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차별이 정당한가?
잭 로저스 / 조경희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15년 12월
2007년 이래 지금까지 차별금지법이 여러 차례 발의가 되었지만 중도에 철회되거나 임기만료로 최종 표결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지난 20대 국회에서는 의원 10명의 동의를 얻지 못해 발의조차 되지 못했다. 21대 국회에 들어와 우여곡절 끝에 발의가 되기는 했지만 통과는커녕 심의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차별금지법에 포함되어 있는 동성애 관련 조항에 대한 개신교계의 반발이 워낙 드세기 때문이다.
개신교계에서는 “동성애는 성경에서 죄로 규정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를 죄로 가르쳐야 할 뿐 아니라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차별금지법에서는 이 모든 것을 범죄로 규정하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말한다. 과연 차별금지법이 그런 모든 행위를 금하고 있는 것인지, 동성애 전환치료가 가능한 것인지는 별개로 하고, 우선 성경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했다.
동성애가 성경이 금하는 것이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는 주장은 난무하는데 그에 비해 ‘성경의 해석’에 대한 글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것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여기기 때문이기는 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기는 했지만, 수천 년 전에 우리와 환경이 다르고 사상 체계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기록된 것이다. 그러니 성경을 근거로 무엇인가를 주장하자면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그것이 성경 기록 당시의 상황과 사상 체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석된 것인지 확인해야 할 텐데, 그런 글을 찾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다행히 구약학자로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글을 남기고 있는 기독연구원 김근주 교수의 조언을 얻을 수 있었고, 그가 추천한 책 중에 먼저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우리는 각 분야에 걸친 방대한 법령을 기준으로 준법과 위법을 가른다. 그 방대한 법령으로도 매사를 다 규정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수시로 제정과 개정을 하고, 판례를 따르기도 한다. 결국 법령 적용은 해석의 문제라는 것이다. 성경이라고 이와 다를까.
저자는 동성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앞서 먼저 성경이 오용된 사례를 살핀다. 그 결과 놀랍게도 노예제도, 인종차별, 여성차별의 사례가 모두 같은 패턴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먼저 사회적으로 널리 퍼진 편견을 받아들이고 난 다음, 그 편견을 성경 속에 대입해서 읽었다는 것이다. 편견을 합리화할 수 있는 본문을 찾았다는 것이니, 이는 오용이 아니라 악용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비록 의도한 일은 아니었을지라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200년 이상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에 대해 이렇게 믿어왔다. “1) 성경은 아프리카 사람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록하고 있다. 2) 아프리카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열등해서 온전한 크리스천 백인들의 수준까지 올라올 수 없다. 3) 아프리카 사람들은 죄로 가득하며, 성적으로 난잡하고 위협적이어서 벌을 받는 게 당연하다.” 그들은 지금 누구도 동의하지 않으며 심지어 범죄로 여기는 이 생각을 창세기 9장에 기록된 ‘노아의 작은 아들에 대한 저주’ 본문으로 정당화한 것이다. 물론 이를 주장한 신학자들이 본질적으로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당시 최고의 사상가들이고 또한 교회 지도자들이었다.
이와 똑같은 전제가 여성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들은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 본문을 근거로 여성차별을 이렇게 정당화했다. “1) 성경은 여성(하와)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록하고 있다. 2) 여성은 도덕적으로 열등해서 온전한 백인 남성의 수준까지 올라올 수 없다. 3) 여성들은 의지적으로 죄를 많이 짓고, 성적으로 난잡하고 위협적이어서 벌을 받는 게 당연하다.”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을 정당화한 구조와 동일하다. 안타깝게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들의 주장에 대해 누구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다. 성경을 근거로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교단이 아직도 한국 교계에 남아 있으니 말이다.
저자는 이렇게 성경을 근거로 차별을 정당화한 구조가 동성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즉, “1) 성경은 동성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록하고 있다. 2) 동성애자들은 도덕적으로 열등해서 온전한 이성애자 기독교인의 수준까지 올라올 수 없다. 3) 동성애자들은 의지적으로 죄를 많이 짓고, 성적으로 난잡하고 위협적이어서 벌을 받는 게 당연하다.”는 것인데, 구조가 놀랍도록 닮아있지 않은가?
