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치사상 연구
전인권
이학사
2006년 8월 1일
5.16 일어나기 두 달 전에 국민학교에 입학했고 10.26 일어나던 해는 대학 졸업반이었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대통령이 누구인지 알았을 리 없으니 성인이 되도록 대통령은 박정희가 하는 건줄 알았다. 그 사이에 더 가난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하던 살림이 조금씩 나아졌다. 중학교 갈 때는 중학교 학비 낼만큼, 고등학교 갈 때는 고등학교 갈만큼 살림이 나아졌고, 급기야는 가정 형편상 꿈으로 여겼던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를 독재자라고 부르는데 거리낌도 없고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마저도 독재를 인정하고 있지만, 당시 우리는 가정 형편이 나아진 것이 모두 대통령 덕분인 줄 알고 살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빈곤을 탈출하고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의 빛에만 머무르던 내 시선이 그의 그림자에까지 확대된 것이다.
박정희 전기는 어린이용부터 소설까지 상당히 많이 발간되었지만 대부분은 그를 일방적으로 치켜세우거나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이 쓴 것이어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게다가 긍정적인 전기든 부정적인 전기든 그 논지가 이미 알려진 것이다 보니 읽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얼마 전 <평전>이라는 형태의 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읽을 만한 평전을 찾던 중에 이 책을 만났다. 젊은 정치학자가 박정희 연구를 필생의 업으로 삼고 박정희의 정치사상과 행동을 정치 전기학적 방법으로 조명한 최초의 작업이라는 소개 글에 관심이 끌렸다. 1957년생인 저자는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박정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마흔여덟 살이던 2005년 암으로 타계하였다. 김대중과 이중섭에 대한 평전을 썼다. 이 책을 읽고 김대중에 대한 책을 읽어볼까 생각했지만 대통령 취임 이전에 발간된 것이라 김대중을 온전히 담지는 못했을 것이어서 생각을 접었다.
저자는 처음부터 박정희가 가난으로 얻은 두 가지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 그것이 미친 영향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가난을 통해 겪은 ‘배고픔’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으로 인해 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얻은 ‘수치심’이었다. 실제로 박정희의 저서 <나의 소년시절>에 먹는 이야기가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 그런 해석을 뒷받침 한다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그는 왕족을 자임하는 이승만 대통령이나 권문세가의 후예인 윤보선 대통령과는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저자는 박정희에게 있어서 ‘배고픔’이 경제적 물질적 외상이었다면 ‘수치심’은 정신적 정치적 외상이었고, 여기에서 탈피하려는 각오와 그의 권력의지가 어우러진 것이 5.16으로 나타났으며, 훗날 ‘배고픔’은 ‘경제개발’로, ‘수치심’은 ‘자주자립’으로 이어졌다고 해석한다.
저자는 박정희는 가난하고 가부장적인 가정의 막내로 자라나면서 ‘심리적 고아’가 되었고, 이런 상태가 가족과 단절로 이어져 가족을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짐으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판단한다. 그러다 보니 상하관계에는 익숙했지만 횡적인 관계에는 미숙해 상호 신뢰하고 존중하는 가까운 친구가 없었으며 협력해서 공동의 목표를 달성한다는 개념도 박약했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훗날 부인 육영수를 만나면서 이런 고아 의식이 부분적으로 완화되었는데, 그러니 육영수 사후 정신적 위기를 맞고 몰락으로 이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하여 좌익 활동을 한 전력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되기 직전에 백선엽의 선처로 풀려났다. 이후 육군본부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일하다가 6.25가 일어나면서 육군에 복귀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박정희가 풀려난 것이 백선엽의 선처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2022.07.16 조선일보에서 백선엽의 장녀 백남희가 이를 확인하였다.) 박정희가 남로당 전력이라는 결정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원만한 군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보직을 맡겨도 임무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평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체제정비가 필요한 신설부대 지휘관으로 여러 번 투입되었는데, 그의 뛰어난 능력과 계몽적 태도와 목표달성을 위한 합리적 행동방식과 아울러 공평과 청렴이 인정받은 것이다.
