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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n 02. 2022

폭격기의 달이 뜨면

런던 공습, 전격하는 히틀러와 처칠의 도전

에릭 라슨

이경남 옮김

생각의 힘

2021년 12월 10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석 달을 넘겼다. 전쟁 초기에는 언론마다 온통 우크라이나 전쟁 기사로 도배가 되더니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황에 둔감해지고 이제는 일부러 찾아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세상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가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우크라이나 국민들도 전쟁의 참화에 둔감해질 수 있을까? 과연 그들이 체감하고 있는 전쟁 피해의 크기는 어느 정도나 될까?


우리는 지척에 적을 두고 칠십 년 가까이 휴전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긴장상태로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 국민들이 그것을 긴장으로 여기고 있는지 의문이다. 이제는 국민 대부분이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회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 책의 저자 에릭 라슨은 맨해튼으로 이사하고 나서 9.11을 현장에서 겪은 이웃들로부터 당시 상황을 전해 들으며 그들이 겪은 고통이 자기가 생각한 것과 얼마나 다른지 깨닫는다. 그러면서 2차 대전 초기인 1940년과 1941년에 걸쳐 이루어진 독일의 런던 공습을 떠올린다.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기 위해 저자는 영국국립문서보관소, 처칠문서보관소, 미국의회도서관 등 수많은 기록보관소에서 찾은 자료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정부보고서, 처칠의 비서와 처칠의 딸이 남긴 일기까지 섭렵한다. <런던 공습, 전격하는 히틀러와 처칠의 도전>이라는 이 책의 부제가 나타내듯 저자는 전쟁지도자의 관점과 전략에 따라 전세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 밝히는 데 크게 비중을 둔다.


물론 그것도 후대의 사람들에게 교훈이 될 수 있고 때로는 반면교사가 될 수 있는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그런 큰 줄기를 따라가려고 했다. 하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당시 런던 시민들이 전쟁을 견뎌낸 상황에 감정이입이 되었고, 덕분에 피상적으로만 알았던 전쟁 실체와 전쟁 피해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공습의 두려움과 고통


히틀러가 1940년 9월 런던 중심부에 대규모 공습을 시작해 1941년 대공습을 끝낼 때까지 런던 시민 2만9천 명이 죽고 또 그만큼의 시민이 중상을 입는다. 하원 본회의장이 직격탄을 맞고, 웨스트민스터가 불타고, 빅벤에 쌓아놓은 모래주머니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하이드파크에 대전차참호를 구축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폭격기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영국 상공을 가득 메운다. 시민들은 거리를 걷거나 소풍을 나왔다가 머리 위로 치열하게 펼쳐지는 공중전과 공중전 끝에 추락하는 비행기를 지켜본다. 전투기와 폭격기가 상공에서 사활을 걸고 싸우는 모습을 스포츠 방송 중계하듯 내보내는 방송국도 등장한다. 독일 선전부는 영국 방송으로 위장해 공습 대피로를 안내한다는 핑계로 공습 사상자를 소름끼치도록 상세히 보도해 런던 시민들을 동요시킨다. 시민들은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달빛 때문에 자신들이 폭격기 목표물이 될까 두려워하며 보름달을 ‘폭격기의 달(bomber’s moon)’이라고 부른다. 야간 공습은 폭격 그 자체도 두렵지만 그 때문에 잠들지 못한 런던 시민을 이중고로 몰아넣는다. 수면 부족으로 인한 영향은 생각보다 심각해서 폭탄은 더 이상 겁나지 않고, 오히려 잠을 자지 못하는 게 더 겁난다는 사람마저 생겨난다. 공습 사이렌이 울리면 ‘사이렌 복통’이라는 위장장애를 호소하는 시민들이 늘어난다.


겨울은 비와 눈과 추위와 바람을 몰고 오고, 파편에 뚫린 지붕 사이로 비가 들이치고, 깨진 유리창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수리하고 싶어도 유리가 없고, 전기와 수도와 연료가 공급되지 않아 난방이 안 되고 씻기도 어렵다. 그래도 일을 해야 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야한다. 그런 중에 사람들을 가장 괴롭히는 건 등화관제였다. 자동차가 벽을 들이 받고 사람들은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고 서로 부딪친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춥고 습하고 더럽고 악취 나는 대피소에서 견뎌야 한다. 양동이 주변을 담요로 둘러서 화장실을 만들지만 그것도 터무니없이 적다.


