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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y 23. 2022

일본제국 vs. 자이니치

민족수난사로서의 자이니치 역사

이범준

북콤마

2015년 7월 15일


십 수 년을 재외국민으로 살았다. 간혹 동포라고도 불렸지만 교포라고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교포는 (한국에서는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국적을 포기하고 거주국가의 국적을 취득한 경우를 말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포와 동포와 교민에 대한 뚜렷한 정의를 찾을 수 없었고, 그런 혼란을 막기 위해 얼마 전부터 한국 국적을 가지고 외국에서 사는 사람을 ‘재외국민’으로 분류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재외동포 재단에 따르면 해외에 있는 한인회는 400개가 넘는다. 미국에는 108개, 일본에 32개가 있다. 일본 한인회는 다른 한인회와 달리 한인회와 민단으로 나뉜다. 재일본 한인회가 자발적으로 이주한 한국 국적자들의 모임인데 반해 민단은 일제강점기 때 비자발적으로 일본에 이주한 재일조선인(자이니치 조센진. 줄여서 ‘자이니치’라 부른다)의 후손들이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면서 모든 조선인에게 일본 국적을 부여한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은 해방이 되면서 일본 국적을 박탈당하고 조선적 외국인(자이니치)이 된다. 한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자이니치 중 상당수가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만 이에 동의하지 않은 이들은 조선적으로 남는데, 이는 북조선이 미승인 국가라는 이유로 일본이 북조선 국적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 국적을 취득하거나 이에 동의하지 않아 조선적으로 남아있거나 상관없이 모든 자이니치는 차별과 혐오에 시달린다. 그런데도 한국은 이 상황을 정략적으로 이용하기만 할 뿐 자이니치의 고통을 외면하고, 이를 견디다 못해 일본 국적을 취득하면 배신자로 여긴다. 결국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은 일본과 한국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재일교포의 북송은 큰 문제였다. 당시는 언론이 자유롭지 않아서 북송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알기 어려웠고 그저 조총련의 농간 정도로 이해했다. 그렇다고 해도 북송을 택하는 이들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한편으로는 배신감도 들었다.


자이니치 북송에 대해 한국에서는 북조선이 속여서 데려간 것이라 하고, 북조선에서는 자발적으로 귀국한 것이라 하고, 일본과 미국은 본인 의사대로 귀국한 것이라 말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자이니치들이 일본에서 생활하는 게 극도로 어려워지자 그 출구로 북송을 택한 것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2007년 호주 역사학자 테사 모리스 스즈키가 이에 대해 연구한 것을 발표한 것을 인용하는데, 놀랍게도 일본 정부가 자이니치들을 내보내려고 의도적으로 곤궁으로 몰아넣은 정황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자이니치 60만 명 가운데 10만 명이 북조선으로 이주했는데, 그 중 98%는 본적지가 남쪽이었으며 출항 직전까지 국제적십자사에서 자유의사로 선택한 것인지 개개인에게 확인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남쪽에서 살던 이들이 살아본 적이 없는 반도 북쪽으로 다시 이동했다. 우리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논픽션 작가이자 사법전문기자인 저자 이범준은 70년 넘게 자국 영토에서 살아온 자이니치를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지금도 마치 ‘어제 나리타공항에 내린 외국인’처럼 대하는, 그래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식민지에서 사는 자이니치에게 일본 사회가 가하는 차별과 냉대의 역사를 확인하기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는 자이니치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3년간 기획하고 일본 현지에서 410일을 취재했다.


자이니치의 형성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모든 조선인에게 일본 국적을 부여한다. 일본은 1947년 천황의 칙령으로 외국인등록령을 내리는데, 이 칙령에서 재일조선인(자이니치)은 ‘당분간’ 외국인으로 간주한다고 명시한다. 당시는 남북한 모두 국가 수립 이전이므로 자이니치를 모두 조선적으로 등록한다. 1950년 연합국사령부에서 자이니치를 한국 국적으로 바꾸어주지만 북조선으로는 바꾸어주지 않는데, 이는 한국정부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이와 같이 ‘당분간’ 외국인이던 자이니치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된 날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모두 일본 국적을 상실한다”는 ‘평화조약 발효에 따른 조선인의 국적과 호적 사무처리 명령’으로 ‘완전히’ 외국인이 된다.