나는 그동안 5.16을 치밀하게 계획된 군사작전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5.16이 반공개적으로 추진된 쿠데타라고 말한다. 이미 여러 정보 채널에 노출되어 있었고 불과 3500명 미만의 소규모 부대가 출동했기 때문에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쿠데타였지만 여러 상황적 요인에 의해 성공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밝힌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박정희는 1961년 4월 10일 4.19 1주년을 계기로 쿠데타 계획의 개요를 쿠데타 진압의 총책임자인 장도영에게 설명했으며, 이 계획을 이한림 1군 사령관도 알고 있었고, 겸찰과 경찰의 수사망에도 올라 있었으며, 미군도 첩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장도영이 쿠데타에 대한 최초의 보고를 받고 병력 출동을 금지시키고 박정희 감시-미행을 지시했으며, 헌병감에게 6관구사령부에 집결 중인 쿠데타 지도자의 체포를 지시했다. 쿠데타가 발발한 직후 어느 누구도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진압하려 들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을 바탕으로 저자는 쿠데타의 성공을 단지 몇몇 주동자의 치밀한 계획과 몇몇 책임자의 무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당장이라도 정변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고 그런 정변을 적지 않은 국민들이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5.16 당시 가난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내 아버지는 뭔가 세상이 뒤집혀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고, 자연스럽게 군사정부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군사정부와 공화당에서 이어지는 보수당을 지지하셨다.
박정희의 정책은 집권 초기 수입대체를 위한 경공업 육성에서 출발해 점차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옮겨갔다. 그가 중화학공업 육성에 매달린 것은 경제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방위산업 육성을 위한 것이었다. 1970년대 초 주한미군 철수와 북한의 거듭되는 도발에 그렇지 않아도 늘 느껴오던 위기의식이 더 심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화학공업은 저임금과 억압적인 노동정책을 기조로 하는 것이었으며 리스크 때문에 투자를 망설이는 기업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부가 막대한 특혜를 주었다. 그러다 보니 과잉 중복 투자가 초래되고 부실화되면서 다시 한 번 특혜를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결국 중화학공업 정책으로 인해 재벌구조가 정착되고 국가와 자본의 관계가 역전되는 결과를 낳았다.
1977~1979년에는 총투자의 80%가 중화학공업에 집중되었다. 이와 같은 과도한 투자로 인해 수출 경쟁력이 떨어지고, 중화학공업에 지출된 대여금으로 국내 여신 규모가 과도하게 늘어나고, 중화학공업 집중으로 숙련공들의 부족이 심화되어 실질임금의 상승 압력이 가중되었다. 또한 이로 인해 국가가 중화학공업의 담보물로 전락했고, 여기에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인플레로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과 중산계층과 노동자까지 부담이 늘어났다. 특히 봉급생활자의 타격이 컸는데 그간 정치적 요구를 자제하던 이들이 점차 권위주의 정권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다. 또한 국가는 국가대로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유신체제는 국제적으로 명백한 독재체제였기 때문에 국제적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외교도 극단적으로 위축되었다.
저자는 박정희 리더십은 목표를 달성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목표는 상황에 맞춰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항상 초월적인 목표를 제시했고 거기에 대한 찬반토론은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다고 말한다. 목표를 정기적으로 수정 보완하는 장치를 마련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그 목표를 기한 내에 달성하도록 하는 정책을 구사했으며,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강권을 발동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가치와 절차를 무시하더라도 목표를 달성하는 게 최우선이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권력 문제가 개재되지 않을 경우 인사 발탁은 능력 위주로 신속하게 처리했다. 군 출신이었지만 경제적 전문 지식과 경험이 필요한 부처에는 철저하게 민간인을 기용했으며,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도 민간인 전문가를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박정희의 목표 지향적 리더십의 결과로 경제가 고도성장을 이루었고 대규모 관료조직이 효율적으로 움직였고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지만, 원칙을 벗어난 그만의 리더십 때문에 한국 사회가 목표했던 수준에 이르렀을 때 안락한 복지사회가 건설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육강식이 난무하는 전쟁터로 변했다고 평가한다.