성경에서 동성애에 관한 본문은 대체로 여덟 곳으로 알려져 있다. 창세기 19장 ‘소돔의 멸망’, 사사기 19장 ‘레위인의 첩 강간’, 레위기 18장과 20장 ‘구약 율법’, 고린도전서 6장과 디모데전서 1장 ‘탐색과 남색’, 로마서 1장 ‘부끄러운 일’, 그리고 유다서이다. (유다서는 학자에 따라 빠지기도 한다.) 이 본문은 모두 합쳐 최대 열 쪽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중 어느 것도 예수에 대한 것이 아니고, 어느 것도 그분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신학자들은 어느 누구도 동성애자로 태어나지 않으며, 동성애자들은 의지적으로 그 행위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성경 어디에도 그런 본문은 없다고 서술한다. 저자 본인도 일부일처가 최선의 상황이라고 믿지만 이성애자의 단혼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규범이라는 특정한 본문도 없다고 서술한다. 본문에 들어 있지 않으니 어떻게 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성경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 또한 그렇다. 저자는 이 명령이 “모든 사람이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야 한다”는 뜻일 수 없다고 서술한다. 성경의 창조기사에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장애를 가진 이들, 독신자들, 성불구자들을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성애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사실 ‘동성애’라는 용어는 1867년에 크라프트에빙(Kraft-Ebing)이라는 독일인 의사가 처음으로 제안한 것이며, 스스로를 독자적인 정체성으로 인식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고대 로마에는 ‘동성애, 이성애, 양성애’ 같은 범주도 없었고 시각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근주 교수는 1) ‘동성애’는 구약과 신약 본문에 나타난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는 전혀 부적합한 단어이며, 2) “구약과 신약 본문이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식의 결론은 근본적으로 현대적 개념을 고대 본문에 대응시킨 ‘시대착오적 표현’이고, 3) 따라서 ‘동성애’에 대해 성경이 다룬다고 여겨지는 내용은 모두 동성 간에 이루어지는 성행위라는 점에서 ‘동성 성행위’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성경이 동성애를 금한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동성애’와 ‘동성 성행위’를 나누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성애자의 성관계가 도덕적일 수도 있고 부도덕할 수도 있는 것처럼, 동성애자의 성관계 역시 마찬가지”라고 서술한다. ‘쾌락을 목적으로 한 무분별한 성행위’와 ‘성 정체성의 차이로 인한 성행위’를 동일하게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기록된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땅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해도 수천 년 전의 사건을 이해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상황과 가치관이 다른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일이 쉬울 수 없다. 미국 장로교 총회장이었으며 지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인 이 책의 저자 잭 로저스는 관련 본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가. 창세기 19장 ‘소돔의 멸망’과 사사기 19장 ‘레위인의 첩 강간’
두 이야기 모두 집주인이 여행객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을 때 성난 마을 사람들이 손님을 넘기라고 요구한 사건이다. 고대 세계에서 동성애 강간은 승자가 포로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전통적 방법이다. 당시 남성에게 가장 부끄러운 일은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던) 여성처럼 취급받는 것이었고, 남성에 대한 강간은 그런 행동의 하나라는 것이다. ‘여성’보다 ‘남성의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했던 그들에게는 자기 집에 온 남자 손님을 보호하기 위해 딸이나 아내를 내어주겠다는 제안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동성애로 해석되는 본문 중에 ‘여성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소돔이 멸망한 것은 ‘남성을 여성처럼 취급한 것’이기 때문이었지 ‘남성 동성애’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남성의 ‘동성애’가 문제였다면 ‘여성’의 동성애도 언급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프린스턴신학교의 구약학자 쇼우는 “구약은 소돔의 탐욕, 불공정, 불친절, 과도한 부, 가난한 이들에 대한 무관심을 고발하고 있으며, 예수께서 이 이야기를 인용하신 것은 자기 제자들을 환대하지 않는 도시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마10:15, 눅10:12)”이라고 말한다. 결국 소돔 이야기는 동성애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 레위기 18장과 19장 ‘구약 율법’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풀려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체성을 명확히 하기 위해 성결법을 발전시킨다. 그들이 도망쳐 나온 이집트와도 다르고 앞으로 맞닥뜨려야 할 가나안과도 섞이지 말고 구별되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그들의 예배 관행을 따르지 않아야 했고, 결혼으로 섞이지 말아야 했으며, 가부장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남성이라는 우월성을 훼손시키는 행위를 모두 처벌해야 했다. 간음도 사형을 시킬 수 있었던 것은 간음이라서가 아니라 남자의 재산인 여자를 불법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며, 남성 동성애자를 사형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 중 하나는 여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데 그것이 남성의 우월성을 훼손하는 일이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는 동성애를 금지한 것이 아니라 여성차별이라는 당대의 가치관을 강화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 고린도전서 6장과 디모데전서 1장 ‘탐색과 남색’
이에 대한 헬라어 원문은 각각 ‘말라코스’와 ‘알세노코이테스’로 기록되어 있는데, 저자는 이 단어들이 맥락 없이 사용되고 있어 그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서술한다.
