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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r 25. 2024

[요약]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의 비밀

매튜 사이먼스

송계신 옮김

동양문고

2007년 5월 17일


압둘아지즈 국왕은 1945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이례적으로 극비 정상회담을 가졌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5년 2월에 흑해 얄타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회담을 마치고 비밀리에 이집트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 정박 중이던 미국 항공모함 퀸시호를 타고 수에즈운하 중간에 있는 Great Bitter Lake로 이동해 이집트의 파룩 국왕,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사우디의 압둘아지즈 국왕과 연쇄 회담을 가졌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자 압둘아지즈 국왕은 즉시 “전쟁이 끝나면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전쟁 전에 살고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맞받았다. 또한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사들이고, 나아가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아랍인들과 싸우기 위해 무기를 구입하는 것에 대해 크게 우려를 나타냈다. 또한 전쟁이 끝나고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하면 이슬람과 유대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이를 막기 위해서는 유대인 정착촌을 유럽에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압둘아지즈 국왕이 5시간 동안 정상회담을 하면서 석유 문제를 다뤘는지 여부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상식적으로 봤을 때 석유 문제가 정상회담 의제에 포함됐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미 미국계 석유회사가 정상회담 열리기 수년 전에 두 곳에서 유전을 발견했고, 그중 한 곳에서는 석유를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석유 문제가 다뤄졌을 것으로 보인다. 압둘아지즈 국왕은 중동지역에서 영국의 강력한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기 원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귀국한지 한 달 보름여만인 1945년 4월 4일 아랍인들과 유대인들로부터 의견을 충분히 들은 뒤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결정하겠다는 그의 약속을 압둘아지즈 국왕에게 보냈다. 그는 특히 편지 말미에서 “미국 정부의 최고 책임자로서 아랍인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했다. 그러나 루스벨트 대통령은 사신을 보내고 나서 8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


압둘아지즈 국왕은 중동에 유대인 국가가 들어설 경우 어떤 위험이 뒤따를지 알기 때문에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 국가 건설에 따른 위험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국제연합(UN)을 창설한 모임인 샌프란시스코 국제회의에 파이살 왕자를 파견했다. 파이살 왕자는 유대인 국가 건설 문제에서 사우디의 우려를 충분히 고려하겠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약속을 지켜달라고 미국 정부에 요청했으나 그의 요구는 무시됐다. 승전에 공헌한 사우디를 돕지 않고 대신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용인하는 듯한 미국에 대해 파이살 왕자는 깊은 적개심을 품은 채 귀국했다. 이 같은 미국에 대한 적개심은 그로부터 25년 뒤인 1973년 중동전쟁이 발발했을 때 사우디의 왕이 된 그가 미국을 응징하기 위해 석유 금수조치를 내림으로써 ‘1차 석유 위기’를 불러오게 하는 계기가 됐다.


압둘아지즈 국왕은 말년에 권한을 사우드 왕자와 파이살 왕자에게 이양하고 공식적인 업무에서 손을 뗐다. 권력을 아들들에게 이양한 지 8년 뒤에 압둘아지즈 국왕이 죽자 사우디는 왕위를 둘러싸고 극심한 투쟁에 휩싸였으며, 마침내 사우디 왕자가 왕권을 장악하고 파이살 왕자는 왕세자가 되는 것에서 권력 투쟁은 일단락됐다.


압둘아지즈 국왕이 사망했을 때 사우디의 하루 석유 생산량은 약 84만 배럴로 급증했다. 당시 5개 대형유전이 발견됐으며 그 가운데 아브카이크 유전과 가와르 유전은 본격적인 생산에 진입했다. 그때 사우디의 석유 수출 금액도 1억1천만 달러로 급증했다.


사우드 국왕과 파이살 왕세자는 행동과 스타일, 개인적인 특성에서 극단적일 정도로 완전히 달랐다. 사우디 국왕은 넓은 궁전과 사치품, 부유한 생활을 즐긴 반면에 파이살 왕세자는 절제와 경건성, 순수성, 경제적 통찰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사우드 국왕은 국가 재산의 관리자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사우디의 경제는 1950년대 내내 재정적 부도위기를 면치 못하는 취약한 모습이었다. 사우디 국왕이 비록 1953년에 압둘아지즈 국왕으로부터 물려받은 빚이 2억 달러에 달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그가 국왕으로 재위하는 동안 빚이 더 늘어났다는 점이다. 그가 국왕이 된 이후 5년간 사우디의 빚은 250%나 급증했다.


