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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Dec 09. 2020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평화와 인권과 환경

구정은

후마니타스

2019년 12월


내공


사우디에 살면서 사우디 소식을 이곳 신문이 아닌 한국 신문을 통해 먼저 듣는다. 몇몇 영자신문이 있지만 배달은 늘 들쭉날쭉하고 인터넷신문도 업데이트 되는 속도가 영 한국 신문에 미치지 못한다. 예민한 문제는 아예 보도가 되지 않고, 때로는 외신의 특정 보도내용에 대한 링크가 막혀있어 아들에게 기사를 파일로 만들어 보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중동문제에 탁견을 풀어내는 몇몇 논객을 알게 되었다. 신문이 사실을 보도한다면 그들은 늘 행간을 읽어냈고, 그 덕에 이곳 상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논객 중 한 분의 신간 소식을 듣고 살피다가 작년 이맘때쯤 펴낸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제목만으로는 문화면 어디에 실릴만한 글이 아닐까 짐작했다. 하지만 그 짐작이 빗나갔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분쟁과 재난과 테러에 관한 기사를 많이 썼고, 평화와 인권과 환경에 대해 좀 더 많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기자답게 어느 하나 허투루 읽을 수 없는 묵직한 주제였다. 그동안 저자가 쓴 칼럼을 읽으면서 매번 그 양에 놀랐다. 결코 만만할 수 없는 주제에 대한 글을 어떻게 그렇게 쉼 없이 쓸 수 있는지. 나 같으면 한 주에 하나 쓰기도 버거웠을 것인데. 물론 그럴만한 경험과 내공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겠는데, 기자라고 한 해 동안 두 해를 살 수는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책을 읽다보니 직접 보고 느끼지 않고는 쓰기 어려운 글이 대부분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바빌론의 흔적을 더듬은 이라크에서 출발해 학살의 현장인 엘살바도르와 루마니아, 분단된 키프로스, 내전의 깊은 상처를 간직한 유고연방, 원전사고가 일어난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이제는 소금 땅이 된 중앙아시아의 아랄호수, 알래스카의 녹아내리는 마을을 거쳐 추악한 이스라엘의 숨겨진 얼굴을 드러내는 데까지 이어진다. 결코 아무나 경험할 수 없고 때로는 마음의 동요를 억제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저자는 그 모든 광경을 마치 흑백사진처럼 담담히 훑어나간다.


환경


올해로 사회에 발을 디딘지 꼭 사십 년 되었다. 그 마지막 십 년 넘는 세월을 사우디에서 마무리하고 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돌아보니 남길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경험한 건 있어서 누군가 필요할 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씩 정리해가고 있다. 지난 한 달여 동안 주로 환경에 대한 내용을 쓰고 있다. 인구에서 출발해 쓰레기, 이를 처리하기 위한 소각장, 상수도, 하수도를 거쳐 어제는 지하수까지 마쳤다. 자연히 저자가 쓰레기와 물에 대해 펼쳐나가는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음식물 쓰레기는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킨다. 생활쓰레기 중에서 음식물 쓰레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월드뱅크에서 발표한 세계 평균치를 밑돌기는 하지만, 부패하면서 발생하는 악취와 침출수는 오히려 다른 쓰레기로 인한 문제를 압도한다. 저자는 이것뿐만 아니라 유기물로 이루어진 음식물 쓰레기가 다른 쓰레기들보다 메탄을 많이 내뿜는다고 지적한다.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온실가스인 메탄이 일으키는 효과는 이산화탄소의 20배에 이르는데, 미국의 경우 음식 폐기물에서 나오는 메탄이 전체 메탄 배출량의 약 25%를 차지한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늘 하는 일이니 내게도 익숙한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는 놀랍게도 이 일로 먹고사는 내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를 지적한다.


저자는 먹을 것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온실가스가 배출되는데, 세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산화탄소의 1/3가량은 농업에서 비롯되며, 특히 축산업은 세계의 탄소 배출량에서 15%를 차지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비싼 환경 비용을 치르며 생산된 농축산물의 상당수가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지면서 또 다시 엄청난 양의 온실가스가 대기 속으로 쏟아져 나온다고 말한다. 식품을 생산하기까지 물과 땅과 에너지와 노동과 자본이 수없이 들어가고 그 과정에서 온실가스가 배출되지만, 이 모든 노력은 음식물과 식재료가 쓰레기통에 던져지는 순간 무용지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저자는 현대사회에서는 더 신선한 먹을거리와 더 맛있는 재료를 내세워 소비자를 유혹하는 바람에 충분히 먹을 만한 것들이 폐기되는 과잉생산과 과소비를 지적하기 위해 이런 내용을 서술한 것으로 보이지만, 나는 쓰레기가 되기 이전에 식재료가 만들어지기까지 발생하는 온실가스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설명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기껏 생각을 확장한다고 해봐야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와 ‘음식물조차 충분히 사지 못하는 빈곤층’ 사이에 놓인 큰 간격에 대한 문제의식 정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자의 설명 중에 또 하나 내 좁은 시야를 확인하게 만든 것이 있었다.


