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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

정치체제와 문화로서의 이슬람

by 박인식

김동문

선율

2017년 8월


십 년 넘게 살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의 맹주이자 이슬람의 종주국이다. 2009년 초에 부임한 이후 지금까지 지내면서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은 아랍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종주국의 심장에서 사니 이슬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여겼던 모양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것 역시 착각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슬람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설명하기엔 나라에 따라 종파에 따라 그 모습이 너무도 다양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랍어를 전공하고 오랫동안 이집트와 요르단에서 살았고, 그 후로도 중동 선교사로 이들과 이웃하며 3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 중동 전문가이다. 특히 기독교의 발원지에 오랫동안 살면서 그들과 같은 눈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또 소개하고 있다. 그의 저서들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길잡이가 될 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겐 무지에 가까운 중동과 이슬람을 이해하는 기초가 되고 있다


이곳 리야드에는 수십 년 살아온 교민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아랍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을 찾기 어렵고, 격식을 갖춰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을 꼽기 어려울 정도이다. 워낙 외국인이 많아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느 현지인이 지적한 것처럼 이곳 문화를 낮추어보는 시선도 어느 정도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무슬림(이슬람교도)이 된 사람은 이보다 더욱 드물다. 지금까지 살면서 무슬림 교민을 두세 명 만났나 싶다.


이런 현상은 다른 중동 국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런 면에서도 중동과 이슬람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쉽게도 사우디에 대한 직접 경험은 많지 않아 보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저자가 경험한 중동 이슬람과 내가 경험한 사우디 이슬람을 비교하는 모양이 되었다.


오해에서 비롯된 이슬람 혐오(Islamophobia)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미국과 유럽에서도 무슬림들은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막연한 추측을 바탕으로 하는 혐오행동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높은 출산율 때문에 무슬림 인구가 자국민을 위협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큰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들이 현지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 종교와 문화를 고집하는 성향도 그런 두려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새뮤얼 헌팅턴은 그의 저서 <문명의 충돌>에서 현재 일어나는 수많은 국가분쟁을 문명권의 충돌로 풀이하고 있다. 이념보다는 전통, 문화, 종교의 차이 때문에 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주요 문명권의 하나인) 이슬람이 서방 기독교문화와 대척점에 서있다는 생각이 이슬람 혐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무슬림 인구를 이야기할 때면 으레 이슬람협력기구(OIC)를 떠올린다. 저자에 따르면 중동과 아프리카에 걸친 무려 57개국이 회원국으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회원국이 모두 이슬람 국가는 아니다. 가봉은 기독교가 절대 다수이고 무슬림은 1%에 불과하며, 모잠비크ㆍ카메룬ㆍ토고ㆍ가이아나ㆍ수리남 등도 기독교도가 무슬림보다 월등히 많다. 이슬람이 국교이거나 주류 종교인 국가의 출신이라고 해서 모두 무슬림으로 볼 수도 없다.


물론 다른 종교와 달리 무슬림은 혈통으로 이어지며, 여기에 새로 무슬림으로 개종한 이들이 더해질 뿐 아니라, 무슬림 출산율이 높기 때문에 무슬림 인구는 줄어들 수가 없다. 다른 국가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곳 사우디에서 개종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무슬림 모두가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코란도 모르고 모스크에 가지도 않고 확신이나 신앙고백이 없어도 무슬림이 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저자가 서술하는 대로 무슬림 인구에는 허수가 가득하다고 볼 수 있다.


이슬람 혐오의 또 다른 근거로 테러를 꼽는다. 9.11 사태가 이슬람 혐오를 폭발적으로 악화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미국에서 벌어진 테러 중에 무슬림 테러리스트의 비중이 특별히 높은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벌인 테러는 전체 2,400건 중 60건에 불과하며, 반면에 유대인 극단주자는 118건, 반낙태진영 168건인 것과 비교할 때 이슬람을 테러의 주범으로 보는 시각이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 메릴랜드대학 통계) 저자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이슬람 혐오를 단순하고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다.


“일반 테러 사건의 용의자는 학생이나 주민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무슬림일 경우 그가 학생이나 주민이라기보다 무슬림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으로 서술된다. 이슬람의 종교성과 연관 지어 무슬림은 잠재적 테러리스트라는 고착화된 편견을 드러내거나 직간접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도록 영향을 준다.”


괴담으로 번지는 한국의 이슬람 혐오


한국으로 눈을 돌리면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혐오논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식품인증에 불과한 할랄과 관련된 시설을 테러자금 확보를 위한 시설로, 이슬람 국가와 협력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이슬람 포교전략으로 몰아붙여 범 기독교 차원의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다. 정부에서 수크크라는 중동 특유의 금융제도를 관련 세법에 포함시키려다가 기독교계의 반대에 막혀 산업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선택지 하나를 날려버리기도 했다.


이러한 한국 기독교계의 이슬람 반대운동은 이곳 한인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슬람 국가의 선의에 기대어 생업을 이어가면서 근거 없는 괴담을 바탕으로 한국의 이슬람 반대운동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신앙이 뭔가 싶다. 할랄이며 수크크가 이슬람 포교와 관계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게 이해가 가지도 않고, 이슬람 국가와 협력하는 것이 이슬람 포교전략이라 반대해야 한다면 왜 그런 나라에 수십 년을 기대 사는지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슬림의 기독교 혐오


이슬람을 향한 혐오 못지않게 무슬림이 기독교나 서방문명에 보이는 혐오 또한 무슬림이 아닌 외국인 거주자들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사우디는 이슬람 이외 모든 종교를 금지하고 있다. 지금이야 대놓고 교회를 박해하지는 않지만, 오래된 교인들에게는 보안 유지가 교회 운영의 최우선 지침이 되어있을 만큼 교회 급습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크다.