영국은 포로와 첩보망을 통해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독일이 괴링의 지휘로 1940년 11월 15일 항공기 1,800대를 동원해 런던을 공습하는 <월광 소나타> 작전을 펼칠 것으로 판단한다. 영국은 소나타가 3악장 형식을 이루고 있는 점을 들어 작전이 3단계로 전개될 것으로 예상하고 이에 대한 반격으로 베를린을 공습하는 <찬물 Cold Water> 작전을 세운다. 당일 독일 항공기 한 무리가 런던 상공에 들어서지만 폭격은 하지 않고 빠져나간다. 사실 독일 항공기가 런던에 들어선 것은 코벤트리 공습을 감추기 위한 위장 전술이었다. 독일은 당일 저녁 8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 11시간 동안 무기 공장을 중심으로 한 코벤트리 지역에 고성능폭탄 500톤, 소이탄 2만9천발을 쏟아 붓는다. 코벤트리에서 150km나 떨어진 런던 상공에서도 화염이 보일 정도였다. 이에 맞서기 위해 영국 전투기가 121회나 출격하지만 독일의 작전에 속아 넘어가 겨우 두 차례만 교전한다. 그 사이 코벤트리는 통째로 사라져버린다. 여기서 ‘도시 파괴’를 의미하는 코벤트레이션(Coventration)이라는 신조어가 생긴다. 이 공습으로 민간인 568명이 사망하고 865명이 부상당하며, 건물은 2,294채가 소실되고 45,704채가 파손된다. 공습 후 괴벨스는 ‘보기 힘든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찬하고, 괴링은 이를 ‘역사적 승리’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독일 조종사들은 시민을 향한 직격탄 투하를 ‘선을 넘은 공격’으로 평가한다.


전쟁 가운데 이어진 일상


주민들 수십 명이 목숨을 잃고 밤이 되면 두려움도 같이 시작되지만 낮에는 이상할 정도로 평범한 생활이 이어진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박쥐> 공연이 이어지고, 피커딜리와 옥스퍼드 스트리트의 상점들은 여전히 손님이 가득하고, 하이드파크에는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한다. 매일 점심시간에 트라팔가 광장이 보이는 내셔널갤러리에서 콘서트가 열리는데, 관객들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방독면을 들고 바닥에 앉지만 홀은 늘 만원이다. 폭탄 세례는 더욱 거세지고 파괴되는 지역은 늘어나지만 밤이 주는 두려움은 조금씩 줄어든다. 소이탄 13만 개와 고성능폭탄 130톤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댄스파티는 계속된다. 그 중 한 발이 극장에 떨어져 색소폰 주자의 몸이 두 동강 나고 한 테이블에 있던 손님 여섯은 외상 흔적 없이 않은 채 죽는다. 어느 손님은 두 발이 날아가고, 시신을 들자 상체만 딸려온다.


전쟁의 트라우마를 진정시키기 위해 사람들은 차를 마셨다. 차는 전쟁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사람들은 공습이 계속되는 중에도, 산산조각이 난 건물에서 시신을 찾다 잠깐 쉴 때에도 차를 끓였다. 선전 영화에서 차를 끓이는 모습은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런던 공습은 성적 욕구도 풀어놓았다. 폭탄이 떨어지면 리비도가 치솟았다.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 젊은이들은 죽는다는 생각이 달갑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다른 누군가와 몸을 섞으려 했다. 섹스는 쾌락을 위한 것이었고, 돈이나 결혼 때문이 아니라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혼외정사도 흔한 일이 되었다. 불륜을 막아왔던 정상적인 장벽은 바람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전쟁지도자 처칠, 인간 처칠


1940년 5월 총리로 임명된 처칠은 독일의 공습을 받고 언제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영국 국민을 다독이고, 각료와 군을 지휘하고, 연합국의 협력을 얻어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감당해야 했다. 독일을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미국의 산업역량과 병력을 빌리는 것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처칠은 루즈벨트 대통령이 영국과 자신을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재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참전 결정을 내리는데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했다.