저자는 월드뱅크에서 2010년 하루 350만 톤이었던 쓰레기가 2025년에는 600만 톤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인당 하루 쓰레기 발생량이 0.64kg에서 2025년에는 1.42kg으로 증가한다는 것인데, 내가 놀란 것은 15년 사이에 70%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발생량이 0.64kg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쓰레기 발생량은 경제수준에 비례한다. 그러나 발생량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것뿐이 아니다. 우리나라 하루 쓰레기 발생량이 최대 2kg에 가까웠던 때가 있었다. 이후 쓰레기 관리가 강화된 시점과 쓰레기 종량제가 실시된 시점, 두 번에 걸쳐 큰 폭으로 줄어들어 최근 10년 넘게 1kg을 넘기지 않고 있다. 현재 사우디의 발생량은 대체로 1.5kg 정도로 잡고 있다. 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인 우리나라와 2만 달러인 사우디의 쓰레기 발생량이 역전된 것은 경제수준이 아니라 쓰레기 관리능력 때문인 것이다.


나는 그동안 쓰레기 관리능력을 향상시키는 방안을 마련하는 일을 해왔다. 그러다 보니 쓰레기 발생량이 쓰레기 관리능력에 달려있다는 생각에 매어 경제수준에 비례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있었다. 그러니 책에서 현재 인당 하루 쓰레기 발생량이 0.64kg에 지나지 않는다는 서술이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의아함이 내 편견의 결과인 것을 깨달았다. 경제수준 때문에 절반에 가까운 나라가 쓰레기를 평균치보다 적게 발생시킨다는 건 내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심스럽지만 저자가 언급한 내용에 한 가지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저자는 “경제협력개발기구 35개 회원국은 세계 평균보다 더 많은 쓰레기를 내놓는다. 2050년에 정점에 이르렀다가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경제성장이 한계에 달했고 인구가 감소되거나 정체되는 추세에 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것도 이유일 수 있으나 나는 그것보다는 쓰레기 관리방안이 개선된 결과일 것으로 생각한다. 쓰레기 관리의 최종 목표는 ‘Zero Waste’이므로.


중앙아시아의 아랄호수는 용수확보를 위해 운하를 파고 유입 물길을 돌리는 통에 물이 말라 40년 사이에 남북 두 개의 호수로 나뉘었고, 이 중 남아랄호수에는 사막이 된 바다, 흐르지 못하는 강, 호수를 건너는 소 떼, 어부 아닌 어부들만 남았다. 이스라엘이 집단농장에 필요한 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요르단강과 사해의 물뿐 아니라 관정을 뚫어 지하수를 무분별하게 끌어다 쓰는 통에 수원은 마르고 사해의 물 높이는 갈수록 낮아졌으며, 기후변화 탓에 건조기후가 심해지면서 사해는 이미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들어섰다. 아프리카 내륙의 차드호수는 강 주변에 생긴 댐과 주변 인구가 늘면서 여러 나라가 경쟁적으로 물을 끌어다 관개용수로 사용하는 통에 1963년부터 1998년 사이에 수량의 95%가 줄었다. 2000년대 들어 국제사회가 차드호수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2014년 무렵 호수의 깊이는 간신히 배를 띄울 정도였다.


사우디도 형편은 다르지 않다. 사막이다 보니 다시 채워질 수 있는 재생지하수(renewable groundwater)는 없고 오직 퍼서 쓰고 나면 없어지는 화석지하수(fossil groundwater) 뿐인데다가, 그 마저도 이미 80%가 소진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상수도의 절반을 지하수로 충당하고 있다. 문제를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멀지 않은 장래 어느 날 이것이 국가적인 문제로 대두된다면 모두들 느닷없다고나 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2015년 사해 보전을 위해 요르단 남쪽의 홍해와 사해를 잇는 운하를 만들자는 협정을 체결했다. 이렇게 물길을 뚫으면 연간 약 3억km^3의 홍해 바닷물을 사해로 들여보낼 수 있다고 본다. (3억km^3이 아니라 3억m^3이 아닐까. 서술한 대로라면 초당 95억 톤의 물이 유입되어야 한다. 소양강댐 용량이 29억 톤이니 1초에 소양강댐을 세 개를 채울 만큼의 물이 유입되는 것이다. 1km^3=10억 톤) 운하야 토목공사에 지나지 않으니 하려고 들면 못할 것도 없다. 그런데 바닷물을 내륙으로 끌어들여도 환경이 평형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당연히 이 문제를 감안했겠지만, 그 판단을 누가 자신할 수 있을까.