사우드 국왕은 1960년대 초 신병 치료를 받기 위해 해외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 사이 파아살 왕세자가 새 내각을 구성하고 사실상 사우디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1964년 사우드 국왕이 귀국한 뒤 왕실 수비대를 동원해 파이살 왕세자를 위협하며 실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마침내 사우드 국왕은 1964년 3월 28일 왕자를 동생인 파이살 왕세자에게 물려주고 이집트 카이로로 떠났다. 사우드 국왕은 그로부터 5년 뒤에 그리스에서 숨을 거뒀다.


파이살 국왕으 석유 판매 수익이 급증하기 시작했을 즈음 왕위에 올랐다. 파이살  국왕의 근검정신에다 석유 판매 수익이 늘어나면서 그가 물려받은 재정적 위기는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사우디가 바야흐로 재정적으로 초강대국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파이살 국왕은 왕위를 계승하자마자 이복동생인 칼리드 왕자를 새로운 왕세자로 임명하고 또 다른 이복동생인 술탄 왕자를 국방장관에 임명했다. 석유장관에는 1960년부터 재임했던 알 타키리 장관을 경질하고 대신 자키 야마니 장관을 임명했다. 알 타키리 장관은 주요 석유 공급국가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진 석유수출국기구(OPEC) 창설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전히 그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파이살 국왕은 사우디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1975년 그가 피살된 것에 대해 많은 사우디 인들은 비극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른 많은 사우디 왕족들과 달리 파이살 국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많은 나라를 여행하며 대외적으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그는 1934년 옛 러시아인 소련을 방문했고 1943년에는 첫 번째 미국 방문길에 올라 사우디 대표단을 이끌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던 국제연합(UN) 회의에 참석했다.


파이살 국왕은 사우디가 무명의 왕국에서 세계적인 석유 수출국으로 부상하고 있을 때 왕권을 잡았다. 그는 급증하는 석유판매수익을 활용해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하는 등 사우디 근대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파이살 국왕은 여성들에게도 교육 기회를 주도록 교육법을 제정하고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하는 등 개방사회를 지향하는 정책을 차근차근 추진하였다. 그러나 파이살 국왕이 죽자 정책은 후퇴하고 말았다.


파이살 국왕은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OPEC의 첫 번째 수출금지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석유 검’을 휘두른 것으로 더 알려져 있다. 하지만 파이살 국왕은 2년 뒤인 1975년 3월 조카에게 암살당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칼리드 국왕이 즉위했다 1962년 칼리드 국왕이 죽은 뒤에는 파드 왕자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파드 국왕은 1996년 초 건강이 악화돼 정상적인 국정 수행이 불가능한 상태가 됐고, 결국 그의 이복동생인 압둘라 왕세자가 2001년부터 국정을 대행했다.


사우디는 경제를 다각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화학산업과 석유화학산업을 현대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에 따라 1976년 사우디는 SABIC을 설립했다. 이후 SABIC은 창립 20년 만에 세계 11위의 석유화학업체로 성장했고 지금은 듀퐁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다.


국가 인구가 900만 명에 불과하고 유가가 급등할 때 사우디는 넘치는 오일달러 때문에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했다. 석유를 수출해 벌어들인 돈으로 사우디 정부는 무상이나 정부 보조를 통해 의료보험, 교육, 전력, 상수도 확충 등 사회보장제도를 늘려왔으며 앞으로도 이 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2003년 말 기준 사우디 정부 부채는 1700억 달러에 이른다. 사우디 국민의 1인당 부채는 외환위기를 겪었던 아르헨티나보다도 많은 수준이다. 특히 1984년부터 2003년까지 20년 동안 19년이나 재정적자를 기록했다.