박정희는 내부세력과 외부세력을 나누어 다스렸다. 내부세력인 쿠데타와 집권세력은 당근과 채찍, 분할과 견제 방식으로 다스리되 당근을 더 중요한 자원으로 사용했고, 외부세력인 야당과 국민은 계몽적 태도를 기본으로 유인과 억압을 병행하되 억압을 더 많이 사용했다. 저자는 이러한 통치방법을 사용한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여야와 국민을 초월한 군주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박정희는 야당 지도자나 그 누구도 자신과 대등한 위치에 있다고 여긴 적이 없으며, 매 상황을 위기로 규정하며 국민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는 자기만이 시대의 임무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상대가 누구든 선생이 학생 다루듯 장교가 부하 다루듯 하는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힘의 위력을 솔직하게 인정했고 힘이 부족한 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겼다. 힘을 아무 때나 사용하지 않고 정확하게 자신의 반대자를 제거하거나 몇 가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사용했다. 대통령이 된 후로는 개인의 힘과 국가의 힘을 구분하지 않고 정권 유지를 위해 사용했다. 개인의 힘과 국가의 힘을 구분하려는 의식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의 사고방식과 정책을 정면에서 거스르고 자신이 추구해온 가치체계를 부정한 김대중을 박정희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추종자는 배려했으며 반대자는 탄압했고 중간층에 대해서는 반대자에 대한 탄압을 통해 공포를 조성하므로 복종이나 수동적 지지를 이끌어 냈다. 하지만 스스로 권력을 확대하지는 않았다. 집권세력 내부의 항명이나 야당의 도전이 있을 때 이를 대응하는 과정에서 권력을 확대한 것이다. 그게 누구이든, 국회의 결정까지도, 자신의 뜻과 다른 것을 모두 항명으로 여겼고 그로 인해 생긴 정신적 상처나 훼손된 자존심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으로 권력을 확대한 것이다. 특히 항명에 대한 반응은 거의 즉각적이고 과격했다.
한국 정치사에 있어서 손꼽을 수 있는 굵직한 사건으로는 남북대화가 으뜸일 것이다. 남북대화를 성사시키고 후속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해 많은 지도자들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지금까지 남북관계는 좀처럼 진전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남북대화와 관련해 상대 정파를 국가반역자로, 반통일주의자로 몰아붙이며 파멸할 때까지 밀어붙이겠다는 극단적인 대립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남북대화는 남북대화 그 자체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국면을 전환하기 위한 술수로 사용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저자는 박정희 당시 남북대화는 닉슨의 중국 방문으로 시작된 데탕트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미국이 한국에게 북한과 대화할 것을 종용하면서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북한이 중국으로부터 어떤 권고를 받았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일성이 미국과 중국의 화해를 적극 활용해 정국 변화를 꾀했다는 증거가 많다는 것이다. 저자는 북한은 군사모험주의로 국방력이 과대하게 강화되면서 경제발전이 심각하게 지체되었고, 더 이상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군사모험주의를 버리고 국제 해빙 무드에 편승해나갔다고 말한다. 따라서 7.4 남북공동성명은 남북한의 의사와 관계없이 추진된 미국과 중국 같은 강대국 화해에 대한 남북한 정권 공통의 능동적 대응방식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박정희가 이것을 정권 안정의 방편으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애초부터 정권 안정을 목적으로 추진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박정희는 지나간 역사는 시련과 고난으로 현재는 언제나 위기이자 긴급 상황으로 이해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비상한 각오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이고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의 직책 중 무엇보다 우선해 야할 일이 국가의 안전보장이다. 이 책임은 누구에게 위임할 수도 전가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적절한 조치를 적시에 강구해야 할 책임이 바로 대통령인 나의 일차적인 책임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1971년 12월 비상사태 선언이나 1972년 10월 유신이 단지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추진한 것이라면 그렇게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1975년까지 임기가 보장된 만큼 천천히 상황을 보아가며 조치를 취해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박정희는 과장된 것이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든 안보위기를 과도하게 느끼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집권당에서조차 무리하게 생각하는 일련의 초강경 수단을 구사한 것이다. 저자는 안보에 대한 박정희의 위기의식은 과장된 기만술책이기는 했지만 자신마저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속아 넘어간 것이라고 판단한다.
