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ook Review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식 May 26. 2022

진진, 왕육성입니다

중화요리의 한국사

왕육성ㆍ안충기

동아시아

2022년 4월 30일


오늘은 시간이 흐르면 어제가 되고, 그 어제가 모여 역사가 된다. 역사란 이렇듯 개인의 삶이 쌓여 이루어지는데 그동안 정사(正史)만 역사인 것으로 배우고, 그래서 그런 줄 알고 살았다. 거기에 끼지 못한 이들의 삶은 그저 장삼이사로 스러져갔을 뿐 어디에도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 최근 들어 그들이 살아온 흔적을 추적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개인의 삶이 존중받으면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현상이면서 또한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


작가 박찬일 셰프는 한국에 중화요리가 들어온 지 140년이 넘었지만 뭐 하나 제대로 기록으로 남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기록으로 남지 않은 것이 어디 중화요리 하나뿐일까 마는, 그렇기 때문에 한국 중화요리의 역사 그 자체가 된 왕육성 사부의 회고록인 <진진, 왕육성입니다>가 그 역사를 만들고 기록하고 거기에 의미를 더할 것이라고 평가한다.


어느 날 페이스북에 입담 좋기로 이름난 안충기 기자가 주택가 골목식당으로 ‘미쉐린 가이드’에 올라 세상을 놀라게 한 <진진>의 왕육성 오너셰프 책을 냈다는 글을 올렸다. 무려 4년이나 취재해 쓴 글이고, 책 곳곳에 실려 있는 사진은 권혁재 기자의 작품이라고 했다. 한국을 떠나 있어 그 분들의 책을 사보지 못한 미안함도 있고, 지난 연말 글 솜씨에 감탄하며 읽었던 <짜장면, 곱빼기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의 저자 박찬일 셰프 소개 글에 이끌려 서점 도서목록에 올려놓았다. 며칠 전 서교동에서 북콘서트를 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부랴부랴 읽고 나서 염치 불구하고 무대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채 스무 살이 되기도 전인 1972년 장위동 대성원에서 중화요리에 몸을 담은 왕 사부는 1986년 열 번째 만에 코리아나호텔 ‘대상해’의 주방장으로 입성하고 1997년 마침내 오너셰프가 된다. 때가 되었다고 깨달은 그는 2013년 함께 일하던 주방장에게 권리금도 받지 않고 넘기고 물러난다. 그리고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꿈꾸었던 대로 ‘내 음식’을 내기 위해 서교동에 자그마한 식당 <진진>을 연다.


동네에서 호텔요리를 맛보게 하겠다는 목표로 시작했지만 주변에 있는 식당들이 어려워지지 않도록 짜장면이나 짬뽕 같은 식사 메뉴를 과감하게 뺀다. 줄 세우는 게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예약제로 운영한다. 가입하는 즉시 20%를 할인하는 회원제로 운영해 큰 이익을 포기하지만, 싼 값으로 훌륭한 음식을 내서 한 번 찾은 손님들이 다시 찾게 만들어 이름도 얻고 실속도 얻는다. 밥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생각으로 룸을 과감하게 없앤다. 여기에는 룸을 만들 경우 그를 이용하는 손님들을 배려하느라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고, 그것이 원가를 압박하는 요소로 작용해 당초 자신이 꿈꾸었던 대로 많은 이들에게 ‘내 음식’을 내기 어려울 것이라는 왕 사부의 경험이 녹아있었다. 주방을 모두 공개해 요리사들이 스스로 청결을 유지하도록 만들고, 손님들이 요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루해하지 않도록 만들뿐 아니라 나올 음식을 기대하게 하고, 주방장이 손님을 살펴가며 주방을 효율적으로 이끌어나가도록 만든다.


주방을 공개하거나 예약제, 회원제로 운영하는 식당은 여기 말고도 많다. 하지만 그런 곳은 있는 사람들의 세상이지 주머니 가벼운 이들이 갈 곳은 아니다. 그래서 동네에서 호텔요리를 맛보게 만들었다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도 찾아가기도 쉽지 않은 서교동 주택가의 <진진>이 ‘미쉐린 스타’ 식당이 될 자격은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개인의 회고록이나 평전을 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이들의 삶이 우리에게 적지 않은 울림을 주는 것도 사실이고, 그들의 통찰을 빌어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인터뷰 기사는 열심히 찾아 읽으면서도 그런 책에는 그다지 눈길이 가지 않는다. 이 책 역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왕 사부가 우여곡절이 많은 세월을 거쳐 왔지만, 그 연배는 다 그렇게 살았다. (그는 나보다 한 살이 많다.) 그래서 반쯤은 동지의식으로 읽었다.


오늘 북콘서트에 참석하고 또 읽은 것을 다시 정리하는데 ‘역사는 기록 자체가 아니라 기록 행간에 실린 것을 해석하는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세대 여느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의 삶이지만 기록되고, 쌓이고, 해석되면 한국 중화요리의 역사 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당장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으로 그 생명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훗날 역사의 일부로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 아니냐.