‘알세노코이테스’는 성경에 처음 나오는 단어인데, 성경학자 중에 ‘알세노코이테스’를 남성을 뜻하는 ‘알센’과 침대를 뜻하는 ‘코이테스’가 결합한 것으로 해석해 이를 ‘남성과 성관계를 갖는 남성’으로 그 뜻을 유추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understand를 under와 stand로 나누어서 뜻을 유추할 수 없는 것을 예로 들면서 이에 동의하지 않는 견해도 많다는 점을 함께 서술한다. 분명한 것은 헬라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악행 목록 중 하나라는 것이다.
‘말라코스’는 ‘우유부단’이라는 뜻인데, 지금 사고방식으로는 ‘우유부단’이 악행에 포함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시에는 그것을 도덕적 실패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서술한다.
말하자면 “성경은 동성애를 금한다”는 전제가 되는 성경 본문이 이와 같이 해석의 논란이 있는데, 동성애 반대를 명분으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개신교계에서 이에 대해 언급한 것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매우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라. 로마서 1장 ‘부끄러운 일’
로마서가 기록되던 당시의 히브리 문화나 그리스 문화 모두 가부장적이었다. 남자들은 여자들에 대해 지배적이었고, 바울은 당시의 문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당시 문화에서는 남자와 여자에게 각각 주어진 장소와 역할이 있으며, 이는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바울은 “남자 머리가 길면 부끄러움이요 여자 머리가 길면 영광”이라고 말한다. (고전11:14-15)
이런 문화에서 역할을 바꾸면 ‘불결’한 일이고 ‘유대 정결법을 위반’한 일이다. 따라서 성관계에서 수동적인 여자의 역할을 남자가 맡는 것은 불결한 일이 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남성의 지배적인 위치, 그리고 성적인 문제에서 여성이 수동적인 위치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규정한다는 것인데, 지금의 가치관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성차별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이 본문을 “여자가 맡을 수동적인 역할을 남자가 맡은 부끄러움”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결국 이는 동성애와 무관한 구절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들이 로마서 1장을 해석하는데 다음과 같이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서술한다.
“1) 이 본문이 우상숭배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못보고 있고, 2)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는 바울의 핵심을 간과하고 있으며, 3) 문화적인 배경을 놓치고 있을 뿐 아니라, 4) 이 본문을 우상숭배자들에게 적용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살려는 신실한 신앙인 동성애자에게 적용하고 있다.”
평생 개신교인으로 살아왔지만 그것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근거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성경이 동성애를 금하는지에 대한 신학적 견해를 평가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기는 하다.
그런데 성경이 동성애를 금하는지 여부를 가리는 일이 신학적 판단에만 한한 것일까? 나는 이 일이 신학적인 일인 동시에 신앙적인 일이며, 삶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다스림에 관한 문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내 삶과 떼어서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의학은 성적 지향이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으며, 동성에 대한 성적 지향이 병리 현상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여 동성애를 국제질병분류에서 제외했고, 현재까지 효과가 입증된 동성애 전환 치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시도에 대해 반대한다는 공식 보고서를 발간했다. 또한 성적 지향을 억지로 바꾸려는 치료는 우울감, 불안감을 증가시키고 자살을 유발시키는 등 정신 건강을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동성애가 본인이 선택한 것도 아니고 전환치료도 불가능하다면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는 것이 본심이 아니라”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동성애를 단죄하는 것이, 그를 이유로 배제하는 것이 과연 신앙적으로 옳은 일일까? 내세울 것이 못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지켜온 신앙으로는 그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신학적으로도 그럴 여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