저자는 박정희는 18년 집권하는 동안 정치사상과 패턴은 변한 것이 없었으며 오히려 시간이 경과하면서 그런 경향이 강화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의 정치사상은 심오한 철학적 사색보다는 생존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지적으로 깊이가 있다고 하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그 근거로 박정희의 저서 5권은 모두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후기로 갈수록 더욱 폐쇄적인 방식으로 체계화되었다는 것을 든다. 박정희는 다른 이들의 견해를 귀담아 듣거나 발상의 전환을 시도한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저자는 박정희의 정치사상을 다음 일곱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단순하고 통일성이 있으며 상하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정치 공동체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거나 자신을 따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격의 없는 인간성을 베풀었다. 그래서 독재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인자한 정치가로 남을 수 있었다.
둘째, 강박적인 역사의식과 위기의식이 깔려 있었다. 그에게 현재는 언제나 긴급 상황이었으며 자신을 그런 긴급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했다.
셋째, 엘리트주의에 바탕을 둔 목표 지향적 지도자 중심 사상을 갖고 있었다. 모든 일은 지도자에게 달렸으며, 대중을 신뢰하기보다는 대중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정치가들을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지도자이며 자기만이 진정한 지도자라고 믿었다.
넷째, 쿠데타 초기부터 민주주의를 도구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서구사상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서구사상에 대해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개인과 민족의 행복을 증진시키는데 기여할 수 없다면 상당 기간 유보할 수도 있는 여러 제도 중 하나로 이해했다.
다섯째, 어려서부터 힘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힘이 없을 때는 힘에 굴복했고 힘이 있을 때는 꺼리지 않고 힘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힘을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사용했다.
여섯째, 궁극적으로 국가주의 사상이었다.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국가기구의 힘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민족을 개조하고 국민의 도리를 함양하기 위해 교육적 계몽적 태도를 취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국민교육헌장이다.
일곱째, 경제발전과 자주국방을 사상의 차원으로 격상시켰다.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제발전이 필요하고 경제발전의 결과로 자주국방을 이루어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였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박정희가 개인이 전체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을 윤리적으로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으며, 이는 개인의 자유를 국가주의의 하부 개념으로 생각한 것으로 해석한다. 말하자면 민주주의 원리보다 공동체 윤리가 우선한 것이다. 박정희는 개인은 국가나 가족 같은 공동체에 윤리적으로 종속된 존재이며 그런 윤리적 의무를 다할 때 개인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국가(大我)는 개인(小我)의 확대된 모습이며 국가로부터 독립된 개인은 인정하지 않았다. 소아는 대아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것이고 나를 위하는 것이 국가를 위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국가주의적 세계관을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다.
1917년에 태어난 박정희는 스물아홉 살이던 1945년에 해방을 맞았고, 남로당 전력으로 위기에 처했다가 6.25가 일어나면서 우여곡절 끝에 육군에 복귀했다. 그리고 휴전으로부터 8년 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는 교사와 군인으로, 6.25와 휴전 이후에는 군인으로 지냈다. 말하자면 성장과정으로부터 쿠데타를 일으킬 때까지 단 한 해도 민주주의를 학습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런 이유 때문에 그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이해하지도 못했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은 것으로 평가한다. 일제강점기 교사와 군인의 경험 속에서 형성된 국가와 민족, 국가주의적 세계관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박정희를 비판하면서 이 점을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세대를 지나온 사람은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그런 중에서도 민주주의를 구현하려 했던 사람은 있었다. 그러니 그런 세대를 지내왔다는 이유로, 민주주의를 몰랐다는 이유로 민주주의 방식으로 국가를 통치할 수 없었다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이 박정희처럼 민주주의 방식을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사회 전반에 정착할 때까지 그렇게 오래 시간이 걸린 게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는 저자가 평가하는 것처럼 반민주주의자 비민주주의자라기보다 몰(沒)민주주의자 무(無)민주주의자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겠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