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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y 17. 2022

교회가 가르쳐주지 않은 성경의 역사

성경은 기록이 아닌 편집의 산물

정기문

아카넷

2020년 6월 15일


몇 년 전에 사학자인 건국대학교 김기흥 교수가 쓴 <역사적 예수>를 읽으면서 크게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깨닫고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그의 주장은 내 신앙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에 대해 가졌던 의문을 사학자의 관점에서 하나하나 풀어가는 과정은 무리하지 않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가 내린 결론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추론해 가는 과정에서 강조한 몇 개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었는데, 얼마 시간이 지난 후 그것이 기독교계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성경은 역사서가 아니라 신앙고백서라는 것인데, 이 주장에 공감하게 되면서 성경을 읽는 자세가 크게 바뀌었다.


이 책의 저자 정기문은 로마사를 전공한 군산대학교 역사학 교수로 30여 년간 서양고대사를 연구해왔고, 최근에는 서양사를 이해하는 데 핵심 요소인 기독교의 역사를 탐구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그런 그는 이 책에서 “성경은 당초 경전이 될 것으로 예상하거나 기대하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신앙에 대한 자기 의견을 피력한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참고자료가 되고 정경으로 자리 잡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그것이 역사적인 기록물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성경은 역사서가 아니라 신앙고백서라는 김기흥 교수의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교회학교에서는 흔히 성경은 40여 명의 기자(記者)가 1,500년에 걸쳐 기록한 것이며, 모세 오경은 당연히 모세가 기록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진 것을 보면 신구약 가릴 것 없이 어느 시점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구전되어 오거나 필사로 전해져 오던 것이 취합되고 ‘편집’되어 정경으로 인정된 것이다. 저자는 필사로 전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잘못 옮겨 적은 것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의도적으로 수정한 부분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신약의 경우 초대교회 지도자의 판단에 따라 전승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하거나 기존에 없는 본문을 추가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나중에 기록된 성경일수록 예수를 ‘엄격한 존재에서 자비로운 존재로, 인간적인 존재에서 신적인 존재’로 바꾸어 그리고 있다. 이후 초대교회에서는 신적인 존재에서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까지 격상되며 여기서 삼위일체론이 자리를 잡는다. 말하자면 예수의 가르침을 근거로 교리와 신학이 정립되기 시작했고, 교리와 신학이 어느 정도 체계화된 5세기 초 아우구스티누스 이후로 수정과 첨삭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니, 저자의 주장을 보더라도 성경은 기록보다는 편집의 산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성경의 기자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구약시대에 유대인 문서는 익명으로 작성하는 전통이 있었으며, 신약시대에도 그 전통이 이어졌기 때문에 신약 문서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신약 27권이 모두 익명이나 차명으로 작성되었다고 주장도 있다고 소개한다.


그동안 교회에서는 신약 27권 중 바울이 기록한 것이 13권에 이른다고 가르쳐왔다. 바울이 기록한 것은 모두 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저자는 서신은 길어지면 전하려는 메시지가 흐려지고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대체로 짧은데 거기 비해 바울서신은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길다고 지적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바울서신은 몇 개의 서신이 유통되다가 하나로 취합된 것이라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소개한다.


19세기 말에 들어오면서 바울서신으로 알려진 히브리서의 저자가 바울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밖에도 에베소서ㆍ골로새서ㆍ데살로니가후서ㆍ디모데전서ㆍ디모데후서ㆍ디도서 역시 바울이 쓴 것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공동서신 중에서도 베드로전서ㆍ베드로후서ㆍ요한1서ㆍ요한2서ㆍ요한3서ㆍ유다서가 차명으로 기록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저자는 예수라는 인물의 상(像)이 어떻게 뒤바뀌어갔는지 추적한다. 잘 알려졌듯 마가복음은 사복음서의 원조이다. 하지만 저자는 마가복음의 저자는 예수를 격정적이고 직설적이며 투쟁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 반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저자는 마가복음의 그런 묘사를 마땅치 않게 여겼으며 오히려 예수를 부드럽고 인자하고 자비로운 인물로 제시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석한다.


