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ook Review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식 May 30. 2024

반박의 기술

<피렌체의 식탁> 박인식의 호기심 따라 읽기 10

웹진 <피렌체의 식탁>에 열 번째 서평이 올라왔습니다. 이번에는 철학 교수 최훈이 쓴 <반박의 기술>을 읽었습니다. 소셜미디어가 일상화되어 누구든 글을 쓰는 세상이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댓글 전쟁도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거기에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책입니다. 링크는 아래에 올립니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클릭 한 번...


♣♣♣


반박의 기술

최훈

뿌리와이파리

2024년 3월 22일


소셜미디어가 일상화되면서 이젠 누구든 글을 쓰는 세상이 되었다. 예전에도 카페나 블로그 같은 소셜미디어가 있기는 했지만, 일부러 찾아가야 글을 읽을 수 있으니 자기 생각과 다른 글을 읽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자기 의지와 무관한 글을 읽게 만드는 페이스북이 등장하게 되었고, 그러고 나서 이곳저곳에서 논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댓글이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비화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가 아닌가 한다.


글을 쓰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소셜미디어에 쓰는 글은 남을 의식한 글이 대부분이다. 남이 읽는다는 전제로, 남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기대로 글을 쓴다는 말이다. 소셜미디어에는 글을 쓰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의 글에 댓글을 달고 남의 글을 퍼 나르는 재미로 찾는 사람도 많다. 그러는 가운데 알고리즘이 작동해 점점 자기 생각과 같은 글만 올라오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렇게 자기 강화가 이루어진다. 댓글은 점점 격화되고 급기야는 댓글 전쟁, 사상 전쟁으로 비화한다.


요즘 들어 주장이 첨예하게 갈릴 만한 글 말미에 관용어처럼 따라붙는 말이 하나 생겼다. ‘반박 시 네 말이 맞음’이라는 말이다. 반박에 일일이 답변하기 귀찮다는 뜻으로 썼겠지만 어떻게 보면 조리 있게 반박할 만한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 시대 상황을 반영하듯 논리학을 연구하는 철학 교수가 반박하는 요령을 담은 ‘반박의 기술’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반박은 상대 주장에 결함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그 결함을 찾아야 하는데, 저자는 무엇보다 먼저 주장의 근거가 사실인지(팩트 체크), 사실로 확인된 근거가 주장을 뒷받침하는지(논리 체크) 살펴보라고 말한다. 근거가 사실이 아니어도 주장은 반박되는 것이고, 근거가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해도 주장은 반박된다. 이 과정에서 근거가 잘 알려진 것이면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때로는 그것이 생각만큼 만만한 일이 아닐 수 있는데, 그때 근거가 사실인지 입증하는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당연히 주장을 내세우는 쪽이다. 물론 늘 그런 건 아니고 사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저자는 사회정책을 둘러싼 논쟁일 경우 입증 책임은 이미 시행하고 있는 정책을 찬성하는 쪽이 아니라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쪽에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듯”이라던가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처럼”이라는 식으로 보편 주장을 내세우는 이에게는 한두 가지 예외만으로도 이를 반박할 수 있는데, 그럴 때 대부분 “예외 없는 법칙 없다”는 식으로 피해 가기 마련이다. 이때 그에게 입증 책임을 요구하면 퇴로를 막을 수 있다.


상대가 사용하는 논리를 이용해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도 있다. 저자는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담은 <깻잎 투쟁기>에서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그들을 고용한 농장주의 억지 주장을 농장주의 논리로 반박한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농장주가 캄보디아 노동자들에게 “못 사는 나라에서 왔으니 최저임금을 적용할 수 없다”고 말하자 “못 사는 나라에서 왔으니 세금도 반만 내고 버스 요금도 반만 내고 음식값도 반만 내겠다”고 반박했다는 것이다.


요즘 곳곳에서 논쟁이 벌어지는데 그럴 때 용어를 선점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소위 프레이밍(framing)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프레이밍 자체가 설득력이 있으면서도 의도가 드러나지 않고 감춰져 있어서 더욱 강력하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 원전으로부터 나온 배출수를 정부 측에서 ‘처리수’라고 부르자 시민단체에서는 이것이 ‘오염수’라며 격렬히 반발한 일을 예로 들고 있다. 이와 같이 어느 용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문제를 보는 관점이 달라질 수 있으니 자기 편의 용어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최소한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용어 선점에 관한 한 보수는 진보에 판판히 뒤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탈핵’이 그렇고 ‘희망 버스’가 그렇다.


