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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y 15. 2022

루터의 재발견

개신교 정신

최주훈

복있는사람

2020년 7월 27일


개신교의 뿌리가 루터의 종교개혁에 있음에도 개신교인으로 평생을 살아왔다는 나는 종교개혁에 대해 그리고 루터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교과서에 나오는 정도를 넘지 못한다. 하지만 저자는 루터에 대한 자료는 차고도 넘쳐 오히려 통일된 견해로 압축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객관적 평가도 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말한다. 그런데 루터에 대해 무지한 게 내 문제만은 아닌 모양이다. 저자는 한국교회 전체로 봐도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은데, 그것은 한국교회의 교파가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에 쏠려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루터는 실종되었고 그 자리를 칼뱅과 웨슬리가 채우고 있다고 말한다.


뜻한 바가 있어 십 수 년 해외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본교회로 복귀하지 않고 루터교회에 둥지를 틀었다. 루터교회를 마음에 두면서 루터에 대해 그리고 종교개혁에 대해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르틴 루터 대교리 문답>, <마르틴 루터 소교리 문답>, <마르틴 루터 95개 논제> 그리고 루터교회 예전을 다룬 <예배란 무엇인가>를 읽었지만 그것으로 루터와 종교개혁을 읽어낼 만한 역량이 내게 없었다. 사놓기만 하고 일 년여를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에서야 <루터의 재발견>을 읽었다. 비로소 그간 저자가 발간한 저서를 씨줄과 날줄로 엮을 수 있었고, 루터와 종교개혁을 개괄적으로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이해라고 하기는 너무 이르고, 입문 정도가 아닐까) 말하자면 이 책은 그간 저자가 발간한 저서의 종합 해설판인 셈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동인이 되었던 면죄부가 어떤 신학적 바탕에서 출발한 것인지, 무엇이 종교개혁을 성공으로 이끌었는지, 종교개혁에 들어있는 개신교 정신은 무엇이며 과연 지금 그 정신이 발현되고 있는지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루터대학을 졸업하고 독일에서 루터신학을 공부하고 루터교회의 본부교회에 해당하는 중앙루터교회 담임목사로 오랫동안 수고하고 있는 루터 전문가이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 때는 CBS에서 3부작으로 방송한 <다시 쓰는 루터로드>의 리더로서 젊은이들과 종교개혁의 현장을 돌아보며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루터의 종교개혁정신을 소개했다. 지금도 끊임없이 루터와 종교개혁에 관한 저서를 집필하고 있다.


종교개혁은 소통혁명


루터가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염두에 두고 <95개조 논제>를 발표한 것은 아니었다. 저자는 루터가 단지 대학과 성직자 세계 내부에서만 논의할 생각으로 이를 라틴어로 발표했고, 당연히 반응이 미미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듬해 <95개조 논제>가 독일어로 번역되고 인쇄되자 눈 깜짝할 사이에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종교개혁이 민중 속으로 파고들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루터의 <95개조 논제>는 성경과 함께 사제의 독점적인 언어인 라틴어에서 민중의 언어인 독일어로 번역되면서 날개를 달게 되었고, 이런 흐름이 예배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로마교회의 사제가 소유하던 신앙의 독점적 지위와 지식인들의 전유물로 여기던 중세 권위 체계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모든 공동체가 공감하며 참여하는 수평적 공동체가 세워진다.


말하자면 언어와 인쇄술이 자칫 대학과 성직자 세계에 갇혀있을 뻔 했던 <95개조 논제>를 민중과 연결시킴으로서 소수 권력층이 독점하던 진리를 다수의 민중세계로 확산시킨 것이니, 종교개혁은 저자가 표현한 대로 언어와 인쇄술을 매개로한 소통혁명이었던 셈이다.


죄(벌)의 용서, 연옥, 그리고 면죄부


종교개혁 이전에 교회에서는 ‘죄’와 ‘벌’을 구분해서 가르쳤다. 그래서 지은 ‘죄’를 사제에게 고백하고 사제가 정해준 보속(참회한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을 통해 ‘벌’을 면제받는 방식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 (이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때 자신이 모르고 저지른 죄나 기억하지 못한 죄는 고백할 수 없으니 보속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결국 벌은 용서받지 못한 채 쌓이는 문제가 남는다. 그래서 그 해결책으로 “‘연옥’에 머무는 동안 중보기도를 통해 쌓인 벌을 용서받는다”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사실 ‘연옥’은 교회의 공식 가르침이 아니었고 이와 같은 필요에 따라 오랫동안 사회와 정치와 종교가 어우러져 만든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건축자금이 필요했던 로마교회는 여기서 중보기도를 대신할 ‘면죄부(엄밀히 말하자면 죄를 용서받는 면죄부가 아니라 벌을 면제받는 면벌부)’ 개념을 착안해낸다. 그리고 헌금정신이나 가난한 독일 현실은 물론 성경의 가르침과도 아무 관계가 없는 면죄부를 판매한 수입으로 웅장한 교회를 건축하고, 교황의 사치스러운 생활이나 교회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군대 양성 비용을 충당하기에 이른다.


