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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한판 붙자 맞춤법

그래도 맞춤법은 어려워

by 박인식

변정수

뿌리와 이파리

2019년 9월 27일 초판


국민학교 때부터 한자를 배웠다. 언젠가 한글전용 문제로 소란스럽기는 했지만 대학 마칠 때까지 국한문 혼용 세대로 살았다. 대학 졸업논문도 400자 원고지에 국한문 혼용으로 꼭꼭 눌러 썼다. 토씨 빼고는 모두 한자였을 것이다. 졸업하고 국책연구소에서 두 해쯤 연구보고서 쓰는 일을 도왔다. 선배들이 써놓은 보고서 교정보면서 띄어쓰기 때문에 고생을 했다. 지금 회사로 옮기고 첫 현장에서 ‘빨간 펜 상사’를 만났다. 돌아서서 욕은 숱하게 했어도 덕분에 맞춤법, 띄어쓰기에 눈 뜰 수 있었다. 현장에서 쓰는 용어가 대부분 일본어였지만 간혹 설명이 필요 없는 선명하고 게다가 아름답기까지 한 우리말이 있었다. 터파기, 줄파기, 모따기. 그때부터 가능하면 쉽고 선명한 우리말을 많이 쓰려고 했다.


맞춤법은 언제나 헷갈렸다. 문교부 국어어문규정집, 미승우 선생, 이오덕 선생 책을 끼고 살아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 책장에 꽂혀있는 맞춤법 책만 해도 열댓 권이 되지만 제대로 이해한 건 한 권이 없다. 작년에 페이스북에서 변정수 선생께서 쓴 ‘한판 붙자 맞춤법’이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제목만으로도 저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으나 eBook으로 나온 게 없어 아쉬워하던 차에 ‘일면식도 없는 지인’ 한 분의 배려로 손에 넣고 단숨에 읽었다.


책을 보내주신 분께 읽고 독후감으로 감사를 대신하겠노라 말씀드렸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해를 넘기고 여름에 접어들어서야 쓰겠다고 앉아있다.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기도 했고, 그나마 알고 있던 맞춤법이 오히려 뒤엉켜버린 것 같이 짜증스러웠다. 어쩌면 나름 안다고 했던 것이 잘못된 것도 많고 보잘 것 없다는 게 드러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펼치면 우선 맞춤법에 대한 정의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글(문장)과 글자(문자)를 구분 못하고, 띄어쓰기가 맞춤법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고, 표준어 문제를 맞춤법 문제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한글사전은 ‘맞춤법’을 ‘어떤 문자로써 한 언어를 표기하는 규칙’ 또는 ‘말을 글자로 적을 때 지켜야하는 일정한 규칙’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말을 글로 옮기는데 지켜야할 모든 법칙을 일컫는 말이니 철자법이나 띄어쓰기 뿐 아니라 표준어 역시 맞춤법에 해당한다는 것이 아닐까? 이는 ‘맞춤법은 한자어로 철자법 또는 정서법’이라는 저자의 설명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저자는 서문에서 어문규범의 ‘막연한 압박’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는 데 도움이 되게 하고 언제 어떻게 맞춤법과 맞붙어도 쉽사리 밀리지 않을 자신감을 부추기고자 이 책을 썼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맞춤법에 대한 정의부터 다르게 출발하니 자유로워지기는커녕 “그럼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게 뭐지?” 하는 생각에 오히려 자신감을 잃고 머릿속은 뒤엉키고 말았다.


이 책은 저자가 이십 년 가까이 출판편집자를 대상으로 강의했던 내용을 정리해 펼쳐낸 것이다. 그렇다고 독자를 출판편집자로 한정한 건 아니고,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는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을 독자로 상정한 것이다. 요즘 소셜미디어가 바로 그런 글의 플랫폼으로 이용되고 있으니, 말하자면 그런 플랫폼에 글을 올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책의 독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출판편집자처럼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써야할 것이고, 저자 또한 그런 의도로 썼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바른 글쓰기에 힘썼다고 자부하는 내게는 다른 맞춤법 책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으로 느껴졌다. 이런 우려 때문인지 저자는 내용이 이해하기 어렵다면 후반부에 해당하는 제9~15강은 접어두고 전반부에 집중하기를 권하고 있다. 저자가 예상한 대로 후반부를 이해하려고 든 것은 역시 무리였고, 그래서 전반부를 반복해가며 읽었어도 그 역시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저자의 주장에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했다. 그 중 몇 가지를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맞춤법은 규범이니 원활한 의사전달을 위해서 그리고 글의 품격을 위해 지키는 게 바람직하다. 반면 표준어는 어문 규범에 ‘표준어 규정’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걸 ‘규범’으로 여길 수 있으나 ‘규범’이 될 수 없고, 이 규정은 문화통제적인 발상이므로 폐지되어야 한다.” p.31


