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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n 04. 2022

일은 핑계고 술 마시러 왔는데요

술의 지리학

탁재형

시공사

2020년 6월 11일


사전은 ‘애주가’를 ‘술을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한다. ‘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만큼 되바라지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은근한 맛이 있다. 술을 즐기고 좋아하니 이런 뜻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애주가를 자처할 만하다.


예전에는 술 마실 때 근사한 술 이야기 하나쯤 풀어놔야 대접 받았다. 이태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 중 한 편을 읊어대거나, 양주동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나 수주 변영로의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 중 한 토막을 맛깔나게 펼치거나, 자기 주량이 지훈 조동탁의 주도유단(酒道有段) 중 어디쯤 해당하는지 정도는 풀 줄 알아야 말석에서 퇴주잔 받아먹는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이처럼 술에 관한 이야기라면 찾아서라도 읽었지만, 생각해보니 술 자체에 대해 이야기한 책은 읽어본 기억이 없다. 어딘가 출간되기는 했겠는데, 아마 내가 과문한 탓일 것이다. ‘술 마시는 이야기’가 아닌 ‘술 이야기’를 하는 책이 나왔다고 했다. 심각한 주제에서 잠시 벗어나 쉬어갈 마음도 있었고 저자가 풀어놓은 술 종류 중에 내가 마셔본 게 얼마나 될까 싶은 궁금증이 발동하기도 했다.


해외 관련 다큐멘터리 PD이자 여행 팟캐스트 진행자인 저자 탁재형은 이 책에서 해외 취재 중에 보고 듣고 즐긴 세계 각지의 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해외 다큐멘터리 제작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짐작은 가는데, 그래도 저자처럼 온 세상의 술을 맛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그 고단함은 씻고도 남음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는 시종일관 다큐멘터리 PD 특유의 통찰력과 해박한 지식으로 술의 재료와 주조 과정, 술 이름에 담긴 의미를 맛깔나게 풀어놓는다.


저자는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경험한 삼십 여 종의 술 이야기를 선보인다. 설마 반 정도는 경험했겠지 싶었는데 목차를 살펴보니 채 열 손가락에도 모자란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참 넓고 내가 경험한 것은 빙산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다 겪어본 사람처럼 지나온 시간이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나는 독주가 편하고 좋다. 입안에서 감도는 향기가 좋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것보다는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갈 때 느끼는 짜릿함은 도무지 포기하기 어렵다. 때로 반주 삼아 소주도 마시고 땀 흘리고 난 후에 막걸리도 마시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고 작정하고 마셔도 될 자리라면 독주를 고른다.


독주의 대명사라고 할 만 한 술로는 보드카를 꼽을 수 있다. 처음 보드카를 마셨을 때 무색 무미 무취해서 의아했다. 보드카라고 하면 당연히 러시아를 떠올리지만 이름난 보드카 중에서는 러시아 것을 별로 보지 못했다. 술이 귀하디귀한 사우디에서 ‘앱솔루트’라는 보드카를 선물 받은 일이 있는데, 스웨덴 산이라고 했다. 목을 넘길 때 짜릿함은 여느 독주와 다르지 않지만 무미 무취해서 손이 가지 않아 놔뒀다가 서울로 돌아오기 직전에 술 좋아하는 후배에게 건네줬다.


하지만 저자는 무미 무취야말로 보드카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말한다. “아무 맛도 없기 때문에 매 순간 마시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드카야 말로 ‘마시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술’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취향이야 워낙 천차만별이기는 하지만 저자가 여태 다른 곳에서 들어보지 못했던 표현으로 보드카를 추켜세우니 언제 한 번 도전해봄직 하다. 저자는 보드카는 의심의 여지없이 러시아 술이지만 냉전 당시 소련이 군수산업과 중공업에 집중해 투자하는 바람에 주류산업에 황폐화 되었고, 그 결과 스웨덴 앱솔루트, 미국 스미노프, 핀란드 핀란디아가 보드카의 대표적인 브랜드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독주 중에서 내가 가장 즐겨 마시는 술로는 중국 백주를 꼽는다. 우선 값이 싸고 손쉽게 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특유의 향이 코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는 중국에서 온 독주를 모두 빼갈이라고 불렀다. 언제부턴가 그 이름은 없어지고 고량주라는 이름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 독주를 하나로 묶어 백주라고 하고, 백주는 수수에 쌀이나 조나 옥수수를 더해 빚는데 그 중 수수만으로 빚은 백주가 고량주이고, 빼갈은 허난성(河南城)에서 만든 도수가 높은 백주를 일컫는 말이다.


사십대 중반에 과로로 쓰러져 본의 아니게 십 년쯤 술을 멀리한 일이 있었다. 술을 멀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발주처 손님들을 만날 때마다 양해를 구하는 게 영 구차스러웠다. 어느 날인가 설명하기조차 어려운 자리가 생겼다. 그저 입에만 대고 내려놓으려는데 그것만으로도 도무지 물릴 수 없는 맛과 향기가 느껴져 그만 주는 대로 넙죽 받아마셨다. 꼭 활명수 같이 생긴 병에 담긴 술인데, 이과두주라고 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가장 자주 찾는 술이 되었다. 서울에서 팔리는 홍성 이과두주는 1949년 중국 정부가 북경에 있는 12개 양조장을 통합해 싼 값에 신뢰할 수 있는 품질의 술로 개발한 것이라고 한다.


