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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l 28. 2021

그리드

에너지믹스의 선결조건

그레천 바크

김선교ㆍ전현우ㆍ최준영

동아시아

2021년 6월


탈원전의 여파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일이 원전 부지평가 사업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평생의 업이 되었다. 1980년 월성 원전 후속기부터 시작해서 영광ㆍ울진ㆍ고리, 검토만 하고 부지로 선택되지 않은 부안ㆍ산포ㆍ송공, 사우디의 스마트원전 준비까지 40년 넘게 부지평가에 간여해왔다. 그러다 보니 부서의 매출 상당부분이 원전 사업이었고, 2017년 선포된 탈원전 정책은 그대로 태풍으로 밀어닥쳤다.


그렇다고 재생에너지 사업을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본사에 있을 때 검토해보니 태양광발전은 장치산업에 지나지 않았고 풍력발전은 우리가 간여할 부분이 없었다. 당시 깊이 있게 검토한 것이 아니어서 재생에너지의 장단점을 세세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다. 다만 예측이 어려운 기후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 생산과 소비의 시점이 일치하지 않을 때 전기를 저장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점, 엄청난 면적의 땅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적용하기 힘든 방안이 아닐까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원전 건설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사업이어서 탈원전 정책이 선언되고 나서도 충격이 미칠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우리의 주력분야인 부지평가는 사업의 가장 초기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탈원전 선언 즉시 그 충격이 밀어닥쳤다. 발주가 임박해 있던 사업이 줄줄이 취소되고 수행하고 있던 원전 감리사업은 언제 중지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당연히 이를 타개할 방안을 찾는 일이 먼저가 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것보다는 감정이 앞서 탈원전 정책의 부당함과 재생에너지의 부적절함을 밝히는 일에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뜻밖에도 그렇게 문제가 많은 재생에너지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원전을 폐쇄해야할 이유가 아닌 것은 분명했지만,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지점은 탄소제로를 달성하기 위한 에너지 믹스라는 점 또한 분명했다. 그때까지는 재생에너지 생산만 문제로 여겼지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정부의 탈원전 선언이 있고 난 후 페이스북에서 전력분야의 전문가 몇 분을 만났다. 그러면서 재생에너지의 불안정성이 전기 공급 시스템을 무너뜨려 대정전(블랙아웃)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워낙 전기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그저 현재 전기 공급 시스템은 통제 가능한 전력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통제 불가능한 재생에너지가 그 시스템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정도로만 알아들었다.


그리드


현지법인에 부임하기 전 본사 전력사업부에서 스마트 그리드를 추진하면서 처음 ‘그리드’라는 용어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재생에너지의 불안정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면서 그리드의 개념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는 데에는 전문가들이 페이스북에 올려놓은 글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 전문가들이 힘을 합쳐 번역한 <그리드(Grid)>를 만났다.


전기가 소비자에게 공급되기까지 발전ㆍ송전ㆍ배전 과정을 거치는데, 이 책에서 전기가 만들어진 역사에서부터 지금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나는 책을 두 번이나 읽었는데도 이 중 송전ㆍ배전 과정을 그리드라고 칭하는 것 이상으로는 설명하지 못한다. 이해한 것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전력은 저장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소비자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생산되는 즉시 공급되며, 이 모든 과정은 1,000분의 1초도 걸리지 않는다. 따라서 소비자가 얼마나 전력을 요구하든 각각의 순간에 그리드에 연계된 전기장치가 무엇이든 이에 필요한 전력은 바로 그 시점에 그리드에 연계된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력량과 거의 완벽하게 균형을 이뤄야 한다. 그리드는 통제나 예측이 가능한 전력을 분배하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재생에너지가 망에 더 많이 진입할수록 운영과정이 복잡해지고 예기치 못한 문제가 일어난다.”


“우리나라는 계절에 따른 기후 차이가 크고 변화무쌍하다. 겨울에는 일조량이 적어 그만큼 많은 난방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줄어든 일조량 때문에 태양광발전량이 줄어들고 풍력발전은 블레이드가 얼어붙어 발전량이 더 줄어들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폭염과 혹한은 에너지 수요를 급증시키지만 그것이 또한 재생에너지의 공급량을 갉아먹는다. 이와 같이 전력이 부족할 때 이에 대처할 수 있는 예비 전력을 확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과잉 생산되어 남은 잉여전력을 처분하기도 어렵다. 태양광발전이나 풍력발전은 그리드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발전량 변동 폭이 크다. 이의 비중이 올라갈수록 위험도 그만큼 높아진다.”


