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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니 <청교도 I Puritani>

by 박인식

오페라 아리아라고 하면 소프라노와 테너 아리아가 먼저 떠오릅니다. 물론 저음역의 아리아도 있지만 오페라 대부분이 소프라노와 테너의 사랑 이야기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식이 베이스 가수이다 보니 그런 점이 늘 아쉽습니다. 그래서인지 멋있는 바리톤이나 베이스 아리아가 들리면 무심히 여기게 되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관심을 두게 된 오페라가 바로 빈첸조 벨리니의 <청교도>입니다.


관심을 두었다고는 하지만 그저 좋아하는 아리아만 찾아 들었을 뿐 전곡을 감상한 일은 없습니다. 이번 연휴 때 들으리라고 작정하고 오래전에 사놨던 DVD를 꺼내 틀었습니다. 왜 이제까지 제대로 듣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좋은 오페라였습니다. 이 오페라가 국내 무대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일이 없어 찾아보니 2021년과 2024년에 공연되었군요. 2021년 공연은 이탈리아 모데나 극장과 공동으로 올린 것이고 2024년은 콘서트 형식으로 공연되었답니다.


이번에 본 영상은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가 200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롤 데뷔한 공연인데요, 주역 네 명(조르지오ㆍ엘비라ㆍ아르투로ㆍ리카르도) 중에서 리카르도 역을 맡은 가수는 영 아쉬웠습니다. 다른 영상을 찾아보니 넷이 모두 잘하는 경우는 드물더군요. 사실 테너인 아르투로는 다른 오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고음을 내야하고 소프라노인 엘비라는 광란의 장면을 노래하기 위해 초절기교를 보여야 하니 이런 조합을 만드는 게 쉬운 일도 아닐 것이고, 바리톤인 리카르도나 베이스인 조르지오의 아리아도 절대 만만치 않으니 그렇겠다 싶습니다.


16세기 후반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가톨릭을 타파하고 새로운 교회를 국교로 제창했습니다. 신앙과 예배의 순수성을 중요하게 여긴 이 일파가 바로 청교도(Puritan)이지요. 엘리자베스 1세 서거 이후 왕위를 계승한 제임스 1세가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면서 전제정치를 시작하자 당시 의회에 진출해 있는 청교도들이 국왕과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청교도가 지지하는 의회파와 왕당파의 대립은 1949년 크롬웰이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공화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이어집니다.


오페라 <청교도>는 1645-1649년 영국 서남부 폴리머스 항구 근처에 있던 청교도군의 성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인 청교도군과 스튜어트 왕가에 충성을 바치는 왕당파 군대의 전쟁 와중에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 전쟁에서 크롬웰이 승리해 찰스 1세를 참수하고 왕비 앙리에타(엔리케타)는 시녀로 가장해 가까스로 왕궁을 빠져나와 목숨을 건집니다.


왕당파 기사인 아르투로, 그를 사랑한 청교도군 사령관의 딸 엘비라, 엘비라를 사모한 청교도군 장교 리카르도, 적군을 사랑해 아픔을 겪는 엘비라는 돕기 위해 형님인 엘비라의 아버지에게 기어코 결혼 승낙을 받아내는 엘비라의 삼촌. 이렇게 네 사람이 극을 이끌어 갑니다.


등장인물


○ 괄티에로 발톤; 베이스, 청교도군 사령관

○ 조르지오 발톤; 베이스, 청교도군 대령, 괄티에로의 동생

○ 엘비라; 소프라노, 괄티에로의 딸

○ 아르투로 탈보; 테너, 왕당파 기사

○ 리카르도 포르트; 바리톤, 청교도군 장교

○ 브루노 로버트슨; 테너, 청교도군 장교

○ 엔리케타 디 후란치아; 메조소프라노, 참수된 영국 국왕 찰스 1세의 왕비


줄거리


[제1막] 영국 플리머스 근처 청교도군의 요새


성안에서는 성주의 딸인 엘비라의 결혼식 준비가 한창입니다. 병사들이 노래를 부르며 사라진 뒤로 청교도군 장교인 리카르도가 등장합니다. 그는 성주이자 청교도군 총사령관 괄티에로 발톤의 딸 엘비라를 사모해 결혼하려고 했지만 괄티에로 발톤이 마음을 바꿔 엘비라를 왕당파 기사인 아르투로와 결혼시킨다는 소식을 듣고 한탄합니다. 동료인 청교도군 장교 브루노가 그에게 군인 임무에 충실하라고 하지만, 리카르도는 사랑하는 엘비라와 결혼을 못 하게 되어 상심합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나는 영원히 너를 잃었구나