사우디 유전 가운데 5개는 대량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되어 있는 초대형 유전들로 세계 최대규모이며 1950년부터 1990년대 말까지 50년 동안 사우디 석유 생산량의 90%를 점유해왔다. 특히 가와르 유전은 세계에서 가장 큰 유전으로 유명하다. 사우디 유전의 대부분이랄 수 있는 101개 유전과 가스전이 동부지역에 밀집해 있다. 대부분 육지에 있으며 13개 유전만 해상에 자리 잡고 있다. 해상 유전들은 페르시아만 위쪽의 사우디와 쿠웨이트가 공동으로 점유하고 있는 중립지역(Neutral Zone) 바로 아래 위치하고 있다.


사우디의 석유개발 논의는 1923년 뉴질랜드인 프랭크 홈스가 압둘아지즈 국왕을 방문해 사우디의 석유 매장 가능성을 역설했을 때 처음 이뤄졌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중 예루살렘과 다마스쿠스로 이동하는 영국군 병참장교로서 중동에 진주했다. 당시 페르시아만의 석유분출에 대해 듣게 된 그는 전쟁이 끝나자 중동지역의 석유 탐사를 위한 회사를 세웠다. 그는 사우디 동부지역에 대한 석유개발권을 최초로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초대형 유전인 부르간 유전이 개발된 쿠웨이트의 석유개발권도 확보했다. 그는 또 바레인에서도 석유개발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자본이 빈약했던 그는 압둘아지즈 국왕으로부터 돈을 빌려야 했고 결국 밀려났다. 그는 1925년 바레인 왕국으로부터 획득한 석유개발권을 걸프오일에 임대했다. 그러나 바레인에 해당 지층이 없다는 보고서가 나오자 걸프오일은 석유개발권을 미국 캘리포니아 소재 스탠다드오일(SOCAL)에 넘겼다. SOCAL은 이 과정을 통해 중동지역에 진출하게 되었다.


SOCAL은 바레인 석유회사를 자회사로 세우고 석유 매장 가능지역을 엄선해 시추공을 뚫었으나 석유를 찾지 못했다. 바레인에서 석유 시추에 실패한 SOCAL은 아라비아반도에 석유가 묻혀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접고 사우디와 벌인 석유개발권 협상에서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1933년 초 개최된 사우디와 SOCAL의 석유개발권 협상은 3개월 넘게 지속되었으나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런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SOCAL과 사우디는 프랭크 홈스가 사우디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지 10년만인 1933년 5월 29일 드디어 석유개발협정을 체결한다. 계약서에서 사우디는 5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금 대출과 함께 연간 2만5천 파운드의 임대료에 산유량 1톤당 1파운드를 추가로 받기로 했다. 이 계약으로 SOCAL은 사우디 동부지역 국경지대에서 인접국과 공동으로 탐사를 추진할 때도 먼저 협상할 수 있는 우선권을 보장받았다. 사우디와 SOCAL이 1933년 체결한 석유개발협정은 압둘아지즈 국왕이 세운 이 왕국에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이 계약은 사우디가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발돋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목차


Part 1. 유목민에서 자본가 계급으로

1. 나라의 탄생 - 격동의 세기와 경제적 도전

2. 사우디아라비아 유전의 발견

3. 사우디의 석유시장 주도권 장악 여정

4. 사우디 석유 매장량과 생산에 드리운 비밀의 장막


Part 2. 사우디에 내린 석유 축복의 쇠락

1. 사우디 아람코사 : 한 국가를 능가하는 석유생산량

2. ‘평범한 상품’ 그 이상인 석유


Part 3. 생산감소기에 진입한 대형 유전들

1. 가와르, 유전의 왕

2. 두 번째로 큰 유전들 : 아브카이크, 사파니야, 베리

3. 산유량 적은 유전들

4. 소득 없이 끝난 최근의 탐사

5. 천연가스를 주목하다


Part 4. 사막의 황혼

1. 사우디 석유 매장량에 대한 의심

2. 피할 수 없는 운명

3. 아람코사의 최근 동향에 대한 해석

4. ‘퍼지논리’ 활용하는 아람코사

5. 사우디의 주장에서 진실 찾기

6. 세계는 아리비아산 석유감소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Part 5. 불붙은 세계 석유전쟁

1. 러시아의 석유 패권주의

2. 세계 유전을 삼키는 중국

3. 고조되는 중남미 자원 민족주의

4. 한국의 해외자원개발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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