음 설레는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와 <세계테마기행>은 빼놓지 않고 챙겨볼 뿐 아니라 가지고 있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 방송 파일을 세어보니 무려 643개나 된다. 1 TB 외장하드의 용량이 간당간당하다. 이 정도면 저자에게 <여행준비러>에 끼워달라고 할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가 그렇듯, 저자는 명소보다는 의미 있는 곳, 색다른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을 권한다. 로스앤젤레스를 가더라도 할리우드가 아닌 야외극장 ‘할리우드 볼’에서 열리는 클래식 공연을 보라고 말한다. 그곳은 클래식 공연장인데도 특유의 분위기나 엄숙함과는 거리가 멀고, 복장 제한도 없고 음식물 반입 제한도 없단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도시락 싸들고 와서 맥주나 와인을 홀짝거리며 음악을 듣지만, 그렇다고 연주가 허름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했다. 무대 위에는 LA필하모닉에 유명한 연주자나 성악가도 자주 등장한다며, 공연 말미에 화려하게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도 보라고 부추긴다.


음악에 관한한 나도 스스로를 애호가라고 부를 정도가 된다. 미국 출장 때는 뉴욕에서 스탑오버해 기어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을 찾았다. 욕먹을 일이었지만, 미국 출장 일정이 잡혔을 때 제일 먼저 극장 홈페이지에 들어가 공연일정부터 살폈다. 마침 전곡을 외우다시피한 ‘피가로의 결혼’ 공연이 있었고, 게다가 홍혜경이 백작부인을 노래했다. 출장지인 신시내티에서는 마침 신시내티 뮤직홀에서 있었던 바이올리니스트 바딤 래핀(Vadim Repin)의 연주회에 참석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저자는 미술관을 즐겨 찾지만 나는 주로 음악가의 흔적을 따라다녔다. 은혼여행은 온통 그 흔적을 따라다니는 여정이었다.


빈에 머물던 사흘 내내 음악가의 흔적만 따라다녔다. 베토벤이 십여 년 넘게 살며 작품을 쓰던 집이며, 모차르트 기념관인 피가로하우스며, 도시 곳곳에 있는 음악가의 조각상을 찾았다. 베토벤이 오르내렸을 계단의 난간을 쓰다듬으며 그의 손길, 그의 숨결을 느껴보려고 했다. 신년음악회가 열리는 뮤직페라인홀을 찾았지만, 그날따라 극장 투어가 없는 날이어서 담당 직원에게 잠깐이라도 극장 안을 볼 수 없겠느냐 부탁했다 보기 좋게 거절당하기도 했다. 마지막 날 시내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중앙묘지를 찾았는데, 묘지가 아름답기도 하더라마는 묘지는 묘지 아닌가. 인적도 드물고 게다가 그곳을 찾았을 때 곧 비라도 내릴 듯한 기세여서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그렇기는 해도 모차르트 묘지를 둘러싸고 있는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슈트라우스의 묘지를 발견하고는 그들의 흔적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내내 함께 한 아내도 상기된 표정이었다.


난 아내가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유럽을 여행하며 예술가의 흔적을 찾는다는 게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호사는 아니지 않은가. 여행 다녀오고 한참 지난 후 아내가 친구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더라. 워낙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음악가의 흔적을 쫓아다니는 것까지는 이해를 하겠던데, 마지막 날 묘지까지 끌고 가는데 기가 차더란다. 말하자면 상기된 게 아니라 열 받은 거였다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


가보고 싶은 곳, 해보고 싶은 일


런던 갈 계획을 세우며 몇 시간이라도 짬을 내서 하이드파크에 도시락바구니 들고 가서 자리 펴놓고 누워 책도 읽고 낮잠도 자볼 생각을 했다. 굳이 하려고 했으면 못할 바도 아니었는데, 몇 번 갈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러지 못해 아쉽다. 오슬로에 출장 갔을 때 주말동안 베르겐을 다녀왔다. 오슬로 호텔비가 워낙 비싸 주말 3박 요금만으로 베르겐을 만끽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없는 주머니 털어서 그곳에서 유명하다는 은세공 목걸이를 사면서 이곳만큼은 꼭 아내와 다시 와보리라 마음먹었다. 아직까지 마음뿐이다. 빈까지 가서 빈 오페라를 보지 못하고 온 건 두고두고 아깝다. 적어도 두어 달 전에는 예약을 해야 했는데, 휴가를 얻을 수 있을지 말지도 모르는 상태였으니. 천정 밑 좌석도 없었고 당일 취소된 좌석도 없어 분루를 삼켰다.


