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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n 14. 2022

한국경제사의 재해석

산업화의 실상, 그리고 명암

김두얼

해남

2017년 8월 18일


나는 5.16이 일어나던 해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해 5월에 머리맡에 라디오를 켜놓고 흥분해서 혁명방송을 듣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다. 가난을 피해 무작정 상경해 갖은 고생을 하던 아버지로서는 그렇게라도 세상이 한 번 뒤집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혁명이 일어났어도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고도 몇 년이 더 지나서야 겨우 가난을 면할 수 있었고 70년대 들어서면서 조금씩 형편이 피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우리 집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웃들 모두 형편이 나아지면서 도시 빈민의 삶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몇 년 후 우리가 살던 무허가촌은 모두 헐리고 공원이 되었다.


이처럼 우리 가족이나 이웃들 모두 가난의 굴레를 벗어난 것은 각자가 기울인 피나는 노력의 결과이겠지만 정부가 주도한 산업화 정책의 효과가 사회 전반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도 거기에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세대는 5.16 혁명으로 인한 산업화의 대표적인 수혜자인 셈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산업화의 기틀은 1960년대에 마련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전 정부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수입대체를 목적으로 하는 산업정책 때문에 경제성장을 이루지 못하고 침체에 빠졌고, 그것을 혁명 세력이 수출지향적인 경제모델을 성공시킴으로 탈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1965년부터 고도성장에 접어들어 오랫동안 이 기조를 유지해왔다.


그렇다고 고도성장 이전의 경제성장률이 형편없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성장률은 평균 5.3%에 달했다. 물론 고도성장기의 성장률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숫자이기는 하다. 그러나 경제사학자인 저자는 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고도성장의 기틀이 이때 마련된 것일 수 있다는 점과 지난 2백여 년 동안 세계 각국의 성장률을 고려할 때 5.3%라는 성장률은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1950년대를 침체기로 규정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여러 지표를 해석해 그동안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1960년대에 산업화가 시작되었다는데 이의를 제기하고 다음과 같은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GDP나 전력생산과 같은 지표로 보아 50년대 중후반에 이미 경제성장이 진행되고 있었다. 산업생산지수나 기업ㆍ공장근로자 수 같은 일련의 지표가 50년대에도 60년대 초반과 같을 정도로 크게 증가했고, 다른 나라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정부의 산업무역 정책에 따라 50년대 말부터 해외시장 진출을 시도하기 시작하면서 기업 성장과 산업화, 경제발전이 가속화되었다. 휴전 직후 한국의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50년대에 대규모 원조와 산업ㆍ무역정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한국 경제가 근대 경제성장으로 접어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거나 아예 진입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당시 극심한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추진한 수출 정책은 60년대와 70년대의 수출 관련 정책과 제도의 골간을 이루었다.”


혁명 세력이 이전 정권의 무능으로 빈곤해진 국가에서 탈피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빈곤을 탈피한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전의 한국 경제가 불모의 땅이었던 것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5.16으로 시작된 박정희 정부는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집권하는 동안 저지른 여러 비민주적인 처사로 인해 그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비민주적인 처사는 외면한 채 업적만 칭송하는 극단적인 집단이 나타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고 있다. 박정희 정부의 비민주적인, 아니 독재적인 모습은 대학 시절에 최악을 달렸다. 그러다 보니 산업화의 공적을 입에 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데모와 휴교령으로 시작된 내 대학 시절은 대통령 시해로 막을 내렸다.


나는 산업화의 혜택을 입고 자랐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그것을 거론하는 것이 금기가 되었고, 그러다 보니 산업화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글조차 찾아보기 어려웠고, 박정희 정부의 정책이 아니었더라도 충분히 그런 성장을 이루어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난무했다. 그러던 중에 팟캐스트 방송에서 저자를 만났다. 경제사학자인 저자가 풀어주는 60년대 이후의 경제발전 역사를 들으며 비로소 60년대와 70년대의 경제발전이 우연이거나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은 국가 중에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고 원조를 받는 데서 벗어나 원조를 제공하게 된 유일한 국가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6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른 경제성장이 자리 잡고 있다. 저자는 당시의 산업화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두 가지 시각이 상존한다고 설명한다. 하나는 산업화로 인해 단기적으로는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경제가 안정을 이루었으며, 장기적으로는 자본과 기술이 갖춰져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산업화가 미국 이익에 부합되게 이루어져 경제자립을 저해하고 불평등이 확대되었으며 그 때문에 경제구조가 왜곡되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위에서 언급한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상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경제가 안정을 이룬 것, 자본과 기술이 갖춰져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것도 사실이고, 불평등이 확대되고 경제구조가 왜곡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중 하나만 옳고 다른 하나는 틀렸다고 주장하는 게 아닐까 한다.