이렇게 용어를 선점당했을 때는 용어를 재정의하는 것으로 반박할 수 있다. 한동안 능력주의라는 말이 논쟁의 중심에 선 일이 있다. 예컨대 기업에서 직원을 채용할 때 능력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며 학벌을 우선 고려하는데, 이럴 때는 기업에서 필요한 능력이 학벌만이 아니라고 반박해야 한다. 한편으로 종교를 이유로 ‘양심적 병역거부’가 논란이 되었을 때 이에 반대하는 이들에게서 “병역에 응하면 비양심이라는 말이냐”는 반박이 터져 나온 일이 있다. 대법원은 이와 관련한 판결을 통해 양심은 ‘착한 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각자의 기준’이라는 판례를 수립하였다. 말하자면 용어를 문제 삼아 논의의 본질을 호도한 셈인데, 저자는 이를 ‘신념에 따른’이라고 바꿔 ‘필요 없는 논란’을 배제하라고 조언한다.


2022년 5월 어느 대학에서 학생들이 청소 노동자들의 시위가 수업을 방해한다고 이들을 업무방해로 고발한 일이 있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청소 노동자의 시위가 수업을 방해하는 게 업무방해인가를 놓고 갑론을박이 있었다. 저자는 이 논란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가 간과되었다고 지적한다. 이 논란은 “청소 노동자의 시위가 수업을 방해한다”는 전제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이 제기되었다면 “시위가 수업을 방해했는지” 판단하는 게 우선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 이 논란에서 학생 측의 방해했다는 주장만 있고 소음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 사건은 고발하고 7개월 만에 경찰에서 업무방해 혐의에 대해 “집회 시간과 방법을 분석해보니 수업권 침해로 보기 어렵다”며 검찰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학생 측에서는 프레이밍에 성공한 것이고 청소 노동자 측에서는 팩트 체크를 놓쳐 오랫동안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은 것이다.


앞서 저자는 팩트 체크와 논리 체크가 반박의 기본적인 출발점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논리 체크가 어려울 수 있지만 팩트 체크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위에서 보는 것처럼 팩트 체크 해야 할 요소가 프레이밍에 가려져 놓치는 경우도 일어난다. 상대 주장을 반박하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반박을 위해서는 논리뿐 아니라 프레이밍에 가려져 있는 팩트까지 찾아내야 하고, 그러려면 그만한 공부가 필요하다.


그런데 팩트 체크와 논리 체크를 통한 이러한 반박은 그 반박을 수용하는 사람에게나 의미가 있는 것이지 무슨 말을 해도 들은 체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소용없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은 팩트를 지적해도 자기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제시할 뿐이니 이런 반박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상대에게 타격도 입히지 못한다.


그럴 때 동원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저자는 논점 흐리기, 물귀신 작전, 피장파장 작전을 구사하라고 조언한다. 메시지를 반박하기 어려우면 메신저를 공격하라는 조언도 서슴지 않는다. 이때에는 메신저를 공격하는 데서 그쳐야지 메신저가 문제가 있으니 메시지도 문제가 있다는 방식을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자칫 되치기당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말이 안 되는 주장을 할 때는 말이 안 되는 방법으로 받아치라는 것인데, 그럴 만한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지만 그것을 반박의 기술이라고 이 책에서 언급하는 게 적절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조금 민망하기는 했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 같은 논리학자는 논증의 틀을 연구하는 것이지 구체적인 내용을 연구하는 것은 아니라면서 자신이 인용한 예문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를 당부하고 있다. 자신은 특정한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렇게 보기엔 예문이 너무 한 쪽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그 말이 없었더라면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갈 일인 것을 서문에 그 말을 써놓아서 오히려 책의 내용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https://www.firenzedt.com/news/articleView.html?idxno=30870


매거진의 이전글 전쟁과 학살을 넘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