정리하자면 단지 ‘죄(벌)’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에도 없는) 연옥을 만들어 냈고, 돈이 필요했던 로마교회는 자의적으로 중보기도를 면죄부로 대체해버린 것이다. 그러니 교회의 타락과 부패는 오히려 당연한 결과였고, 이것이 종교개혁이라는 반작용으로 이어진 것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공동금고와 헌금정신


루터교회에 출석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중 하나가 공동금고이다. 급작스러운 재난을 당하거나 형편이 어려운 교인들을 돕기 위해 헌금과 별도로 관리하는 공동금고는 그 대상을 교인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알고 보니 공동금고는 루터교회에서 독자적으로 만들고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 당시 그 정신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루터하우스에  당시 사용하던 공동금고가 있는데, 이 공동금고는 열쇠를 목사 대표와 평신도 대표와 시의회에서 선임한 사람이 나눠 가지고 있다가 함께 꽂아야 열 수 있었고, 여기 들어있는 헌금은 교회 경상비로 지출할 수 없고 갑자기 재난 당한 지역주민이나 홀로 된 여인과 고아 그리고 은퇴한 목회자를 위한 기금으로만 사용하도록 한정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재정이 투명하게 운영되었으며 헌금이 시민사회까지도 납득할 만한 용도로 사용된 것이다.


한국교회의 부패는 역할을 계급으로 생각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놓지 않으려는 데서 시작되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돈 문제로 귀결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헌금설교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저자는 루터교회는 헌금설교가 금기 아닌 금기라고 말한다. 돈으로 은총을 거래하는 면죄부에 반대하면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으니 교회가 돈 걷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헌금설교를 하는 것은 그렇지 않으면 헌금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염려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면죄부를 팔던 교회와 그것에 반대하던 교회의 헌금총량은 어땠을까? 당연히 당시 로마가톨릭교회가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저자는 놀랍게도 그 반대라고 말한다. 종교개혁기 동안 루터교회에 헌금과 자선과 기부가 훨씬 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종교개혁을 통해 헌금에 대한 교인들의 생각이 어떻게 변했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 당시 중세 교인들이 기부하고 헌금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돈 주고 구원을 사는 것이며 거래 상대는 하나님이다. 다음 생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 개신교인들에게 헌금과 자선과 기부는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하기 위한, 또는 영혼의 안식처를 준비하기 위한 투자나 저축이 아니었다. 저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약한 이웃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헌금과 자선과 기부 같은 선행의 목적은 오직 이 땅의 이웃을 돌보는 것이며, 처음부터 병들고 가난한 사람, 눈물 흘리는 사람, 과부와 고아, 그리고 공부하며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는 것을 종교개혁의 역사는 누누이 가르친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적 섬김의 모델인 디아코니아의 출발이다.”


개신교 정신


종교개혁은 신학이나 이론이 아니라 이와 같이 일상생활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개신교 정신이란 무엇일까?


저자는 유럽의 과거 역사와 현재 모습을 살펴보면 종교개혁 정신이 사회에 얼마나 잘 녹아들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정치인의 청렴도, 보편 교육체계, 토론문화, 사회복지시스템, 교회와 사회의 협력관계가 거의 모두 종교개혁정신에 기초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권위주의 체제에 저항하고, 전통과 구습에 질문을 던지고, 질문과 소통을 통해 재해석하고, 그 재해석의 힘으로 교회와 사회를 새로운 공동체로 바꾸어 가는 것, 그것이 개신교 정신이라고 강조한다.


“개신교 정신은 권위에 대한 순종과 믿음이 아니다. 권위에 대한 믿음을 믿음에 대한 권위로 바꾸는 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다. 교회의 정책결정이 소수에게 집중되고, 다수의 교회 구성원은 소수에 의해 결정된 정책을 내용도 모른 채 따르는 실정이다. 소수에게 권한이 집중되어 있는 조직은 공동체라고 할 수 없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루터교회에서 배포한 정관을 받아보았다. 일반적인 교회와는 달리 임기제를 시행하고 있고 교회운영을 이끌어가는 운영위원회의 문호도 개방되어 있어 과연 루터교회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자가 강조하는 대로 소수에게 권한이 집중되어 있는 교회는 공동체라고 할 수 없고, 정관에 그런 내용이 충실히 반영되어 있어 매우 반가웠다.


앞서 인용한 대로 저자는 “권위주의 체제에 저항하고, 전통과 구습에 질문을 던지고, 질문과 소통을 통해 재해석하고, 그 재해석의 힘으로 교회와 사회를 새로운 공동체로 바꾸어 가는 것, 그것이 개신교 정신”이라고 강조했는데, 아쉽게도 정관에서는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정관이 전부는 아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켜 무너져 내린 신앙을 바로잡는 큰 계기를 마련한 것은 개신교인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이다. 그래서 루터의 사상과 헌신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한 대로 당시 독일사회가 루터가 아니더라도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죄악이 만연했다면 어떤 계기로든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종교개혁을 루터 개인의 헌신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것보다는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그런 상황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지금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루터의 정신을 이어받는 길이 아닐까 한다.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저자는 현대 가톨릭신학의 거장인 칼 라너가 “예수의 복음은 글로 전해진 것이 아니며 예수 승천 이후 초대 교회의 필요에 의해 사도들과 전승의 기억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교회가 성경을 만든 것”이라며 “말씀이 교회를 창조했다”는 루터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물론 루터의 주장은 권위주의 체계의 정점에 있으면서 모든 가치체계를 독점하는 사제그룹을 겨냥한 것이다. 그런 상황을 배제하고 단순히 칼 라너의 주장만을 놓고 봤을 때 그것이 틀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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