자이니치를 외국인으로 여기는 건 일본으로서 당연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조치는 일본 국적을 박탈해 자이니치에게 기본권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이 조치로 자이니치를 난민으로 만든 후 잠정 거주를 허가했다. 잠정 거주는 정식 체류 자격이 아니며 보장된 기간도 없었기 때문에 언제든 내보낼 수 있었다.


1965년 한일협정 이후 일본은 한국 국적으로 바꾼 자이니치에게만 영주비자를 내주고 북조선이 미승인 국가라는 이유로 조선적을 북조선 국적으로 바꾸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 국적으로 바꾸지 않은 자이니치는 그대로 조선적을 유지하게 되었다.


조선적은 무국적과 비슷한 상태이기 때문에 여권이 없다. 외국에 갈 때마다 일본 정부가 발행하는 재입국허가서를 받아야 한다. 재입국허가서에 방문하는 나라의 비자를 받아 붙인다. 출입국 심사관에게 비자를 보여주고 입국하는 것이다. 외국에서 트러블이 생기면 아주 곤란하다. 어느 나라 국민도 아니기 때문에 찾아갈 대사관이 없다.


2008년 이후 한국은 조선적의 입국을 금지한다. 일본 국적은 비자 없이 한국에 오지만 조선적은 한국에 오지 못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임시여권으로 불리는 여행증명서를 내주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한국 국적으로 바꾸면 정식 여권을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많이 자이니치들이 한국 국적으로 바꾸지 않고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다. 북조선을 지지해서이기도 하고 통일조국을 지향하느라 한쪽을 선택할 수는 없어서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표면상 조선적이 실질적으로는 북조선 국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본사회가 자이니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자이니치가 일본인이라는 공동체를 균열시키기 때문이다. 한국 유학생은 일본어가 서투르고 한국 교육을 받았으며 한국 문화에 익숙하다. 따라서 일본이라는 공동체 외부에 있다. 그런 측면에서 자이니치는 일본인과 아주 조금 다른, 그래서 공동체 내부에서 공동체를 흔드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이니치가 북한으로 기운 이유


일본이 자이니치를 내보내려고 한국과 협상을 시작하자 이승만 정부는 한 사람 당 500달러를 달라고 요구한다. (당시 인당GDP 81달러) 일본은 한국이 자이니치를 데려갈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한국도 일본이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승만은 이를 일본과의 외교 침체를 타개할 카드로 이용한다. 북조선은 탄광이나 농업의 인력 부족을 타개하고 국제여론을 자기편으로 돌릴 생각으로 이에 응해 자이니치의 북송을 계획한다.


1945년 전쟁이 끝나면서 일본은 전쟁 특수가 사라지고 불황이 시작된다. 전투에 참여했던 일본인들이 돌아와 일자리는 더욱 줄어든다. 이런 사정으로 자이니치는 급속하게 일자리를 잃는다. 일본인들은 자이니치를 마땅히 일본을 떠나야할 존재로 여긴다. 자이니치는 취직과 공직 진출이 막히면서 영세 자영업자가 되거나 종업원으로 일한다. 하지만 은행은 자이니치에게 좀처럼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 이때 조총련 산하의 조은신용조합이 돈을 빌려준다. 자이니치 상공인 상당수가 조총련과 가깝게 지내고 조선학교도 적극 지원한 것이 바로 이런 까닭이다. 일본 사회의 자이니치 차별이 내부를 강하게 결속시키고 이를 조총련이 주도한 것이다.


제주 4.3 사건 때 빨갱이라고 몰려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도망한 가족은 그 이유 때문에 한국 여권을 받을 수 없었다. 민족차별 때문에 일본에서는 도저히 살기 어려웠고, 고향인 한국에서는 받아주지 않았지만, 북조선은 그걸 안아주고 감싸주고 치유해주겠다고 했다.