“과도한 전력이 그리드에 유입되면 그리드는 전력을 차단해 스스로를 보호한다. 강풍이 불어 닥칠 때 그리드에 유입되는 전력과 유출되는 전력을 맞추기 위해 풍력발전소에 돈을 주고 가동을 멈추어야 한다. 태양광발전도 다르지 않다.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그리드를 증설해야 하지만 모두들 재생에너지가 가져올 장밋빛 미래만 그릴 뿐 증설은 아예 시야에 없다. 재생에너지 전원은 대체로 전력을 소비할 사람도 없고 송전선도 없는 곳에 위치한다. 그리드가 이런 곳에 유지되었던 적은 없었다.”


“연평균 정전시간은 일본 11분, 독일 15분, 한국 16분, 이탈리아 51분이며 모두들 10분미만으로 낮추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반해 미국은 120분 이상인데다가 그마저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기계장치는 전기 공급이 15초 중단되든 15분 중단되든 15시간 중단되든 정확히 같은 종류의 손상을 일으키고 원래대로 복구하는데 거의 같은 시간이 걸린다. 2014년 간행된 백악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서 일어난 정전사태의 90% 정도는 배전시스템에서 시작된다. 전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리드가 붕괴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전력산업의 기틀을 만든 선구자들은 태양과 바람의 변덕스러움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런 변덕을 그리드에 수용하는 일은 발전의 기반을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 바꾼다고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을 단순한 개선을 넘어선 재창조라고 말하며 그 난이도는 우리가 보유한 모든 항공기가 승객을 가득 채운 채 비행하는 상태에서 활주로와 관제시스템을 재구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전력저장


재생에너지는 넓은 부지가 필요할 뿐 아니라 운전시간이 기존 발전소에 비해 월등하게 적어 이 시설이 대대적으로 확장될 경우 그렇지 않아도 좁은 우리나라에 미칠 파장이 적지 않다. 그러나 앞서 정리한 바와 같이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은 그리드에 상당한 부담이 된다는 점이 오히려 더 큰 문제로 보인다. 결국 간헐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생산한 전력을 저장할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저자는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전기를 저장하는 방법을 찾는 것은 모든 전력 산업 이론가가 꿈꾸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제 이 문제는 꿈이 아니라 당장 타개해야할 현안이 되었다. 결국 미래에 에너지를 더욱 청정한 방식으로 활용하려면 재생에너지에 의해 과잉 생산되는 전력을 저장해 놓는 방법을 찾아야한다는 말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세계 곳곳에서 에너지 저장시스템(ESS, Energy Storage System)을 개발하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배터리와 수소전지 뿐 아니라 대륙 간 연결을 통해 그리드를 확장하는 슈퍼그리드도 대안으로 검토되고 있으며, 환경문제 때문에 건설이 가능해 보이지는 않지만 양수발전소 또한 고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내가 평생 해온 일 중 원자력발전소 다음으로 많이 한 일이 지하저장시설이다. 연구소에서 지금 회사로 옮긴 1982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지하에 대규모 터널을 뚫어 원유ㆍ등유ㆍLPG를 저장하는 시설의 부지를 선정하고 설계하고 감리하는 일을 해왔다. 저장시설은 장치시설이니 수요가 무한정 늘 수 없는 일이어서 그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다른 사업을 검토한 일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압축공기저장시설(CAES, Compressed Air Energy Storage)이다. 전기로 공기를 압축해 동굴에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압축공기를 꺼내어 발전하는 시스템인데, 당시로서는 이를 도입할 유인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검토만 하다가 접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탄소제로를 위해 재생에너지가 발전원의 주축을 이루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 방안은 매우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겠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이런 시설을 설치할 만한 양질의 암반이 지표 얕은 곳에 분포하고 있으며, 지하수위가 지표 근처에 분포하고 있어 수압을 이용할 경우 동굴 안에 콘크리트나 철판으로 복공(lining)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규모의 경제를 거둘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터널이야 누구든 덤벼들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 시설에서는 경제성을 높이기 위한 ‘지하수를 이용한 기밀유지’ 기술이 결정적인 요소가 될 텐데, 그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은 얼마 되지 않아 이 시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해본다.


