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어성경을 읽고 있다. 막히는 곳이 많아 대충 건너뛰어도 속도가 여간 더딘 게 아니다. 읽는 게 더디니 읽는 시간을 늘려야 할 텐데 진도가 나가지 않아 답답해 오히려 읽는 시간이 줄었다. 성경 읽는 분량만 적어지면 모르겠는데, 기도가 중구난방이 되어간다. 뜻은 살피지 않고 내 주장 내 필요만 내뱉고 있다. 지난번에도 꽤 고생을 했는데, 차라리 우리말 성경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까?
갓 태어나 아직 엄마와도 눈을 맞추지 못하는 혜원이가 신기하게도 혜인이 목소리는 알아듣고 눈도 맞춘다. 자식이 형제 없이 혼자 자라게 한 것이 못내 미안했는데, 오늘 자매가 눈 맞추고 있는 걸 보니 더욱 그렇다.
어느 부모나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기를 바라고, 그렇게 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환경이 형제를 갖는 것인데, 아이에게 좀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겠다는 이유로 자식을 하나만 낳아 그 좋은 환경을 빼앗는다. 형제라는 관계 속에서만 배우고 깨우칠 수 있는, 부모가 가르쳐 줄 수 없는 삶의 지혜와 가치가 얼마나 많은데 말이다.
정직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일 뿐 아니라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매우 현실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직을 선택한 결과가 드러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것을 정직의 결과라고 여기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워 정직을 선택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다 보니 모자란 사람 취급받은 일이 부지기수이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굳이 사실을 인정해서 스스로 무덤을 팠다는 비난도 수없이 들었다. 그렇다고 늘 정직했던 건 아니다. 때로는 눈앞의 성과 때문에, 난처함을 모면할 생각으로 꼼수를 부린 일도 적지 않다. 하지만 꼼수가 통했던 경우는 별로 없다. 번번이 상대에게 되치기 할 빌미만 준 꼴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에 발목이 잡히곤 했다. 꼼수가 드러난 것도 망신스럽고 그로 인한 손해 때문에 속상하기도 했지만, 꼼수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이 더 부끄러웠다.
지금껏 깨달은 대로 대체로 정직을 선택하는 편이다. 정직과 꼼수 사이의 갈등에서 아직 온전히 풀려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일을 놓으면 이런 갈등은 없어지겠나?
위기를 지날 때 누군가로부터 받은 작은 격려에 힘입어 고비를 넘은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일이 숱하게 있었을 텐데 당장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가 없다.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수는 물에 새기라 했는데, 나는 은혜를 물에 새긴 모양이다. 떠오르지 않는 사람 생각해내려고 애쓸 게 아니라 누군가 격려할 일을 찾는 게 빠르겠다. 그것도 은혜를 갚는 일일 것이니.
세상에 장담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분명히 사실이라고 확인한 것이 사실이 아닌 경우도 적지 않았고, 틀림없을 것 같은 일이 틀리는 경우는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도 장담한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런 이치를 몰라서 그러는 건가, 아니면 알면서도 내지르는 건가? 그런 이치를 몰라서 그러는 사람은 어리석어서, 알면서도 내지르는 사람은 사기성이 농후해 보여서, 이래저래 상종해 득 될게 없겠다.
소명이라고 여겼던 것이 내 욕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 모든 일에 의욕을 잃었다. 의욕을 잃었으니 무슨 일이든 제대로 되었겠나. 모두가 부질없게 느껴질 뿐이다. 그동안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하던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려고 애썼다. 소명에 대한 확신이 무너진 순간 삶의 방식도 삶을 지탱해온 가치도 모두 무너져 내렸고, 그저 하루라도 빨리 이 생활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오늘 설교 중에 내 삶 가운데 어느 부분도 주께 하듯 해야 할 일이 아닌 게 없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잊고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리석은 이라고. 낙심이 사람을 어리석게도 만드는구나.
매운 시어머니를 모시고 십 여 년을 일했다. 맵기만 하면 견디는 게 뭐 그렇게 어려웠을까마는, 품질은 제쳐두고 납기만 맞추라는 그의 요구는 엔지니어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지시를 거스를 수도 없어서 눈을 피해가며 일해야 했다. 그가 현장 소장으로 나가있는 두 해 동안 잠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도 그에게서 전화라도 오면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그가 복귀할 날이 다가오자 마음이 답답해졌다.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었다. 그가 괴롭히지 않도록 지켜주시기를 구했다. 그렇게 시작한 기도가 놀랍게도 하루하루 지나면서 내용이 바뀌어갔다. 그가 괴롭히는 걸 잘 견딜 수 있기를, 그를 이해할 수 있기를, 그를 용납할 수 있기를. 결국은 그를 사랑할 마음을 주시기까지 구하게 되었다.
그가 복귀할 무렵 회사 연수원 행사에서 그를 만났다. 여느 때 같았으면 인사만 하고 피했을 텐데, 무슨 마음이 들어서였는지 그의 곁에 앉아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치에 닿지 않는 주장이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 이야기에 끼어들었고, 그와 이야기 나누던 이가 자리를 뜨고, 그와 둘이 오래도록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나가던 동료 하나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니 그가 “이 친구가 이제야 마음을 열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듣던 그 짧은 순간, 그에게 그렇게 몰아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싶었고, 설명하려 했으나 내가 곁을 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밤새 그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벽을 허물었다. 그 후로 그가 떠날 때까지 몇 년 동안 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고 일 할 수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 모든 과정은 의심의 여지없이 기도의 결과였다. 기도는 상황을 바꾸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고, 내 자세를 살피고, 내 마음을 바꿀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트라우마라는 게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충격을 받았으니 크게 놀랐겠다는 정도로 여겼던 일이었는데, 이젠 그것이 정신건강을 해치고 나아가 정상적인 삶을 영영 잃어버리게 할 만큼 심각한 질환으로 여기고 있다. 그렇기는 해도 내심 지나친 엄살이 아닐까 생각해왔다.
얼마 전 운전하다가 사고를 냈다. 다행히 두 차 모두 서행 중이어서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내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일어난 일이니 탓할 사람조차 없어 오히려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그만하기 다행이라는 아내의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고 난 후로 운전하는 게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수리하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차를 빌려 썼는데, 여느 때와는 달리 운전하는 게 그렇게 어설플 수 없었다. 출장 가면 늘 차를 빌려 쓰니 차가 낯선 게 이유일 수는 없겠고, 그저 나이가 들어서 더 조심스러워진 게 아닐까 싶었다. 이곳의 난폭 운전이 새로울 것도 없는데 그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고 차로를 바꾸는 게 겁이 나기까지 했다. 문득 이게 트라우마가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을 망가뜨릴 수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면 내가 겪기 전에 남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겠다.
그만두고 돌아가는 건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다. 돌아가서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당장 결정을 내려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더 나빠질 일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걱정에서 놓여나지를 못하는 것인가?
현대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웃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해오고 있다. 하나님께서 전능한 손길로 치유해주시기를 기도했지만, 그것이 과연 바른 기도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낫기를 기대할 수 없는 병을 앓는 본인은 물론이고 그 가족이 겪는 고통이 무엇인지 그 크기가 얼마나 될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웃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늘 막막했고, 그래서 기도는 늘 막연했다. 이따금 올라오던 소식도 요즘은 들리지 않는다. 상황을 물어볼 곳도 없고. 그저 필요한 은혜를 허락해주시라는 막연한 기도를 되풀이 할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