조총련의 북송사업으로 자이니치의 1/6이 북조선으로 가는 바람에 일본의 자이니치 대부분이 북조선에 친척을 두게 된다. 반면 한국은 아버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먼 친척이 산다는 나라가 된다. 그래서 자이니치는 북조선에 있는 친척에게 생필품도 보내고 만나러 가기도 한다. 자이니치는 남북이 분단되기 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기 때문에 남북관계에 중립적이었지만 자이니치 북송을 계기로 북조선으로 기울게 된다.


2010년 ‘자이니치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에서 저지른 헤이트 스피치에 대해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손해배상금 12,263,140엔과 조선학교 반경 200미터 이내 거리 선전을 금지한 판결을 내렸고 같은 해 7월 오사카고등재판소에서 “이들의 발언은 재일조선인을 조롱하거나 일본 사회에서 재일조선인이 일본인 또는 다른 외국인과 더불어 사는 것을 부정하는 인종차별”이라며 항소를 기각하고, 12월 최고재판소가 상고를 기각함으로 판결을 확정한다.


일본이 이 소식을 종합 1면에 톱기사로 보도한 다른 날 한국 언론은 일본 신문을 인용해 이 소식을 전한다. 그러나 ‘조선학교 공격’은 ‘혐한시위’로 ‘자이니치 차별’은 ‘한국인 모욕’으로 바뀌어 있었다. 재판 현장을 취재한 한국 언론사는 없었다. 이 소송은 한국은 물론 자이니치 사회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했다. 자이니치 변호사협회에 도움을 청했지만 아무도 답변하지 않았다. 이 사건 변호에 참여한 변호사는 143명이었는데 이 중 자이니치는 10명에 불과했다. 당시 자이니치 변호사는 100여명 안팎이었다. 이는 소송 당사자가 조총련 휘하의 조선학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송에 참여한 자이니치 변호사 중 8명은 조선학교 출신이었다.


조선학교가 조총련계 학교인 것도 사실이고 통일 지향 교육을 하면서도 북을 지지하는 것도 사실이다. 북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4년이 채 지나지 않을 1957년 국내의 곤란한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2억 엔 가량의 교육원조비를 보냈다. 차별과 탄압과 빈곤으로 곤경에 처해있던 재일조선인들에게 이 돈은 큰 의미가 있었고 조국과 연대감을 새롭게 느끼게 했다.


투표권 논란


자이니치는 투표권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한국정부는 해외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주지 않았고 일본정부는 외국적이라며 주지 않았다.


1997년 오사카와 고베에 사는 자이니치 10명이 한국 헌법재판소에 공직선거법이 재외국민의 투표를 허용하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을 낸다. 1999년 헌법재판소는 조총련이 선거권을 가지게 될 경우 근소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상황에서 조총련이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선거권은 국민의 의무와 결부되므로 이런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재외국민에게 선거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전원일치 합헌 판결을 내린다.


2004년에 자이니치들은 다시 헌법소원을 제기한다. 이번에는 조총련계 재일동포가 선거에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위험성만으로 재외국민 선거를 제한하는 것은 보통선거 원칙에 반하며, 헌법에 선거권이 납세나 병역의 반대급부라고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2007년 위헌 판결을 내린다. 앞선 합헌 판결의 이유를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현재는 2009년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재외국민에게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권이 주어진 상태이다.


우여곡절 끝에 투표권을 얻었지만 2012년 투표율은 대통령선거 5.47%(25,312/462,509) 국회의원선거 2.12%(9793/462,509)에 불과하다. 투표자 상당수가 단기 체류 중인 유학생이나 주재원이었기 때문에 자이니치의 투표율은 이보다 훨씬 낮다. 자이니치는 한국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투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결과로 조총련이 투표에 참여해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1999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아울러 일본정부는 자이니치가 한국 투표권 얻은 것을 일본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는 논리로 내세운다.