아무튼 저자는 이 책에서 경제사학자로서 우리 경제발전에 관한 지표를 확인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60년대와 70년대에 이루어진 산업화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본다.


“고전적 경제성장 모델인 솔로우 모형에 따르면 저개발국가에서 충분한 자본투자가 이루어진다면 해당 경제를 정상상태(steady state)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이러한 이론에 근거해 선진국과 국제기구들은 개발도상국에 엄청난 공적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opment Aid)를 제공하면서 이것이 경제발전을 촉진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지난 50년간 개발도상국에 공여된 막대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는 한국을 비롯한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극히 드물다.”


“학자들은 막대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개발도상국 대부분이 경제발전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그동안에 공여된 자금이 충분하지 못했거나 공여된 자금이 효율적으로 집행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판단한다. 그렇다면 한국이 극히 예외적으로 경제발전에 성공한 것은 공여된 자금이 다른 개발도상국에 비해 월등했거나 공여된 자금이 효율적으로 집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에 공여한 자금을 비교하기 위해 OECD의 공적개발원조 집행내용, 한국은행의 외국원조수입 통계와 국제수지 자료, 미국원조청(USAID) 해외차관 및 증여 통계를 검토한 결과 1945년부터 1999년까지 우리나라가 받은 공적개발원조 총액은 약 77억 달러이고, 그 중 휴전이 이루어진 1953년부터 1999년까지는 69억 달러(2010년 기준 실질액 391억 달러)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1960년대 이후 개발도상국이 받은 원조액과 비교해보면 총액으로는 전체 134개국 중에서 20위권에 해당되지만 인구를 감안하면 70위권으로 중간 이하이니 결코 다른 개발도상국에 비해 많은 자금을 공여 받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다른 개발도상국보다 더 많은 자금을 공여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경제성장에 성공한 것은 공여된 자금이 부정부패로 인해 누출되지 않도록 적절히 통제하고 자금을 효율적으로 집행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선진국의 원조가 큰 힘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규모가 중간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에 성공한 것은 자금을 효율적으로 집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원조 자금이 부정부패로 누출되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있겠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닐까.


그러면 원조 자금이 효율적으로 집행되도록 만든 장치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원조 자금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게 만든 원동력 중 하나로 1965년부터 매월 대통령이 주재한 수출진흥확대회의를 꼽는다. 이는 1962년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수출 관련 부처 협의체인 수출진흥위원회에서 확대 개편된 것이다.


“확대회의는 수출 제일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정책 체계의 제일 상위에 위치하는 최고기구로서 수출현황ㆍ실적ㆍ정책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이 중심이 되는 회의체였다. 확대회의는 협의나 의결의 수단이 아니었고, 대통령의 지시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문제를 해결하라는 지시였고 구체적인 내용은 실무자들이 협의한 후 다음 회의에서 해결된 결과를 보고하는 방식이었다. 대통령이 매번 참석했기 때문에 보고된 내용을 실제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래서 확대회의가 형식에 그치지 않고 업무수행의 실질적인 동력이 되었다. 또 하나 특징은 대통령이 계획 달성 여부를 독려할 뿐 구체적인 정책에 개입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확대회의가 목표를 정하거나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최선의 방안을 강구하고 집행하는 기구였다고 언급하면서 이를 관료제가 제대로 작동할 때 얻을 수 있는 성취의 표본적인 사례로 평가한다. 또한 정부 정책의 우선순위가 명확히 제시되고 통치권자가 이것을 자신의 언행을 통해 국민들과 정책 집행자들에게 정확히 납득시킬 때 체계적인 관료기구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모범사례라고 평가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식민지 시기부터 시작해 1950년대, 그리고 고도성장기의 한국 경제사를 정리하고 있다. 식민지 시기의 남성 행려사망자 신장 자료를 분석해 식민지 시기 최하층민의 생활수준을 평가하고, 조선총독부 통계를 분석해 노동생산성을 추계해 식민지 시기의 공업화 상황을 들여다보고, 저자 자신이 몸 담았던 한국개발연구원(KDI)가 한국 경제발전 과정에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 서술한다. 내게는 경제사가 어떤 학문인지, 비단 경제사 뿐 아니라 역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깨닫게 만든 좋은 교과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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