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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pr 29. 2022

그림; 교회, 우리가 사랑한

백년 교회

이근복

태학사

2022년 2월 14일


1884년 개신교가 이 땅에 전래된 이래 지금까지 세워진 5만 개 넘는 교회 중에 설립 백년이 넘은 교회는 1천 개에 미치지 못한다. 저자는 긴 시간에 걸쳐 그 중 70여개 교회를 찾아가 역사를 더듬고 그 모습을 붓펜으로 정성들여 그렸다. 저자 스스로는 정식으로 그림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이 작업을 조심스러워 하지만, 그림은 저자의 지난한 작업의 한 귀퉁이를 거들 뿐 작업의 본령은 각 교회의 역사를 통해 한국 교회사를 조망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인터넷신문인 <뉴스앤조이>에 저자가 연재한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를 대했을 때 먼저 붓펜담채화라는 독특한 스타일이 눈길을 끌었다. 아울러 그림과 함께 엮어내는 각 교회의 역사를 통해 초기 한국교회와 선교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신앙 선배들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고, 서술의 행간을 통해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2017년 11월에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시작으로 출발한 이 연재물은 2021년 4월 한국교회의 본보기인 청파교회를 끝으로 3년 반의 긴 여정을 마쳤고, 그것을 이번에 책으로 엮어 출간했다.


새문안교회는 1887년 9월 언더우드 목사 사랑채에서 한국인 14명이 첫 예배를 드리며 장로 2명을 선출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로 출발했다. 고아들을 위해 세운 언더우드학당은 경신학교가 되었고, 도산 안창호가 3년간 교사로 일했다. 언더우드 목사는 정신여학교와 협성여자신학교(감리교신학대학)를 설립하고, YMCA를 창립하고, 한영사전을 편찬했다. 연동교회를 세운 게일 선교사는 유일하고 영원하신 ‘하나님’ 개념을 세워 기독교가 한국에 정착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한영사전을 간행하고, 천로역정을 번역했으며, 1903년 YMCA 초대 회장으로 교회의 사회참여 토대를 놓고, 정신여고 설립과 발전에 기여했다. 이와 같이 초기 한국교회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가 주축이 되어 선교를 확대해나갔을 뿐 아니라 학교를 세우고 사전을 편찬하고 YMCA를 설립해 사회 발전을 견인했다.


하지만 초기 교회에 이런 긍정적인 모습만 있는 건 아니었다.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었지만 실은 백정들을 중심으로 한 민중교회로 출발했던 승동교회에서는 앞자리를 따로 만들어달라는 양반교인들의 요구를 “예수 안에서 반상의 구별이 없다”며 설립자인 무어 선교사가 거절하자 양반교인들이 1909년 교회를 떠나 북촌에 안동교회를 세우는 일이 발생했다. 연동교회는 설립자인 게일 선교사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목회 철학으로 갖바치와 광대를 장로로 세우자 이에 반발한 양반교인들이 떨어져나가 1910년 묘동교회를 설립했다.


비록 그렇게 출발하기는 했지만 안동교회를 세운 양반들 역시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걱정하던 백성이었다. 그 중 박승봉은 기독교가 아니면 나라를 구할 수 없다며 기와집 한 채를 기증했고, 이준 열사를 헤이그평화회의에 갈 수 있도록 주선하다가 평북관찰사로 좌천되었으나 이승훈을 도와 오산학교를 세우고 3.1운동을 배후에서 도왔다. 진취적이었던 교인들은 예배당 내부에 남녀좌석을 구분하는 휘장을 철폐했고 사랑과 헌신으로 북촌 양반들을 복음으로 인도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반상의 구별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서도 뛰어넘을 수 없을 만큼 높고 견고한 장벽이었다.