Or dove fuggo io mai? Ah! per sempre io ti perdei

https://www.youtube.com/watch?v=F2T1AIMHKnM


원래 괄티에로 발톤은 엘비라를 리카르도와 맺어주기로 약속했지만 엘비라가 왕당파인 아르투로를 끔찍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동생 조르지오 발톤에게서 듣고 생각을 바꾼 것입니다. 엘비라는 삼촌인 조르지오 발톤에게서 자신이 아르투로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도록 아버지를 설득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기뻐하며 연인인 아르투로를 만나러 서둘러 나갑니다. 엘비라를 만난 아르투로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기쁨을 나눕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한때 사랑은 나를 A te, o cara, amor talora

https://www.youtube.com/watch?v=MaLJXYQ1jxE


스튜어트 왕가의 중요한 죄수를 런던 의회로 호송하는 책임 때문에 괄티에로 발톤은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됩니다. 아르투로는 그 죄수가 크롬웰에게 처형당한 스튜어트 왕가 찰스 1세의 왕비 엔리케타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때 엘비라가 나타나 사랑하는 이와 결혼을 앞둔 기쁨을 노래합니다.


저는 귀여운 처녀랍니다. Son vergin vezzosa

https://www.youtube.com/watch?v=qqQ5qNet2Cc


아르투로는 사람들이 엘비라가 노래하는 데 시선이 쏠려있는 틈을 타 왕비를 말에 태워 요새를 빠져나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연적과 결혼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리카르도는 그들이 도망하도록 놔둡니다. 하객들 앞에서 아르투로가 다른 여인과 도망친 사실을 알게 되자 엘비라는 실성하고 자신이 아르투로와 함께 교회 제단 앞에 나선 것으로 착각하면서 행복했던 나날을 회상합니다. 삼촌 리카르도를 아르투로로 착각하여 행복한 결혼을 꿈꾸기도 하지요. 이 장면을 ‘광란의 장면’이라고도 하는데요, 아래에서 보시는 안나 네트렙코의 장면은 놀랄 만합니다. 아리아 후반부에 가면서 안나는 무대에 누워 무대 바깥쪽으로 목을 떨어뜨린 모습으로 노래를 이어갑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안나는 자신은 어떤 자세에서도 노래할 수 있다면서 그를 위해 어렸을 때 서커스를 배웠다고도 했습니다.


여기서 그의 목소리가 O rendetemi la speme... Qui la voce sua soave

https://www.youtube.com/watch?v=jIwLOcTNr50


[제2막] 성채 안


조르지오가 나타나 엘비라가 왜 이런 지경이 되었는지 성안 사람들에게 설명합니다. 이때 리카르도가 나타나 의회가 아르투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리카르도는 엘비라가 실성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마음이 움직입니다. 그런 리카르도에게 조르지오는 아르투로가 돌아와야만 엘비라가 살 수 있다며 리카르도에게 아르투로를 위해 나서달라고 설득합니다.


자넨 자네의 연적을 살려야 하네 Il rival salvar tu dêi

https://www.youtube.com/watch?v=vHPnnaPGSjI


[제3막] 성채 부근


도피 생활을 이어가던 아르투로는 엘비라를 다시 만나고 싶어 성채 쪽으로 몰래 다가오면서 옛날 그녀와 함께 부르던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때 성채 안에서 엘비라의 노래가 들려오고 드디어 두 사람이 재회합니다. 아르투로가 제정신으로 돌아온 엘비라에게 왕비를 구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자 엘비라는 그를 이해하고 기쁨의 아리아를 부릅니다.


그때 리카르도가 나타나 아르투로를 체포하자 그녀는 다시 실성합니다. 이를 본 아르투로는 <버림받은 줄 아는 가여운 그대여 Credeasi, misera!>를 부릅니다. 이 곡에 나오는 F5음은 모든 오페라를 통해 테너에게 요구하는 가장 높은 음입니다. 불세출의 테너 파바로티의 노래로 들어보시지요. 과연 파라로티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버림받은 줄 아는 가여운 그대여 Credeasi, misera!

https://www.youtube.com/watch?v=XHL67WxMGGw


그러나 사형이 집행되려는 순간 크롬웰의 전령이 달려와 왕당파의 사면 소식을 알리자 다시 정신이 돌아온 엘비라와 아르투로는 뜨겁게 포옹하며 막이 내립니다.


사실 이 장면은 이때까지 이어져 오던 긴장을 허무하게 무너뜨렸다 싶을 정도로 급하게 끝맺음하는 느낌을 줍니다. 극으로는 그다지 성공한 작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데요, 뭐 노래 듣자는 오페라이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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