겨울철 서유럽 노천카페에서 흔하게 마시는 글뤼바인(Glühwein)이라는 술이 있다. 와인에 오렌지, 레몬, 계피, 정향을 섞어 약한 불에서 끓인 것인데, 한 잔 마시고 나면 추위로 얼었던 속이 풀린다. 저자는 술만 이야기했지만 사실 글뤼바인은 독일 감자전인 라이베쿠헨(Reibekuchen)과 함께 마셔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으깬 감자에 양파를 섞어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로 기름에 튀겨낸다. 감자로 만들었으니 감자전이라고는 하지만 모양이나 크기는 꼭 갓 부쳐낸 빈대떡 같다. 글뤼바인은 길거리에서 추위에 손을 호호 불면서 마셔야 하는 술이지 술집에 자리 잡고 마실 술은 아니다.


십 년 넘게 살았던 사우디는 이슬람 종주국답게 술을 철저하게 금한다. 술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추방의 사유가 된다. 그렇다고 술을 안 마시는 건 아니다. 저자가 “1920년대 미국의 금주법은 7천 년 넘게 술을 마셔온 인간의 습관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오판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듯, 막는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금주법으로 인해 오히려 술이 희귀품이 되어 소비를 부채질했고, 공업용 알코올을 섞어 만든 정체불명의 술이 유통되어 이를 마시고 목숨을 잃은 사람이 속출했다는데, 이런 모습은 사우디도 다르지 않다. 공업용 알코올을 섞은 건 아니지만 각자의 독특한 방식으로 만든 정체불명의 술을 묶어서 ‘싸딕’(친구라는 아랍어)이라고 부른다. 그것 말고도 술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사방에 널렸다.


하지만 사우디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술로 맥주가 꼽힌다. 한국에서 3~4만원이면 살 수 있는 위스키 한 병이 사우디에서는 40만원이 넘는다. 술값이 이렇게 비싼 것은 위험 때문이지 술의 도수 때문이 아니다. 양주 한 병이나 맥주 한 병을 밀반입할 때 감당해야 할 리스크는 다르지 않은데, 양주 한 병에 수십만 원 한다고 맥주 한 병에 같은 값을 부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자식이 사는 독일에 갈 때면 공항에 내리자마자 맥주 한 잔 들이키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어느 해인가는 맥주 스무 가지를 마시고 오겠다고 작정을 하고, 기어코 마지막 날 스무 번째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시간만 있었다면 스무 번째가 아니라 이백 번째도 마셨을 것이다. 저자는 독일에 맥주 회사가 1,300개가 넘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벨기에 시메이 맥주는 1,600종에 이르는데 이것도 예전에 비해 반 토막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니 이백 번째 맥주를 마시는 일이 뭐 대수겠는가.


저자는 맥주는 소주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사랑받는 술인데 과연 그 사랑에 보답할 만큼 맛있냐는 질문엔 쉽게 대답하기 힘들다고 불평한다. 우리나라 맥주가 밍밍한(watery) 것은 독일 맥주가 맥아 100%를 원료로 사용하며 일본은 66.7% 이상을 사용하는데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10%만 넘으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맥아보다 값싼 옥수수나 쌀을 사용해 맛이 그렇게 시원치 않다는 것이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에 김치 맛없는 건 못 참는 사람들이 왜 맛없는 맥주는 참는지 모르겠다는 기사가 났더라마는, 보지 않았으니 모르는 일이고. 독일 맥주의 또 하나 특징은 인공 첨가물을 넣지 않아 유효기간이 짧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맥주 공장 굴뚝 그림자가 닿는 범위 안에서 마셔야 맥주의 제 맛을 즐길 수 있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한국 맥주가 맛없다고 비아냥대는 이들은 자기들을 한 순간에 입 다물게 할 수 있는 또 다른 맥주의 세계가 우리에게 있다는 걸 모른다. “이미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치맥에 더해 신록 속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즐기는 낮맥, 양화대교 아래에서 한강 야경을 보며 마시는 강맥, 집에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 편의점 앞에서 한 캔만 더 따고 보는 편맥”이 그것이다.


저자가 무려 삼십여 종의 술을 언급했지만 그 중 위스키는 스쳐지나가듯 몇 마디 언급한 것이 전부이다. 위스키라면 나도 몇 마디쯤 보탤 수 있는데 몹시 아쉽다. 이제는 폐허가 된 레바논 베이루트의 산속 마을에서 마셨던 ‘아락’은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술인데 저자는 그것도 대충 언급하고 말았다. 우리 술 중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죽력고’를 내세우고 있다. 허구 많은 술 중 다 빼놓고 왜 ‘죽력고’인지 모르겠다. 물론 저자 마음이기는 하지만.


저자는 술은 사람을 닮고 사람은 술을 닮는다고 말한다. 갑자기 저자는 무슨 술을 마시는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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