“사전에 풀이된 뜻으로 쓰지 않는 사람들이 잘못된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쓰고 있는 대로 풀이하지 않은 사전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단어가, 예를 들어 才媛, 원래 뜻과 다르게 사용하더라도 그렇게 사용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대로 뜻을 바꿔야 한다.) p.75


“한자를 알면 모르는 것보다 뜻을 이해하는 데 유리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얻을 수 있는 유익에 비해 한자를 익히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이 터무니없게 크다. 그러므로 일상적인 언어생활을 위해 따로 글자를 익혀야 하는 부담을 주는 건 옳지 않다.” p.79


이와 같이 내용 중에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맞춤법이 자신이 없을 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요령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어 도움이 된다.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한글맞춤법’이 따로 정하는 바를 원칙으로 한다. 왜냐 하면 ‘한글맞춤법’의 핵심적 내용을 결국 ‘뜻이 드러나도록’ 적는 경우를 일일이 열거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해 ‘한글맞춤법’에 따로 정한 바가 없다면 소리 나는 대로 적으면 된다.” p.91


또한 ‘갇히다’를 ‘갖히다’로 잘못 쓰는 경우를 예로 들면서 맞춤법에 익숙해지는 방법은 맞춤법 공부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언어적 경험을 충분히 쌓을 수 있도록 책을 좀 더 많이 읽으라고 권하고 있는데, 이 조언이 이 책을 읽는데 쏟은 수고를 충분히 상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춤법이 서투른 건 이론적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흉내 낼 수 있을 만큼 언어적 경험이 충분히 쌓이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겠나. 책을 부지런히 읽어야 하지 않겠나. 더 다양한 책을 더 많이 읽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까?” p.29


이러한 저자의 생각은 필사하는 것이 띄어쓰기에 도움이 되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또 한 번 드러난다.


“(글을 필사하는 것은) 비단 띄어쓰기만이 아니라 모든 언어기호의 습득에 꽤 큰 도움이 된다. 소리 내어 읽는 것이 청각기호의 질감을 내면화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면 손으로 쓰는 것은 시각기호의 질감을 체화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한국어와는 완전히 문법구조가 다른 한문을 익히기 위해 소리 내어 읽고 손으로 베껴 쓰도록 강제하는 ‘서당식’ 공부가 기초 교육의 주류를 이루었던 게 우연도 아니고 그저 낡은 방식이라 무시해 치울 만한 일도 아니다.” p.137


알량한 내 맞춤법 실력을 아는지라 저자가 권한 대로 후반부는 욕심을 내지 않고 그저 대충 훑어보았고, 전반부는 앞뒤를 오가며 몇 번을 읽기는 했다. 이번에는 맞춤법의 턱을 제대로 넘어갈 수 있으려나 하는 기대했지만, 역시나 저자가 기대하는 독자의 수준에 이르지 못해 저자가 심혈을 기울여 펼쳐낸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서가를 채우고 있는 다른 맞춤법 책에 하나를 추가하는 것으로 끝내게 되어 아쉽다. 앞으로 저자가 권하는 대로 책을 좀 더 가까이 대하면서 맞춤법을 제대로 흉내 낼 수 있게끔 언어적 경험을 쌓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책의 일부를 인용하는 과정에서 저자의 띄어쓰기대로 썼을 경우 ‘한글’에서 붉은 밑줄이 여러 번 나타나는데, 저자가 띄어쓰기를 잘못 했을 리는 없고. 글 쓸 때 ‘한글’의 맞춤법 교정 기능 신세를 많이 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럴 때 어떤 것을 따라야 할지 참 난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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