사우디 왕세자가 심혈을 기울여 개발하고 있는 네옴 신도시는 탄소제로를 겨냥하고 있는 만큼 모든 전력은 재생에너지로 공급할 계획이다. 당연히 간헐성을 극복하기 위한 ESS를 검토하고 있을 것이다. 과문한 탓인지 아직 CAES를 검토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물론 세계유수의 기업이 이미 이 시장에 뛰어들었을 것이고 그들과 경쟁하는 일이 가능한 일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지레짐작으로 포기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반은 그리드에 대한 호기심으로, 반은 평소에 익히 그 역량을 알고 있던 전문가들이 합동해 번역한 책이 어떤 것일까 궁금해서 읽게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내용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서 두 번이나 읽었지만 덕분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신규 사업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은퇴를 넘긴 나이이니 내가 간여할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후배들이 이 기회를 잘 살려서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 내기를 기대한다.


한국의 상황


역자들이 이 책을 번역하는데 무려 3년이 걸렸다고 한다. 읽기 전에는 요즘처럼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상황에 수 년 전 발표한 이 책의 주장이 시대에 뒤떨어지지나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읽고 보니 그리드, 더 나아가 전력산업 전반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후배들이 겨냥해야 할 시장에 대한 통찰을 얻는 덤을 누렸다. 좋은 책을 골라 오랜 시간동안 애써 번역한 역자들의 노고에 감사를 보낸다. 더구나 그저 번역하는데 그치지 않고 전문가의 시선으로 이와 관련한 한국의 상황을 책의 해제에 정리해놓아서 사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혼자 읽고 넘기기 아까워 역자들이 부연 설명한 내용 중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옮긴다.


“원자력은 반핵운동으로 인해 시민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원자력 수용성이 갑자기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신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람의 믿음이란 외력으로 바꿀 수 없는 명백한 실체이고 사람의 믿음을 바꾸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하고 성패를 알 수 없는 설득작업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한국의 그리드를 지배하는 것은 한전 단 하나이다. 심지어 송전시장과 배전시장도 분할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망을 통합적으로 운용하는 덕택에 한국의 그리드는 정전도 적고 송배전 손실도 합리적인 수준에서 통제되고 있다. 그리드의 뼈대를 이루는 송전망도 인상적이다. 한국의 송전망을 이루는 골간은 호남과 영남의 원전, 영동과 충남의 석탄화력에서 수도 쪽으로 향하는 원거리 송전망이다. 또한 전기가 더 많이 움직여 송전망의 용량을 더 많이 잡아먹지 않도록 발전소를 배치했다. 수도권 외부 방사망의 끝에는 원전과 석탄화력과 같은 기저전원이 연결되어 있으며 반면 비싸게 거래되어 가동순서가 후순위인 LNG 복합화력은 인천과 같은 수도권 내부에 다수 자리하고 있다. 이는 장거리 송전망은 상대적으로 긴 시간동안 꾸준하게 운전한다는 뜻이고 중거리 및 단거리 송전망은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동안만 운전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송전의 부담은 더욱 줄어든다.”


“이렇게 장거리 송전에 우리한 그리드의 구조는 한전의 독점을 더욱 효율적으로 만들어 40년 가까이 사실상 전력요금을 떨어뜨리는 성과를 거두고 송배전 손실을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되는 그리드를 건설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런 구조에도 균열이 가고 있다. 밀양 송전탑 갈등은 장거리 송전망을 확대하는 작업 자체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한전은 현재 전원과 수요처에 따라 그리드를 정교하게 배열해놓았지만 변동성이 큰 전원인 재생에너지는 이와 상관없는 위치에서 전력을 생산하고 있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전남과 제주도의 풍력발전과 태양광발전으로 인해 현재 구축된 그리드의 수용력을 초과하는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 이렇게 분포가 흐트러지면 전력망을 따라 전기가 이동해야 하는 거리가 길어지고 당장은 큰 용량이 걸리지 않는 송전선로에도 대량의 부하가 걸리는 상황이 잦아진다.”


앞으로 역자들이 에너지 저장시설에 관한 좋은 책을 골라 우리에게 소개해주면 좋겠다. 배터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책들이 나와 있을 테니 배터리를 제외한 에너지 저장시설, 즉 슈퍼그리드나 양수발전소, 그리고 관심을 크게 두고 있는 CAES와 같은 기타 저장시설에 대한 좋은 안내서를 편찬해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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