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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y 07. 2022

욥이 말하다

고통은 하나님의 뜻인가?

양명수

복있는사람

2022년 3월 25일


“고통은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명제는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숙제였다. 회사의 전부가 걸려있는 소송을 몇 년째 감당하면서, 회복될 수 없는 병으로 고통을 겪는 이웃을 만나면서 드리는 기도의 대부분은 이에 대한 질문이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 어느 것이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지만 어느 구절을 가장 의지하느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라”고 대답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직면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는 출발점이자 뿌리이기도 했다. 그런 내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은 모순일 수밖에 없었다.


고통은 그 자체로도 견디기 힘들지만 그것 때문에 신념이 흔들리고 종국에는 사람을 파괴한다. 그래서 두렵다. 성경 전체가 고통에 대한 서사이지만 그 중 욥기는 오로지 고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고통과 맞닥뜨렸을 때 그만한 안내서가 없다. 하지만 무수한 논쟁이 뭘 뜻하는지도 모르겠고 욥의 반응이나 하나님의 응답 태반이 동의되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내게는 욥기에서 답을 찾기에 앞서 욥기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숙제가 되었다.


저자는 시종일관 고통은 하나님 뜻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도 하나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사람에게 자유를 허락하셨고, 바로 그 자유 때문에 당신 뜻과 다른 일이 일어나며, 하나님의 전능하심 곧 모든 것이 당신 뜻대로 되는 것은 일단 종말로 미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으며, 그 대신 서로를 위로하고 위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이 여기에 그친다면 이생의 삶은 암울하며 비극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태초에는 좋음만 있었고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야 비로소 옳고 그름이 생겼다고 말한다. 그러니 하나님의 속성 중 선하심은 의로우심에 앞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선하심보다는 의로우심을 훨씬 강화하는 바람에 욥을 이해하는 대신 정죄하기 바빴으나 하나님께서는 욥기의 말미에서 직접 이 우선순위를 바로잡아주셨을 뿐 아니라 당신 뜻 밖에서 일어난 고통조차 외면하지 않으시고 위로하시며 선한 결말을 맺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저자는 고통 받는 사람에게 적용할 하나님 말씀의 본질은 ‘교훈이 아닌 위로’라고 말하며 어떤 것이 진정한 위로인지에 대해 여러 곳에서 반복해 설명한다.


많지 않은 분량이었지만 곳곳에 고통과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저자의 탁월한 해석이 실려 있어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읽었다. 그리고 정리하는데 또 그만한 시간이 들었다. 그러면서 저자가 궁극적으로 하려 했던 말은 “고통이 무엇인지,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반응해야하는지” 보다는 “사람이 겪는 고통은 하나님께도 고통”이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이 설명되기를 바란다. 내가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설명되지 않을 때 혼란과 두려움에 빠진다. 나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일 없이 잘 살고 때로는 악인이 오히려 나보다 더 잘 살기 때문에 그 고통을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고통 자체도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지만 고통에 대한 생각이 사람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이들의 신학은 너무나 단순하다. 의로우면 복을 받고 불의하면 화를 입는다는 것이다. 이 경우 자기 행운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더 큰 고통으로 밀어 넣는 문제가 일어난다. 그들의 상황을 헤아리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고통의 깊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의로운지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친구들은 욥에게 그가 당하는 고통을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라고 말한다. 징계는 성숙에 이르는 길이고 성숙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복의 수단으로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너무 잔인한 분이 아니신가.


욥기는 욥의 고통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자유를 오용해서 죄를 저질렀고 그 자유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니, 죄의 결과인 고통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유를 허락하신 것은 사람들이 당초 창조의 뜻대로 잘 살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 고통을 마음 아파하시고 당신 뜻 안의 일로 만들어 선하게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의 수단으로 고통을 허락하셨다고는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이 어디 욥에게만 적용되는 것이겠는가.


저자는 고통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하나님의 정의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물론 사람의 죄를 볼 때 고통을 당해도 할 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정의가 그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고통당하는 사람 쪽에서 이해한 신학이 바른 신학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고통은 사람을 파괴하기 때문에 악이며 없을수록 좋을 뿐 아니라 고통이 삶을 깊이 있게 만든다고 해서 고통을 찬양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람이 겪는 고통은 사람에게뿐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고통이라고 거듭 말한다.