책을 읽으면서 두어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왕 사부가 ‘대상해’를 인수하고 난 후 매출이 대폭 늘었는데 직원들의 움직임이 그에 부응하지 못하자 급여를 성과급으로 전환한다. 기본급에 성과급을 더한 구조가 아니라 급여 자체를 매출에 요율로 연동한 온전한 성과급제였다. 기업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사례여서 과연 그것이 성공적으로 작동했는지,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는지, 끝까지 유지할 수 없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사실 기업이나 오너는 가급적 원가를 변동비로 만들고 싶어 한다. 경영 리스크를 분산시킬 수 있는 아주 수월한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급여가 매출에 연동되어 있으니 매출이 떨어지면 직원들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 대응한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이다. 왕 사부가 북콘서트에서 예로 들었던 여러 어려운 상황이 되풀이 되면 온전한 성과급은 유지 자체가 불가능하다.


지난주에는 ‘자이니치’라 불리는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겪고 있는 차별과 그런데도 조선적을 고집하는 그들의 삶을 취재한 글을 읽었다. 왕 사부 역시 이 책 말미에 화교로서 그가 겪었던 신산한 삶을 언급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차별을 금지해야 한다는 사회적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어 그가 겪었고, 또 겪고 있는, 앞으로도 좀처럼 달라질 것 같지 않은 어려움을 듣고 싶었다. 신산한 삶을 살면서도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취득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는지, 자녀들이 같은 길을 걷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북콘서트장은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왕 사부 뿐 아니라 함께 출연한 이연복 셰프, 박찬일 셰프 이야기까지 더해지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사회자가 미리 받아놓은 질문이 오십 여개가 넘는다고 해서 질문할 기회가 없겠다 싶었다. 다행히 기회를 얻었지만 시간이 빠듯해 충분한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성과급 제도가 성공적이었는지 궁금했는데 성과급을 택한 배경을 설명하다 시간이 다 지났다. 시간 때문에 국적에 대한 질문은 그냥 넘어가려는데 박찬일 셰프가 의미 있는 질문으로 여겨 부연 설명을 해줘서 감사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언젠가 열릴 그의 북콘서트가 궁금해졌다.


책 뒤편에 아주 짧게 통신대란 당시 경험담이 실려 있다. 본점을 비롯한 영업장 네 곳의 결제시스템을 두 개 통신사에 나눠 가입했고, 그래서 통신대란으로 KT 결제시스템이 마비되었을 때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고 했다. 기업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리스크관리 방안이기는 하지만 골목식당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일이다. 그래서 중화요리의 장인인 왕 사부는 동시에 기업인이기도 하다.


이 책의 기록자인 안충기 기자는 비록 남아있는 기록이 얼마 없기는 하지만 ‘일기장이 울고 갈 왕 사부의 기억력’ 때문에 책을 쓰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했다. 그렇기는 한데 읽어가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구절이 몇 개 눈에 띄었다. 왕 사부와 같은 세대를 살고 같은 동네에서 오갔으니 흘려보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시아나 항공은 1988년에 설립되었으니 1970년대에 ‘대관원’에 드나들던 박인천 회장은 금호아시아나 회장이 아니라 금호 회장이라 해야 적절하다. (p.146) 왕 사부가 ‘대관원’에서 근무할 당시 스물한 살이나 스물두 살이었을 텐데 그보다 네 살이나 아래인 주병진이 당시 라틴쿼터에 보조MC를 맡는 게 가능했을까? (p.149) ‘홍보석’이 있던 동부이촌동 리벌브맨션은 리바뷰맨션(River View)의 오기이다. 왕 사부 말 대로 연예인이 많이 살았는데, 당시 그곳에 살던 파주학생회 선배 최무룡 씨에게 찬조금 얻으러 간 일이 있었다. 찬조금은 못 얻고 차 한 잔 대접받고 왔지만 대스타를 본 것만으로도 싱글벙글했다. 최무룡 씨는 파주에서 13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p.155) 왕 사부가 살던 서소문 집에서 ‘홍보석’으로 출근하려면 순화동에 있는 한진고속터미널(지금 한일빌딩)을 지나가야 하는 건 맞는데, 지금의 세브란스 건강검진원 자리에 있던 건 동양고속터미널이다. (p.157)”


읽다 보니 왕 사부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던 때가 있었다. 왕 사부가 사보이호텔 ‘호화대반점’에서 근무할 때 사보이호텔 커피숍은 맞선 장소로 이름났는데, 바로 그때 그곳에서 내가 아내에게 청혼을 했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일곱 시에 시작하는 북콘서트가 끝나려면 아홉 시가 넘어야 해서 저녁을 먹고 가기로 했다. 몇 년 전에 짬뽕이 유명하다는 <진진 가연>을 찾은 일이 기억났다. 왕 사부가 서교동에서 운영하는 네 곳 중 하나인데, 그때는 왕 사부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곳에 저녁 먹으러 가니 수요일이 정기휴일이란다. 내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매거진의 이전글 일본제국 vs. 자이니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