칠팔 년 전에 트럼프의 이슬람 혐오발언으로 무슬림들이 뉴욕에 있는 그의 사무실 앞에서 시위하는 사진이 아랍뉴스 1면에 크게 났던 일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사 바로 옆에 같은 크기로 성탄절 장식을 설치한 상점을 합동 단속한다는 정부 발표가 실려 있었다. 성탄절 예배는 꿈도 못 꿀 일이고, 성탄절 장식조차 이슬람 미풍양속에 반한다고 단속한다는 것이니, 그러면서 무슨 낯으로 이슬람 혐오 시위를 하나 싶었다.


인근 아랍에미리트는 부임 첫해인 2009년에 이미 종교단지를 정해놓고 그곳에서 종파별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만들어 놨는데, 이곳은 아직도 성경을 들고 다니는 건 꿈도 꾸지 못한다. 얼마 전 이집트 콥트교 최고성직자가 방문하기도 했고 영국 성공회 대주교도 다녀갔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다른 종교에 대해 걸어놓았던 빗장이 곧 풀리지 않을까 기대한다.


문화로서의 이슬람


지난 가을에 사우디에서 관광비자를 허용하면서 거리 분위기가 많아 달라졌다. 그동안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여성이면 검은 천으로 온몸을 가리는 아바야를 입고 머리엔 스카프를 둘러야했는데, 관광객에 한해 아바야를 입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물론 복장 규정이 까다롭기는 해도 관광객 몇 명이 아바야를 입지 않은 것만으로도 세상이 바뀐 것처럼 보였다.


처음 사우디에 왔을 때 많은 여성들이 아바야를 입기 싫어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와 달리 사우디 여성들은 오히려 아바야를 여인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했었다. 그러나 저자가 인용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우디 여성 47%가 자유로운 복장을 지지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실제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우디를 벗어나고서도 아바야를 입는 건 대체로 나이든 여성이고, 그것도 점차 줄어드는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의 독특한 문화인 일부다처제는 많지는 않지만 아직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 남편이 여러 아내를 거느리고 지나가는 걸 심심치 않게 보는데, 아무리 법이 허용한다고 해도 굳이 함께 다니는 게 영 이해되지 않는다. 길에서 그런 경우를 본 일은 있어도 업무로 만나는 사람 중에 아내를 여럿 둔 사람을 본 일은 없다. 젊은이들 중에 그런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저자가 짐작한대로 대략 10% 정도가 일부다처제를 수용한다는 것이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아내를 여럿 거느리려면 돈도 많아야 할 것이고, 어차피 남녀 인구는 같을 것이니 누군가 아내를 더 맞는 만큼 누군가 아내를 얻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10%도 많은 것이 아닐까 싶다.


이슬람, 도전에 직면하다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이슬람은 종교이기보다는 정치체제요 문화라는 측면이 더 강한 것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무슬림들이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한 것을 이슬람 포교를 위한 종교전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그 결과 이슬람의 다양한 종교적 표현과 양식이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이슬람 종교전쟁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주변에 있는 사우디인들 중에 신앙심이 깊은 사람을 찾기 어려운 것을 보면 이들에게 이슬람은 종교라기보다는 문화이자 관습이 아닐까 싶다. 내가 일하는 합작법인의 사우디 파트너가 기도하는 건 십년 넘도록 한 번도 못 봤고, 주로 형편이 어려운 내외국인들은 기도시간에 열심히 참여한다. 사는 게 고단할수록 신앙이 깊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면, 어쩌면 이슬람은 잘사는 사람들에게는 문화이고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신앙인지도 모르겠다.


현재 권력 실세인 왕세자가 즉위하면서 많은 계획을 발표했고, 최근 들어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개방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동안 국제경제가 받쳐주지 않아 경제계획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데다가 언론인 살해사건 같은 이런저런 악재가 겹치는 통에 국민들을 다독이는 방편으로 개방정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슬람이 신앙으로서 이들의 중심에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었더라면 섣불리 개방할 생각은 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최근의 개방속도를 보면 이슬람은 신앙적인 구심점으로서의 지위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극장이 생기고, 남녀좌석 구분이 없어지고, 부분적이지만 자유로운 복장도 허용하는 등 매우 빠르게 개방이 이루어지고 있다. 어제는 운동복 차림으로 연습하는 여자 축구팀 사진이 신문에 크게 났다. 운동복 차림은 고사하고 여성 스포츠 자체를 금기시하던 곳이었는데. 믿기 어려운 일이 하루가 다르게 벌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종교계나 보수층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조직적인 저항은 눈에 띄지 않는다. 몇 년 전에 없어지다시피 한 종교경찰은 신앙심이 투철하거나 정예화된 인력과는 거리가 먼 조직이었던 걸 생각해봐도, 적어도 사우디에서 이슬람은 정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요 문화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 정부주도의 급격한 개방이 이슬람에 의해 제지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종교계와 이의 중심인 노쇠한 보수층의 저항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개방의 맛을 이미 알았는데 이를 되돌리는 게 가능하겠나. 물론 이웃 이란의 사례를 보면 이슬람 신정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기는 하다. 그렇기는 해도 십년 넘게 지켜본 바로는 이슬람 신앙이 그런 변혁의 동력이 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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