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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n 03. 2022

상처가 될 줄 몰랐다는 말

무심히 저지른 폭력

김예원

웅진지식하우스

2021년 10월 7일


무엇인가 상황을 설명하는 글에서 무심코 ‘꿀 먹은 벙어리’라고 썼다. 다행히 잘못된 표현이라는 것을 바로 깨닫고는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로 고쳤다. 나름 ‘약자’에 대한 차별에 예민하다고 생각했는데도 아직 무심코 그런 잘못을 되풀이 할 만큼 차별의식은 일상의 삶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 김예원 변호사는 이 책에서 ‘장애인’은 ‘약자’가 아니라 ‘소수자’라고 말한다. 아울러 ‘소수자’를 ‘약자’라고 부르는 것이 폭력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 <상처가 될 줄 몰랐다>는 말이 이 책의 부제처럼 <무심히 저지른 폭력>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의식하지 못하면서 스스로를 ‘약자’에 대한 차별에 예민하다고 생각했으니 여간 큰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1인 장애인권법센터를 열고 10년 넘게 운영하면서 장애인을 비롯해 아동, 여성과 같이 사회적 소수자 위치에 있는 범죄 피해자를 무료로 대리하는 공익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장애인권법센터는 수임료를 낼 수 없는 의뢰인만 대리하는 비영리 법률사무소라서 수임료를 받지 않는다. 저자는 특히 발달장애나 정신적 장애를 가진 이들의 피해를 중점적으로 대리하는데, 그들은 대부분 수임료를 제대로 내기 어려운 처지이기도 하고 생각을 표현하거나 의사소통도 쉽지 않아 저자로서는 이중삼중의 수고를 하는 것이다. 국가에서 건당 50~100만 원 정도 지원을 받지만 그것으로는 본인의 급여는 물론 사무실을 꾸려가기도 어려워 강의, 집필, 연구용역, 자문을 수행해 비용을 충당한다.


저자는 소수자로서 범죄 피해를 입은 이들은 의사소통에 한계가 있거나 소수자가 갖기 쉬운 피해의식 때문에 쉽사리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한다고 말한다. 속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 일이 자기 삶의 중요한 부분을 도려내는 일이기도 하고, 범죄 피해를 다시 머릿속에서 꺼내 자신의 입으로 이야기하고 그 과정에서 당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저자가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건 은유 작가가 추천의 글에서 말한 것처럼 “변호사가 듣는 직업이라면 김예원 변호사는 온몸이 귀가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온 몸이 귀가 되어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래서 저자는 용기를 내어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는 그들에게 오히려 고마워한다.


‘소수자’는 ‘약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저자는 ‘정상’이라는 말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 요즘은 그런 표현을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 과거에는 조손 가정이나 한 부모 가정을 ‘결손가정’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부모와 함께 사는 가정을 ‘정상가정’으로 여기고 그와 다른 모습의 가정을 ‘정상에 미치지 못한 모자란 가정’으로 여긴 것이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부모와 두 자녀로 이루어진 ‘4인 가구’를 가구 표준으로 삼아왔다. 작년인가 가구현황 통계를 보니 4인 가구는 전체의 30%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 모른다.


저자는 소수자를 약자로 여기고 그들에게 호혜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을 몹시 불쾌하게 생각한다. 사회적 약자니까 도와주겠다거나 장애인이 정상인보다 잘한다는 말은 누구나 어떤 모습이든 ‘그냥 나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냥 내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내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보고 사회적 약자이니 도와준다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너를 보고 있으면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저절로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말을 듣는다면 선뜻 고마운 마음이 생길까. 장애인은 소수자일 뿐 약자라고 불릴 이유가 없다.”