고통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지혜로운 일이기는 하다. 비록 지금 이해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지만 그것이 내게 유익한 방향으로 열매 맺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고통을 하나님의 계획과 연관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고통은 하나님의 섭리가 된다. 결국 신앙이 고통을 정당화하며 인간은 무력한 운명론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인과응보 또한 신앙에서 중요한 개념이지만 매사를 인과응보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잘 사는 것은 선에 대한 보답이요 고통당하는 것은 악에 대한 보응이라는 관점은 현실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런 해석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욥은 약자의 위치에 서보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인심이 얼마나 박한지 몰랐을 것이고 가난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돈이 없으면 얼마나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낙관적으로만 생각했을 수 있다. 인간 본성에 대해서도 선한 쪽으로만 보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욥은 고통을 겪으면서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세상이 그렇게 희희낙락할 만한 곳이 아니며, 의로운 자가 반드시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긍정적으로만 보는 낙관주의가 약자의 처지를 간과하는 경솔한 생각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욥의 친구들처럼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비우기를 권한다. 어느 순간부터 자기가 꽉 들어차 하나님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믿음이 만든 교만이요 믿음이 만든 경직성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너무 하나님 편에 서있는 사람은 그러다가 자신이 신성한 자가 되고 만다고 경고한다. 경건하면서도 사람 편에 설 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니 결국 신앙은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고통 받는 이웃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저자는 사람이 죄인으로 몰리면 자기변호를 하기 쉽지 않다고 말한다. 심리적으로도 위축되기도 할 것이고 자기반성이 있는 자기변호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욥처럼 경건한 사람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말을 믿고 따랐기 때문에 특별히 다른 이에게 자기를 변호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어서 자기변호의 힘이 약하다고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당하는 이들이 너무나 쉽게 고통을 죄의 결과로 여기는 폭력적인 언어에 대해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고통당하는 이들의 음성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의 출간과 관련한 인터뷰에서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로하는 과정에서 흔히 저지르는 과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히고 있다.


“자기들 딴에는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로한다고 하는데 그게 결국 설교가 돼 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욥의 친구들도 처음에는 일주일이나 말을 안 했어요. 그런 고통 앞에서 사람의 말로 무슨 위로를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친구들도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위로하려고 했겠지만 나중엔 설교가 돼 버렸어요. 고통당하는 사람들도 남들이 해 주는 말이 좋고 옳은 줄 알거든요. 하지만 정작 내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도 안 되고 받아들일 수 없는 말들인 거예요. 심지어 욥기 마지막에 등장하시는 하나님도 정작 욥의 고통에 대해 직접 얘기하지는 않으시죠. 고통이라는 건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거거든요. 그러니까 교회는 사람을 귀하게 대접해야 해요. 욥의 친구들처럼 힘써 하나님을 변호하려다가 보면 자칫 사람을 내다 버리게 돼요. 그건 하나님의 뜻과 아주 거리가 멀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사람을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만큼 인간의 존엄성을 선포하는 게 없거든요.”


고통을 위로하는 말이란 결국 홀로 가야하는 길인 줄 알면서도 같이 있겠다는,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뜻을 표시하는 말이다. 동시에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는 말이다. 저자는 그래서 그런 말은 말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말에 내용을 실으려고 하면 무리가 생기고 오히려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이다. 말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고 말하는 사실이 중요할 뿐인데 욥의 친구들은 고통당하는 사람 앞에서 말에 너무 내용을 실으려 했고, 그래서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 되고, 결국 욥을 책망하는 말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욥기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저자는 인간이 당하는 고통 중에도 납득할 수 없는 고통,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막힌 고통을 그리기 위해 욥을 흠 없는 사람으로 설정했다고 해석한다. 그렇기 때문에 욥기는 욥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우리 이야기라고 말한다. 사실 살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닥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쉽게 죄의 대가라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은 또 얼마나 많은가. 저자는 욥기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추적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욥기는 의인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저자의 이런 생각에 흔쾌히 동의되지 않는다. 나 또한 욥과 같은 문제에 부딪혔지만 욥과 같이 너무도 경건해서 비인간적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있는 반응을 보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람들이 욥이 부자라고 해서 존경한 것만은 아니고 실제로 의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진정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욥의 지위와 재물이 존경을 받는데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지 질문을 던진다. 이 또한 내가 욥기를 내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가끔 악인이 결국 망하는 것을 확인하지만 의가 승리하리라는 것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마침내 의가 승리하리라는 것이 믿음의 영역이라는 말로 책을 끝맺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더 큰 복을 내려주신다는 서사는 왜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욥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더 큰 복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허락하신 것은 결국 세상 논리를 따른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잃은 자식보다 더 많은 자식을 얻은 것을 과연 더 큰 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아직도 풀지 못한 질문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저자가 책 전편에 걸쳐 서술한 고통의 의미와 거듭 강조한 ‘우리의 고통을 당신의 고통으로 여기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판단하고 이행하는데 귀한 지침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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