지하수위 저하로 인한 문제는 수자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저자가 언급한 대로 싱크홀로 인해 지반이 불안정해지고, 이것이 지하수층을 압박해 지하수 저장 공간을 줄이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그뿐 아니라 지반의 유효응력(effective stress)이 줄어들어 지진이 일어났을 때 땅이 물처럼 유동하는 액상화현상(liquefaction)을 일으켜 지상의 모든 구조물을 집어삼키는 극단적인 파괴로 이어지기도 한다. 1985년 일어난 멕시코시티 대지진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화목


저자는 ‘하룻밤에 지은 집’이라는 뜻의 터키 이스탄불 ‘게체콘두’를 저임금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고발하는 사례로 설명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가난한 어촌을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상경한 한 청년과 1.4 후퇴 때 홀로 남하한 한 여인이 서울에서 만나 가정을 이뤘다면 그 삶이 어땠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찌어찌 해서 미아리고개 산동네로 이사를 왔는데, 거기서도 내 집에 대한 꿈은 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먹고 살기 바쁜 처지에 무슨 돈으로 땅을 살 것이며 집다운 집을 지을 수 있을까. 그저 빈 땅 봐뒀다가 밤새 뚝딱 집을 올렸다. 정말 자고 나면 집 하나씩 들어섰다. 어느 날 우리도 그런 집을 가지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철거반이 들이닥쳐 폐허가 되고, 남아있는 벽에 천막을 잇대어 움막을 만들고 지냈다. 그때는 모두 그러고 살았다.


남의 땅에 허가도 없이 집을 지었으니 재산권을 침해한 것이고, 원상으로 복구되는 것이 옳다. 그런데도 당시 어린 마음에 철거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저자는 인도의 대부호인 무케시 암바니도 27층짜리 대저택을 짓고 살지만 주변 건물들 사이에 살아가는 이웃을 내쫒지 않는다고 했다. 저택을 관리해주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바로 그런 이웃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잘 사는 사람들과 못 사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아예 다르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잘 사는 사람들로서는 잘 사는 사람들끼리 모양 좋게 살고 싶을 것이고, 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기는 하다. 그렇기는 한데 왜 우리는 인도에서처럼 어울려 사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고도 모든 시민들이 평화롭게 지내기를 기대하는 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멸종


저자는 사라진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싱가포르 언어학도인 케빈 윙이 자기 조상의 언어인 ‘크리스탕’을 살린 사례로 표현한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 조상들이 쓰던 걸 들어본 적도 없었던 케빈 윙이 그 언어를 살려냈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토착민들이 사라지면서 그들이 간직한 언어와 지혜도 사라진다고 말한다. 동시에 저자는 같은 장에서 ‘크리스탕’은 말레이반도에 살던 아시아계 주민들이 포르투갈 계와 섞이며 생겨난 언어라고 설명하며, 언어가 생겨나고 변화하고 합쳐지고 사라지는 일은 인류가 태어난 이래 반복돼 왔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려고 한 것이 인종이 다른 주민들이 섞이는 과정에서 ‘새로 생겨난 언어’라는 것이다. 저자가 말한 대로 기존의 언어와 지혜가 사라지는 것처럼 새로운 언어와 지혜가 생겨난다. 그리고 새로 생겨나는 언어와 지혜가 과거만 못한 것도 아닐 것이고, 어쩌면 그렇게 비교할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새로 생겨나는 언어와 지혜에 적응하지 않고 옛것을 지키고 이어가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과거의 좋은 전통 아름다운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좋은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한 정의도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게 아닌가?


그것은 이런 질문으로 바꿀 수도 있겠다. 환경이 바뀌면 정체성도 바뀌는데 굳이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로 그런 상황을 맞아야 하거나, 자기 방식대로 살아갈 권리를 부정하거나, 삶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까지 허용하자는 말은 아니다. 과거에 이런 외부 요인에 의해 삶이 달라지고, 그에 적응해 살아왔고, 그것이 역사가 되었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고 과거의 것이 그대로 유지되어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굳이 그런 역사를, 정체성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식이 외국에서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 딸만 둘을 두었다. 나는 전후 세대로서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라왔다. 그런 사고방식이라면 자식이 언젠가 귀국을 해야 하고,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아들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과거에는 그랬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생각이 바뀌었고, 필요하다면 굳이 국적을 고집하지 말라고 말했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자식이 결혼하기도 훨씬 전에 잊었다.


써놓은 것을 다시 읽어보니 주장이 과했다. 언어와 지혜, 전통을 무시하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기대


저자가 결코 만만치 않은 이 여정을 거치는 동안 얻은 것만큼이나 소진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쉼 없이 내달리다 보니 자세와 생각을 추스를 기회가 모자랐을 지도 모르겠다. 뜻하지 않은 코로나로 모두가 발이 묶였다. 이 때문에 그의 외적 성장이 멈췄을지는 모르겠으나, 오히려 내적 충실을 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저자의 나이가 얼마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오래 전 작고한 오라버니 구본준 기자의 나이로 미루어 아직 쉰은 되지 않았겠다고 짐작할 뿐이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계속 내공을 키워 그가 꿈꾸는 대로 ‘평화와 인권과 환경에 대해 좀 더 많은 글을 쓰는’ 기자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통찰을 줄 수 있는 글을 ‘지속적’으로 써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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