저자는 차를 빌려 여행하는 걸 적극 권한다. 이점이 훨씬 많더라는 것이다. 문제는 여정이 길게 펼쳐질 경우이다. 이 나라에서 빌려서 저 나라에서 반납하는 게 가능하기는 했지만, 그 비용이 반납하는 곳에서 사람을 사서 다시 빌린 곳으로 보내는 것만큼 비쌌다. 그래서 차를 빌려 도시를 이동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도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이점이 훨씬 많기는 해서 잘츠부르크에서는 버스관광으로 먼저 몇 곳을 찍고 다음날 차를 빌려 한 곳 한 곳 돌아보았다. 그렇기는 해도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고단한 다리를 풀어주는데 맥주가 빠질 수 있을까. 나 역시 마찬가지로 음주운전 걱정을 했다. 음식 나르는 이에게 맥주 한 잔도 운전하는 데 문제 되느냐 물어보니 되레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고 묻더라. 그래도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그저 한두 잔.


적지 않은 나라를 다녀봤지만 아직도 좌측통행하는 나라에서는 운전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저자의 부추김에 힘입어 한 번 시도해볼까 싶기도 하지만, 저자의 글을 끝까지 읽고 보니 운전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헷갈린다. 자기니까 가능하다는 자랑 같기도 하고. 저자는 일본에서 대리운전 부르려면 그저 음식점에 이야기만 하면 된단다. 그런데 대리운전 부탁하면 왜 깔끔한 제복 입은 사람이 경차를 타고 두 명씩이나 오는지 설명이 없다.


저자의 마지막 서비스에 힘입어 방콕 미드나이트 푸드투어를 해볼까 한다. 노르웨이 플롬은 언젠가 베르겐 여행길에 오를 때 꼭 들러보리라. 스페인 파라도르에서 묵어보고 싶기도 하고, 마이애미 키웨스트 해안을 달려보고 싶기도 하지만, 거기까지 갈 거라면 차라리 조금 건너 뛰어 쿠바를 가겠다.


현직을 떠날 날이 멀지 않았으니 앞으로는 남는 게 시간이겠다. 돈만 마련하면 될 일이지만, 머리를 쥐어짜내면 큰 돈 안 들이고 다녀오는 길도 있지 않을까. 그나저나 뭐 어디 갈 수가 있어야 말이지. 저자는 코로나로 발이 묶여있는 동안 여행하고 싶은 갈증을 이 책을 쓰는 것으로 달랬다고 하는데, 나는 그저 이 책을 읽고 이렇게 푸념이나 하는 것으로 달래야 할 모양이다.


저자가 희망하는 대로 이 책의 인세로 여행경비를 충당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세상이 발길을 풀어주지 않으면 그 인세로 후속작이나 쓰면 좋겠다. 이번에는 ‘가봤지만 기대에 영 미치지 못한 곳’이 어디였는지, ‘큰 기대 없이 갔는데 너무나 좋았던 곳’은 어디였는지 쓰는 건 어떨까. 이 글을 쓰면서 그동안 갔던 곳 중에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실망한 곳이 어딘가 생각했는데, 그닥 떠오르는 곳이 없다. 아마 이건 저자도 마찬가지일 건데, 여행이라는 게 워낙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감사


이 책을 강력 추천한 강양구 기자 글에 재미없으면 책값 청구하고 재미있으면 그 값으로 식사 대접한다고 댓글을 달았다. 약속한 대로 어디로 모실지 결정해야 하겠다. 추천사 써주신 이진우 기자도 함께 모시고. 그런데 유명인들이 나 같은 범부 만날 시간이나 나시려는지 모르겠다.


내내 흥미진진하게 읽도록 만들어준 저자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저자는 글을 참 맛깔나게 쓴다. 책을 손에서 놓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부모님 모시고 남해안 여행을 다녀온 얼마 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기분이었다.


“건강히 잘 계시다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신지 2주일 만이었다. 책 읽기, 글쓰기, 신문 보기, 야구, 그리고 가족을 사랑하셨던, 언제나 여행을 꿈꿨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그리 자주, 아주 멀리까지는 가보지 못했던, 평범한 한 남자가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자의 아버님은 행복하셨겠다. 아직 그 나이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책 읽고, 글 쓰고, 신문 보고, 야구 보는 걸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런 아버님을 그렇게 기쁘게 보내드린 저자가 고맙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해 안타깝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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