미국이 참전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그때까지 영국이 버티기 위해서는 프랑스가 독일공군의 발을 묶고 독일육군이 쳐들어올 모든 길목을 차단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처칠이 총리로 취임한 지 2주도 안 되어 프랑스군은 독일 기갑부대에 격파당하고 영국의 전략은 무산된다. 미국의 참전을 이끌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던 처칠로서는 이중삼중의 난관에 부딪친 것이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처칠은 항공기생산부를 신설하고 전투기 생산과 승무원 훈련, 항공기 공장 방어에 에너지를 집중시켰다. 히틀러에게 나흘 안에 영국을 굴복시키겠다고 약속한 괴링이 4주 동안 밤마다 런던과 그 밖의 지역을 공습했지만 처칠의 입지가 흔들린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처칠의 지도력이 영국 국민의 신뢰를 얻은 것이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처칠은 보고서 개선을 지시했다. 보고서를 짧고 선명하게, 단락으로 나눠 요점만 확실히 적되 한 페이지가 넘지 않도록 했고, 복잡한 내용이나 통계는 부록으로 처리하도록 했다. 수식어나 관용어구가 들어간 문장을 쓰지 못하도록 했다. 필요할 경우 보고서 대신 메모로 전달하도록 했다. 이로서 시간을 절약하고 명확한 사고를 키울 수 있도록 만들었다.


후세 전기 작가들은 그런 처칠을 성인에 가까운 인물로 그렸지만 사실 그는 혼자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엄청난 압박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솔직히 감당할 수도 없었다. 그는 독일에 항복해 이제는 적이 되어버린 프랑스 함대를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리고는 울었으며, 참담한 모습에 압도되어 남들이 보는 데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인 감정 따위에 개의치 않았고 직언해주는 조력자를 두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사람을 정보부장으로 두어 결정적인 오판을 저지른 괴링과 대비 되는 지점이다.


처칠은 전쟁을 지휘하는 중에도 낮잠 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잘 잤는데, 그런 습관은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만드는 능력이 되었고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처칠의 ‘특별한 재능’으로 여겼다.


언젠가 무기시험장을 다녀오던 처칠은 묵었던 호텔에 목욕물을 준비해달라고 했다. 투숙객으로서 당연한 요구였지만 당시는 공습으로 일대의 물이 끊어져 있던 상황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호텔 직원과 요리사, 투숙객, 군인과 심지어 부상자까지 나서서 뜨거운 물을 날라 욕조를 가득 채웠다. 기쁨으로 자신들의 지도자를 대접한 것이다. 처칠의 목욕습관은 낮잠습관만큼이나 유명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이야기는 미담으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물론 지금의 가치기준으로 재단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만.


1942년 12월 7일 일본이 전격적으로 진주만을 공습하자 루즈벨트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뒤이어 처칠도 선전포고를 한다. 처칠은 루즈벨트와 회담을 위해 백악관에 머문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루즈벨트가 예고 없이 처칠의 숙소를 찾았을 때 처칠은 목욕을 하기 위해 벌거벗은 채 한 손에는 술을 다른 한 손에는 시가를 들고 어깨에 수건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루즈벨트와 한 시간이나 대화를 나누었다. 혹자는 그 모습을 루즈벨트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한 고도의 전략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 눈에는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인사가 가진 기벽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전쟁


나는 그동안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불가피하게 전쟁을 해야 한다면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전쟁이 사람과 사회를 얼마나 파괴하는지 깨달아가면서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일어나서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이 바뀐 데에는 예전과 달리 전황이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것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니 지척에 적을 두고 산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했는데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고 살았다.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우크라이나 전황을 보면서,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전쟁의 공포와 고통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면서 적이 내 삶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 그렇기 때문에 적을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동안 곤경에 처하면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는 것으로 그 곤경을 극복하곤 했다. 하지만 실제로 최악의 경우와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갖게 되는 두려움과 그로 인한 고통은 언제나 생각했던 것보다 크고 파괴적이었다. 전쟁은 더 말해 무엇 할까. 우리에게는 이미 잊혀진 전쟁이 되어버렸지만 우크라이나 국민은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하루 속히 전쟁이 결말을 맞아서 그 나라 국민들이 일상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국민을 위기에서 건져낸 그에게 국민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는 칭송이 쏟아지자 처칠은 “나는 그들에게 용기를 준 적이 없다. 단지 그들의 용기를 하나로 묶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1945년 5월 8일 유럽전쟁은 종전을 맞고, 그로부터 불과 두 달 후 처칠은 선거에 패배해 실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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