2007년 위헌 판결에서 이공현 재판관은 소수의견을 통해 “이미 상당 기간 대한민국과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상이한 환경의 외국에 생활 기반을 잡고 그것에 영주할 의사와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아니한 재외국민이나 국외거주자들과는 대한민국의 선거나 정치 참여에 대해 가지는 태도의 진지성, 밀접성이 현저히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구체적인 국가구성원으로서의 권리가 필연적으로 인정된다고 보기 어렵다. 외국에 영주하면서 경제 문화 사회적으로 단절하겠다는 의사표시가 있거나 이미 단정됐는데 정치적으로만 이어놓는 것이 바람직한지 의문이 든다.”면서 이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피력하였다.


일본국적 취득에 대한 이율배반적 태도


내게 독일에서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는 자식이 있다. 영주권이 있어 독일 어느 오페라극장에서 일하든지 아무런 제약이 없다. 유럽연합국가를 여행할 때는 한국 여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그곳에서 공연하는 것은 별개 문제이다. 독일인은 유럽연합국가 어디서든 자국과 동일하게 일할 수 있는데 반해 한국인은 외국인에게 적용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자식은 한국에서 병역의 의무를 마쳤고 앞으로 계속 유럽에서 일해야 하니 필요하면 국적을 바꾸는 걸 생각해보라고 했다. 혹시나 부모에게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나 않을까 해서 그러라고 한 것이다.


나는 외국에서 살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사회의 일원으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거주지 국적을 취득하는 게 당연히 효율적이다. 한국 국적 지키는 것을 애국심이나 도리로 생각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정말 조국을 위할 생각이라면 오히려 거주지의 국민으로서 존경받는 삶을 사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3년 고이즈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진 다음날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 TBS 특별방송에서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나가는데 반드시 국적을 유지하는 게 칭찬할만한 일이냐는 새로운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자기 문화와 말과 긍지를 잃어버리지 않되 현지문화와 체제에 적응하고 그 사회의 일원으로 기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국적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생각하면 좋겠다”고 발언한다. 나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에 대해 자이니치는 시민으로 자립하며 권리를 갖자며 찬성하는 측과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살아가자며 반대하는 측으로 극명하게 나뉘는데, 반대하는 측이 훨씬 많아 보인다. 반대하는 측은 노 대통령의 발언을 모멸감으로 느끼기까지 한다. 해외에서 70년 넘게 살면서 자이니치처럼 조상의 국적을 유지하고 현지 국적을 취득하는데 거부감을 가진 집단은 역사적으로 세계적으로 드문데 그것은 그동안 극심한 차별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젊은 자이니치 변호사 하나는 “일본 국적이 되는 것은 싫다. 괴롭힘과 차별을 겪으며 얻은 정신적 상처가 크다. 일본 국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거부감이 올라온다. 일본 국적을 취득한다고 해서 완전한 일본인으로 받아주는 것도 아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자이니치들은 이중국적을 원하지만 한일 양국의 정치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본 국적을 택할 수밖에 없다. 외국에 나갔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영사관을 찾아가야하는데, 한국영사관은 기대할 것이 없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가족과 재산이 모두 일본에 있기 때문이다.”라며 어쩔 수 없는 고충을 토로한다.


자이니치들은 일본 국적을 ‘새로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1947년 외국인등록령으로 박탈된 일본 국적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국적을 되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하지만 거듭 패소한다. 권리 없는 삶이 계속되고 제도적 장벽이나 사회의 편견도 그대로다. 똑같이 돈을 내도 집을 빌리지 못하고, 일본 국적이 아니라며 상대방의 부모가 결혼을 막는다. 소학교 아이들조차 자이니치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따돌림 당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본 국적 ‘신규 취득’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는 국적 ‘회복’과 달라 일본정부의 허가를 기다려야 한다. 이름도 일본식으로 쓰도록 권고한다. 그래서 일본 국적 없이 삶을 지탱해온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 하는 자이니치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오늘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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