저자는 ‘아동학대’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이로 인한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여기서 ‘아동학대’라는 말만 떼어놓고 보면 두 말 할 것 없는 범죄이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이 어디까지가 ‘훈육’이고 어디서부터 ‘체벌’인지 경계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체벌을 훈육의 방편으로 생각하고 살아왔다. 물론 체벌이 일정 정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한 체벌을 학대라고 여기는 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 역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저자는 2021년 민법 개정으로 자녀에 대한 부모의 징계권이 삭제됨에 따라 세계에서 62번째로 체벌금지국가가 되었다고 설명하면서 체벌은 어떤 모습이라도 폭력이라고 선언한다. 훈육은 아이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 올바르게 성장하는 것을 돕는 것이기 때문에 그 방식이 아이의 심신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이한테 한 행동이 학대인줄 몰랐다는 부모들이 많다. 그것은 단지 변명이 아니라 어느 정도 사실일지도 모른다. 훈육과 체벌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저자는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도 아이에게 똑같이 행동하는지 살펴보라고 말한다. 만약 다른 사람이 볼 때 행동을 멈춘다던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그런 행동을 한다면 학대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모든 면에서 어른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런 아이를 학대하는 것은 비열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많은 이들이 체벌을 훈육의 한 형태로 생각하다 보니 체벌에서 비롯된 아동학대는 당연히 친부모가 아닌 계부모가 저지르는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계부나 계모가 아동을 학대한 사건이 연일 보도되는 것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통계에 따르면 아동학대의 대부분은 놀랍게도 친부모에 의해 저질러진다. 아동학대의 가해자는 친부가 42%, 친모가 30%이며 계부는 2%, 계모는 3%에 지나지 않는다. 배운 사람이나 잘 사는 사람, 혹은 평범한 사람은 학대할 리가 없다는 ‘가해자다움’에 대한 편견으로 학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동학대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이가 자주 다쳤는데 상처와 정황설명이 맞지 않던지 혹은 부자연스럽던지, 등이나 몸의 안쪽이나 머리카락 안쪽과 같이 다치기 힘든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쳤을 경우 아동학대를 의심해봐야 한다. 아이가 작은 소리나 손짓에도 크게 놀라거나, 명랑하던 아이가 침울해진다거나, 사소한 일에 격분하거나, 큰일에도 아무런 반응 없이 무기력한 경우 정서학대를 의심해봐야 한다. 책을 읽으라면 꼼짝 않고 몇 시간이고 읽거나 자기가 한 일이 아닌데도 과도하게 눈치를 보며 자기책임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면 예의 바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런 경우에는 일상적인 학대에 노출되어 있는지 의심해봐야 한다.”


간혹 장애아동을 돌보다 힘에 겨워 살해했다는 부모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도 자식인데 오죽 힘이 들었으면 그랬을까 싶은 동정이 간다. 실제로 판결에서도 그런 이유로 집행유예가 선고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에 대해 격렬하게 반발한다. 장애아동을 죽이기까지 수많은 학대가 있었을 것이며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 저자가 ‘우범소년’이라는 이유로 보호관찰이나 구금과 같은 처분의 대상이 되는 것이 매우 불합리하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잠시 멈춰 섰다. 중학교 2학년 때 가족이 아버지 직장을 따라 파주로 이사 가서 자취를 했던 나는 한동안 문제아로 낙인이 찍혀 고달픈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자주 지각하고 공부시간에 존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연탄불을 제대로 갈지 못해 밥 먹듯 불을 꺼뜨리고 그래서 밤새 추위에 떠느라 잠을 제대로 못자 그랬던 것인데, 그런 사정은 묻지도 않고 결과만으로 매를 맞고 그것도 모자라 낙인을 안고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게 억울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학교에 늦고 공부시간에 졸았으니 매 맞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돌아보면 나는 ‘문제 상황’ 때문에 피해를 입은 피해자인데 도움은커녕 오히려 ‘문제아’로 몰렸으니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저자는 “아직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행실이 마뜩찮아 조만간 죄를 저지를 것 같아 보인다는 ‘우범소년’ 제도가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지 모른다”고 지적하면서 “만약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주위에 불안감을 조성하거나, 가출하거나, 술 마시고 소란을 피우는 아이가 있다면 죄를 저지를 우려가 있다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기를 온몸으로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며 어른들이 생각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 내 스스로 겪은 일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교회학교에서 말썽장이들과 시간을 보내야했던 경험으로 봐서도 정말 그렇다. 어른이 생각을 바꾸면 아이가 변한다.


책을 덮으며 저자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궁금했다. 아마 이런 세상이지 않을까 싶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외모든 내면이든 혹은 다른 어떤 것이든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약한 부분이 있다. 타인의 약한 부분을 혐오하지 말고 서로의 약함을 인정하고 같이 손잡고 가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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