저자는 대구제일교회에서 선교사들이 독선적으로 지배하는 경북노회를 탈퇴하고 민족교회를 지향하는 자치운동을 벌인 사실을 스치듯 언급하고 있다. 대구제일교회는 3.1운동 당시 대구경북지방의 민중시위를 주도해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는데, 경북노회 선교사들은 자치운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그런 교회를 이단시하고 마귀집단으로 규정하며 민중시위를 이끈 이만집 목사를 면직한 것이다. 우리 땅에 기독교가 뿌리 내리게 된 데에는 서구 선교사들의 헌신과 희생이 결정적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그리고 늘 선하고 바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초기 한국교회사를 살펴보면 선교사들 중에는 한국인을 미개하고 더러운 종족으로 멸시한 이들도 적지 않고, 오직 선교 목적 하나를 위해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한 사례도 하나둘이 아니다. 저자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겠지만 그것이 교회그림 연재의 주제가 아니니 굳이 언급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싶다.


해방이 되고 혼란한 정국을 넘어 독재정권 치하의 암울한 시기를 지날 때 한국교회는 그런 정권에 맞서기를 서슴지 않았다. 1987년 6월 10일 오후 5시 덕수궁 옆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김성수 주교의 집례로 4.13 호헌 철폐를 위한 미사가 열렸다. 미사가 끝난 후인 저녁 6시 분단 42년을 끝장내자는 의미로 주임사제가 종을 42번 쳤고, 이에 맞춰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는 것으로 6.10 민주항쟁이 시작되었다. 그런 역사를 담은 ‘질박하면서도 무게감을 주는 화강암 외벽을 지닌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은 저자의 그림 중 압권으로 꼽을 만하다.


백 년 된 교회를 대상으로 삼았다고는 하지만 저자가 꼭 거기에 구애받은 건 아니다. 좋은 의미든 아니든 한국교회를 그리는데 빼놓을 수 없는 몇몇 교회를 추가하기도 했는데, 그것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예컨대 저자는 한국교회를 번영신학과 성공주의 신앙으로 오염시킨 여의도순복음교회와 민중신학이 태동되는데 큰 영향을 끼친 산업선교의 요람 영등포산업선교회를 대비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대비의 배경에는 한국 교회의 주류가 걸어온 넓은 길을 두고 좁은 길을 선택해 걸어온 저자의 철학이 깔려있을 것이다. 저자는 노동자 목회를 시작으로 평생 돈 안 되고 고생스런 일만 골라서 해온 사람이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서 현장훈련을 받은 저자는 산업선교회 총무를 맡던 1980년대에 민주인사들을 초청해 강의를 열고, 산업선교회를 노동자들의 풍물소리가 진동하고 노동자들이 모이고 연극하고 노래 부를 수 있는 24시간 열린 곳이 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소외됐던 노동자들이 그가 깔아준 판에서 살맛나는 해방과 구원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전국에 걸쳐 있는 백년 교회를 골고루 소개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내 눈길은 그저 서울에 있는 교회에 머물렀다. 서울이 아닌 곳에 있는 교회 중 몇몇은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뿐 그 어느 교회도 눈으로 본 일이 없다. 그래서 늘 보고 느끼던 교회만큼 공감할 수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렇기는 해도 홍천 도심리교회는 한 번 가보고 싶다. 2002년 홍동완 목사가 선교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마을에 왔을 때 주민들이 큰 돌과 통나무로 막고 나섰다. 교회를 세우지도 않고 집집이 다니면서 예수 믿으라고 하지도 않겠다고 약속하고서야 정착할 수 있었다. 말이 아닌 삶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목사가 아닌 마을 막내로 자처하며 마을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3년째 되는 해 마을 대보름 제사에서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렇게 또 3년이 지난 후 할아버지 한 분이 자기 칠순잔치에서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교회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그 분이 마을의 첫 번째 세례자가 되었다. 이제는 마을 주민 절반이 교인이 되었다. 작은 동산 지하 4미터에 아담하게 지은 40평 예배당, 천장과 벽이 나무로 되어 있어 냉난방이 필요 없는 친환경 에너지절약 건축물, 강단 뒤 숲을 가득 담은 커다란 창을 통해 자연과 교감할 수 있게 만든, 영적으로도 풍성한 공간. 그 공간이 궁금해졌다.


중고등학교 동창인 저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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