저자 역시 <역사적 예수>의 저자 김기흥 교수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만들어진 신’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예수가 신으로 만들어져 가는 과정을 복음서마다 묘사가 다른 부분을 비교해가며 추적한다.


저자는 삼위일체 교리가 자리잡아가던 4세기 무렵에 나사렛 사람 예수가 점차 ‘완벽한 신’으로 만들어졌다고 판단한다. 신이 혈육으로 태어날 수는 없는 일이니 교회지도자들이 ‘아버지 요셉’을 지우기로 하고 복음서에서 빌미가 될 만한 구절들을 고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작성된 필사본에 어머니 마리아 앞에 ‘처녀’라는 단어가 추가되고, 요셉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구절이 수정되었다.


예수의 수난과 관련해 가장 먼저 작성된 마가복음은 예수를 매우 연약한 모습으로 그린다. 그래서 절망하는 모습을 강조한다.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예수께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마가복음을 기초로 작성된 누가복음은 예수를 자기 운명을 의연하고 담대하게 받아드리는 초월자이자 신의 모습으로 그린다. 예수께서는 함께 달린 행악자 한 사람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시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면서 운명하신다.


마가복음을 제외한 세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영지주의자들은 이 구절에서 성령이 ‘예수 속으로(에이스) 내렸다’는 표현을 근거로 가현설*을 주장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사람의 몸을 입었고 수난을 겪으시기 전에 다시 그 몸을 버리셨다는 주장) 저자는 이를 반박하기 위해 교회지도자들이 ‘~위에(에피)’로 바꿨고 이것으로도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물리치지 못하자 ‘~에게로(프로스)’로 바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동등하게 창조하셨고 예수께서도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을 그렇게 대하셨다. 그런 기독교정신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는 구절을 만나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린다. 그런 힐난에 가까운 질문을 적지 않게 받았으면서도 아직 그에 대응할만한 답을 찾지 못했다.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선명한 대답을 내놓는다.


성경 기자 대부분은 지독한 남성우월주의자들로 그들이 성경 대부분을 썼고 또 ‘관리’했는데, 이 때문에 성경에는 여성을 남성의 부속물이나 종속물로 치부하는 억압적인 인식이 드러나 있으며, 남성 중심적 위계질서를 뒷받침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도구로 이용되어왔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로마에서 가장 큰 ‘도미틸라 카타콤’에 있는 여성지도자가 좌우에 베드로와 바울을 세워놓고 성찬식을 집례하는 그림에 누군가 여성지도자 얼굴에 수염을 그려 넣어 남성으로 탈바꿈시킨 사례를 예로 든다. 초대교회에서 여성의 위상이 낮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남성우월주의로 바뀐 것이며, 이는 예수나 바울이 여성에게 우호적이었다는 기록이 교회를 위협한다고 판단한 교회지도자들이 주도했다고 말한다.


이런 저자의 주장은 매우 생소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런 문제 부분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글성경에 반영되어 있다. 원본에 없었지만 후대에 추가한 것이 분명한 구절은 아예 삭제하고 ‘없음’이라고 표시해놓거나, 후대에 수정한 것이 확실한 경우 해당 구절을 꺾쇠 안에 넣어놓고 문제 부분이라고 밝힌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대다수의 신학자들이 삭제하는데 동의한 성경구절로는 마태복음 6:13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마가복음 16:9-20 (부활 후 승천까지 일어난 사건), 누가복음 23:3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요한복음 7:53-8:11 (간음하다 잡힌 여인), 요한복음 21장, 로마서 16장을 들 수 있다.


저자는 “아직도 상당수의 보수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경의 모든 구절이 글자 그대로 진실이기 때문에 일점일획조차 고치면 안 된다며 버티고 있다”며 질타한다. 더구나, 진보적인 지도자들조차도 성경의 본문이 변경되고 있는 사실을 자기네만 알아야 하는 ‘비밀’인 양 치부하고일반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거의 말해주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이 책에 <교회가 가르쳐주지 않는 성경의 역사>라고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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