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거나 물건을 살 때 간혹 필요하지 않은 음식이나 사은품을 받기도 하는데, 꼭 쓸데가 있는 게 아니면 사양하는 편이다. 아까워서 받기는 해도 없던 쓸모가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니니 그게 누구 돈이 되었던 결국은 낭비가 되기 때문이다.
업무 때문에 만나는 사우디 교수가 하나 있다. 별로 호감이 가는 친구는 아니지만 이런 경우에 자기가 필요하지 않아도 꼭 챙겨서 들고 다니다 궂은일 하는 사람에게 주곤해서 나를 괜스레 미안하게 만든다. 출장에서 돌아오는 기내에서 승무원이 나누어주는 샌드위치를 여느 때처럼 사양하다 문득 그 친구가 생각나서 다시 받았다. 하찮은 수고 하나로 밤늦게까지 일하다 출출해진 누구에겐가 작은 위로가 되면 좋겠다.
일간지에서 미국 성공회가 “신을 묘사할 때 성 중립적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논의를 진행 중이라는 보도를 전하면서 ‘종교계까지 파고든 성 평등 바람’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가지고 계신 분이고, 따라서 성 중립적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극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성 평등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저녁 먹는데 아내가 이웃에 사시던 장로님께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동네에 작은 의원을 열고 평생을 보내신 분이었다. 아들이 어렸을 때 잔병치레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따듯하게 돌봐주시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 금슬이 유난히 좋으시더니 마나님 눈 감으시고 채 한 시간도 안 되어 따라 돌아가셨더란다. 복도 많으시지 싶어 부러웠다.
함께 이야기한 사실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네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말하는 것보다 “내가 이렇게 들었다”고 말하는 게 낫겠다. 그렇게 말하는 게 상대방을 덜 언짢게 만들 뿐 아니라 사실에 더 가까울 수 있으니 말이다.
끝까지 견뎌야 견딘 것이다.
나이가 드니 깨닫는 게 많다. 그런데 깨닫기만 한다.
가족은 같이 살아야 가족이다. 그렇게 살았다는 고백이 아니라 그렇게 살지 못한 회한의 말이다. 내 삶이 유별났던 건 아니고 그땐 다 그렇게 살았고,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젊었을 때는 현장으로 다니느라 아이가 자라는 기쁨을 모르고 살았다. 아이에게 유난히 엄했는데, 아마 자랄 때 사랑스러웠던 모습을 보지 못해서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 나이가 들었을 때는 퇴근이 늦기도 했지만 일에 치어 아이를 살갑게 대할 여유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 뭘 고민하는지, 어려움은 없는지 얼굴 맞대고 앉아 이야기 해본 기억도 없다.
혜인이는 참 밝다. 아빠 극장이 지척에 있어 연습하거나 공연할 때가 아니면 늘 함께 지내 누구보다 아빠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혜인이를 보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도 아빠와 함께 보낸 추억거리가 많아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혜인 아빠에게는 그런 추억거리를 만들어주지 못해 미안했다.
오늘 문득 그런 추억이 없는 게 내게도 큰 아쉬움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나와 내 가족, 내 이웃 뿐 아니라 내가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 더 나아가 내 원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내가 불편하게 여기고, 심지어 적으로 여기는 이들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오 백 여명 남짓한 예멘 입국자 때문에 촉발된 난민 문제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그들이, 그들의 신앙과 그들의 문화가 불편할 수 있다. 나도 그렇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할 수 없으니 불편하지만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혹시 그것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서 쉽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내 당면한 문제가 되어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삼 대가 타국의 선의에 기대어 살아가는 나로서는 더욱 그래야 할 것인데, 이 물음에 대해 자신 있게 그러마고 대답하지 못하겠다. 그렇다면 난 도대체 뭘 믿고 있는 것인가.
혜인 어멈의 둘째 순산을 위해 아내와 함께 기도하는데 문득 혜인 아범 낳을 때 생각이 났다. 자다가 느낌이 이상해 깨어보니 아내가 병원 갈 가방을 싸놓고 앉아있었다. 본가에 살 때라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새벽에 옷 다 챙겨 입고 가방 싸놓고 앉아 있는 아내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모른다. 아내를 병원에 데려다 주고 나니 어머니께서 있어봐야 거치적거리기만 한다고 얼른 출근하라고 하셨다.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일이었다. 출근은 했는데 일이 손에 잡히겠는가. 좌불안석이었다. 혜인 아범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퇴근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숨을 얼마나 깊이 들어 쉬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곁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철없는 남편이었다.
아침에 진통이 오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밤이 되도록 진통만 계속되는 모양이다. 그저 새 생명과 그 생명을 품은 어미를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구할 뿐이다. 다행히 사부인께서 와 계시고 혜인 아범도 곁을 지키고 있으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데, 그렇다고 걱정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가운데에서도 새 생명이 모두 기다리고 축복하는 가운데 태어나게 하신 것을 생각하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지난 해 격랑이 일었던 정국을 지켜보면서 그 모든 문제가 제대론 된 정당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한 정치학자의 진단에 깊이 공감하고 정당 가입을 구체적으로 생각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특정 후보자가 아니라 각 정당의 정강정책과 그 정강정책이 결정되고 구현되는 구조를 살펴봤다. 그 결과 뜻밖에도 정의당이 유일하게 정당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록 노선이나 주장하는 바가 내 가치관과 거리가 있는 부분이 적지 않았지만, 주장의 밑바탕을 흐르고 있는 인간존중 정신, 당 노선과 다른 내부 주장도 배척하지 않고 치열하게 토론하는 열린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노선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들 안에 들어가 부딪쳐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어 귀국하면 입당을 생각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정의당이 정당으로 기능하는 유일한 정당이기 때문에 입당할 생각을 했지만, 그와 함께 정의당이 그렇게 정당으로서 기능하도록 이끌고 있는 노회찬, 심상정 두 사람에 대한 신뢰 또한 중요한 이유였다. 이번에 노회찬 의원의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졌을 때 그게 사실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그가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 그럴 리가 없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소수정파가 운신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체제에서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게 사실일 경우 그가 입을 타격도 타격이지만 어쩌면 한국 정치의 소중한 자산 하나를 영영 잃을 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걸어온 길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떻게 책임질 방법으로 죽음을 생각했다는 말인가. 이제 겨우 책임질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놓았고, 태생적으로 거리가 있는 나조차도 그가 짊어지려는 책임에 기대를 걸고 있는데.
혜원이가 우리에게 온 날, 노회찬 의원이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떠나는 그의 발걸음이 어디 가벼웠으랴마는, 그를 보낸 우리의 아픔만큼이야 했겠나. 그래서 기뻐도 기뻐할 수 없었고 아파도 아파하지 못했다. 평생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려 애썼던 그의 노력을 많은 이들이 아는데, 생각이 다르고 노선이 다른 이들조차 그의 몸가짐을 탓하는 말을 찾기 어려웠는데, 합리적이지 못한 제도가 기어코 그를 넘어뜨리고 말았다. 그를 지지하면서 그 지지를 한 번 제대로 표시해보지도 못하고 그를 떠나보내 마음이 몹시 시리고 아프다.
남은 날 동안, 내게 주어진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성실히 감당하는 것으로, 그리하여 그가 꿈꾸었던 좀 더 좋은 세상을 이루는데 작은 힘을 보태는 것으로 그의 유지를 기억하려 한다. 그리고 혜원이가 얼마큼 자랐을 때, 우리가 좀 더 나은 세상에 살 수 있게 된 것이 이런 이들의 수고 때문이었다고 설명해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