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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n 10. 2022

비행산수

펜화로 그린 우리 산하

안충기

동아시아

2021년 4월 26일


오랫동안 중앙일보에 <비행산수>가 연재되는 걸 흥미 있게 읽었다. 전국 곳곳을 오로지 펜 하나로 그려내고 거기에 각 고장의 사연을 곁들인 것이었다. 제목이 그렇듯 착륙을 앞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었다. 그림이 주연이다 보니 읽었다기보다는 감상했다는 것이 더 적절한 말이겠다. 그리는데 품이 만만치 않게 들었겠다 싶기는 했지만 모니터로는 제대로 그림을 볼 수 없어서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작년에 책으로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느 책 두 배 크기가 되어서 누구한테 사다 달라고 하기도 어려웠고 책 성격으로 봐서 전자책으로 나올 것 같지도 않아 서울에 오면 챙겨보리라 생각했다.


최근에 저자가 쓴 <진진, 왕육성입니다> 북콘서트에서 저자를 만났다. <비행산수>를 들고 가서 함께 서명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기엔 책이 너무 컸다. 책장에 꽂기도 어렵고 그 큰 책을 어디에 올려놓기도 마땅치 않아 주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저자가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을 볼 때마다 숙제 안 하고 선생님 만난 듯했다. 우선 읽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도서관에서 대출을 받아 이틀째 꼼꼼히 살피고 있다. 지도도 보고 항공사진 하고도 비교해서 보려니 열람실에서 펼쳐놓고 살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림을 살피다 서울 편에 들어가 무려 1미터가 넘는 <강북전도>를 보고는 잠시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명륜동에서 태어나 평생 강북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눈 감고도 훤한 곳이라 그림을 살펴보는 데 삼십 분으로도 모자랐다. 여느 그림이 그 고장의 이야기를 하는데 반해 이 그림은 독특하게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을 적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그림 하나가 완성되기까지 무려 4년 6개월이 걸렸단다. 이어서 책 오른편에 드문드문 적어놓은 뒷이야기로 시선이 옮아가자 그가 이 지난한 작업에 쏟은 노력을 그저 연재물 하나, 책 하나로 여기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종이와 펜, 그리고 먹물만으로 이 모든 그림을 그렸다. 펜은 열 개만 있으면 마르고 닳도록 쓸 수 있다고 했으니 비용이라고 해봐야 일 년에 먹물 몇 통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결국 저자는 이 모든 작업을 오로지 몸으로 감당했다는 말이다. 오랜 시간 책상에 엎드려 그리다 보니 몸의 균형이 무너지는 건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렇게 균형이 무너진 몸으로 이명의 고통과 싸우며 8시간을 작업해 채울 수 있는 분량은 고작 7제곱센티미터였다. 따져보니 엄지손톱 두 개 넓이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가로 76센티미터 세로 56센티미터 백지를 펴면 막막했다고 말한다. 지름길도 없고 요행수도 없으니 그저 하나하나 빈 칸을 채워나가는 수밖에 없었다는 저자는 그래서 이 그림은 반은 엉덩이의 힘으로 반은 상상력으로 그린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헤아릴 수 없는 발품과 모든 경로를 통해 수집한 자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것뿐이었다면 저자의 이 모든 작업은 노동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그림으로 표현해 낼 곳곳을 다니며 만난 사람들과 사연들을 작업과정에 녹여냄으로서 그림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문득 오늘 장례를 치른 송해 선생의 일화가 떠오른다. 수십 년 ‘전국노래자랑’을 이끌어 오신 송 선생은 녹화 하루 전에 공연할 곳에 내려가 장터에서, 국밥집에서, 때로는 목욕탕에서 동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 생생한 느낌을 방송에 담아냈다고 한다. 그런 노력을 통해 작품에 숨결을 불어넣었고 덕분에 프로그램이 그만큼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자의 작업도 그와 다르지 않다.


저자는 작업 과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연필로 뼈대를 그린다. 산은 척추이고 강과 내는 동맥이고 실핏줄이다. 이어 그 사이를 지나가는 크고 작은 길을 그린다.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는다. 뼈를 추리고 살을 발라낸다.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키운다. 그런 다음 건물을 하나씩 그려가며 살을 붙인다. 벽돌을 쌓는 일과 같다. 그리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하나하나 짚어가며 확인한다.”


마치 벽돌을 쌓듯이, 놀랍게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렸다는 말이다. 그랬으니 <강북전도>를 대충 살피는 데에만도 삼십 분으로도 모자랐다는 게 아니냐.


회사 책상에서 틈틈이 그리고, 출근 전에도 퇴근 뒤에도 그리고, 때로 하루 열두 시간도 넘게 그리고, 밤을 새우며 그리기도 한 저자는 두어 시간 꼼짝 않고 그리면 손가락이 굳어버렸고, 그래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그리지만 나중에는 10분도 펜을 들지 못했다고 회고한다.


그렇게 그린 <강북전도>의 절반인 <강북반도>는 세종문화회관 개관 40돌 기념전으로 내로라하는 작가들 그림과 함께 전시되었는데, 포스터 표지작으로 뽑혀 전시장 입구에 대문짝만하게 걸렸다고 했다. 지금은 미슐랭 스타를 받은 중식당 ‘진진’에 걸려 있단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가로 250.5센티미터, 세로 73.5센티미터인 <강북전도>의 절반인 <강북반도>가 진진에 걸려 있으면 <강북전도>가 온전히 하나로 존재하지 않고 나뉘었다는 말인가? 조만간 ‘진진’의 회원이 되어서 미슐랭 스타 셰프의 음식을 맛볼 참이니 그때 가서 확인하리라.


중앙일보에 실린 그림과 비교하다 보니 시즌2 첫 번째 그림인 <백악에서 관악까지>는 책에 실리지 않았고, 두 번째 그림인 <부산; 해운대에서 태종대까지>는 책에 실린 그림과 다르다. 후에 수정한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방향이 달라 그렇게 보기 어렵다. 책에 실린 그림에는 <마산, 창원, 진해>에는 공단이 들어섰고, 논은 구획정리가 되었고, 곳곳에 비행기가 출몰하기 시작했다. 책은 신문만큼 마감시간의 제약이 크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제 평생의 업을 정리했으니 여의도에 핀 벚꽃, 광양에 익어가는 매실, 고궁에 깔린 은행잎, 눈 내리는 대청봉도 느껴가며 사시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덕담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바다 가는 길’에서 군산, 포항은 물론 미항의 대명사인 통영도 빠졌고, ‘산과 강과 들’에서 천안, 공주, 청주, 익산, 원주도 빠졌다. 거기에 통일이라도 되면 백세수를 누려도 될까 말까 하니 건강에 더욱 유의하셔야겠다.


이렇게 큰 책은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내용에 1미터가 넘는 <강북전도>를 우겨넣는 일은 정말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겠다. 출판사에서 수지타산을 생각했다면 시작하기 어려웠을 작업이 아닐까 싶다. 조만간 이사할 텐데, 짐 정리 하고 책 잘 보이게 놔둘 곳을 만든 후에 책 사들고 저자를 찾아가리라. 대문짝만하게 서명 받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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