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견디는 삶

-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by 다정


‘8월’이라는 단어를 이야기했을 때 무더위, 방학, 휴가가 아니라 ‘크리스마스’나 ‘눈’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8월’과 ‘크리스마스’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만남인 것처럼,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어울리지 않는 남녀의 말도 안 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8월’을 이야기할 때, ‘크리스마스’가 떠올려질 것이다. 어느 한여름 날 버스의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 때, 무더웠던 8월에도 크리스마스처럼 행복했던 이들의 8월이 문득 생각날 것이다.


빛과 직선, 감정의 전달과 감동

 <8월의 크리스마스>는 <봄날은 간다(2001)>, <외출(2005)>, <행복(2007)> 등의 작품을 낸 충무로의 멜로 거장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이다. 사랑의 감정을 능숙하게 다루는 허진호 감독의 연출은 빛을 자연스럽고 따뜻하게 사용하는 고 유영길 촬영감독의 정적이고 수직적인 카메라 앵글과 조화를 잘 이룬다. 이러한 연출 기법은 주인공과 관객의 감정의 동화를 이뤄내기 충분하다.

배우 한석규는 꼭 다시 한 번 연기해보고 싶은 배우로 늘 심은하를 말하는데, 아마 이 영화에서 같이 연기를 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영화는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로도 이목을 끌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석규의 절제된 연기와 청순한 심은하의 리즈 시절을 볼 수 있다는 것으로도 관객은 영화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꽃이 피다

 동네 변두리에서 초원사진관을 운영하며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노총각 정원(한석규 분)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8월의 어느 한여름 날, 20대 초반의 주차단속요원 다림(심은하 분)이 단속 차량 사진의 필름을 맡기기 위해 정원의 사진관에 들른다. 그렇게 둘의 인연이 시작된다. 첫 만남 이후, 다림이 필름을 맡기러 초원사진관에 자주 드나들며 둘은 가까워진다. 일하다 덥고 지칠 때마다 다림은 사진관으로 잠시 쉬러 오고, 정원은 그런 그녀 앞으로 선풍기를 돌려준다. 점점 다림과 정원은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되고, 정원은 밤마다 자신의 병과 외롭게 싸우면서도 다림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나간다. 꺼져가는 정원의 삶에 조금씩, 행복이라는 꽃이 핀다.

 다림의 표현 방식은 참 담백하다. “근데 아저씨, 오늘은 왜 반말해요?”, “아저씬 왜 나만 보면 웃어요?”, “아저씬 사는 게 재밌어요?” 참 ‘다림’스럽다. 아름답고 당당하다. “나, 들어가도 돼요? 나… 들어가도 되느냐고요.” 유리문 밖에서 사진관에 들어가도 되는지 굳이 묻는 것은 곧 정원의 마음에 들어가도 되느냐는 ‘다림’만의 표현 방식일 것이다. 놀이공원에서 첫 데이트를 하고 돌아오는 길, 다림은 정원의 팔에 슬쩍 팔짱을 낀다. 그녀의 솔직한 감정표현에 잠시 당황해 말을 더듬던 정원은 다시 자연스러운 일인 듯 이야기를 이어간다. 당신을 사랑해도 되겠냐는, 말없이 건네진 그녀의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을 한 셈이다. 사랑에 빠진 그들의 순수한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조용히 그들의 사랑을 지켜보게 한다.


담담한 생(生)에 대하여

 영화에서 정원은 항상 웃고 있다. 말 없는 웃음은 그의 깊은 배려와 사랑을 더 빛나게 한다. 허진호 감독은 밝게 웃고 있는 고 김광석의 영정 사진을 보고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죽음 앞에서 웃고 있는 모습을 통해 삶에 아이러니를 느낀 감독은 본인도 영화에서 모순을 행한다. 정원의 병이 무엇인지, 그가 언제부터 아팠는지, 심지어 그가 몇 살인지도 말해주지 않는다. 모든 생각과 감정을 관객에게 양보한다. 그리고 그 흔한 키스신 하나 없이,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그들의 행동만으로 정원과 다림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영화는 모든 게 그저 하나의 일상일 뿐이라는 듯 담담하게 흘러간다. 관객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고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을 담담히 서술하며 감정을 절제한다. 감독은 로베스 브레송의 필름카메라에 대한 자신의 해석처럼 관객의 감정에 ‘울지 않고 돌을 던진다’.

 정원과 다림의 사랑과 별개로 드러나는 또 하나는 정원과 아버지와의 사랑이다. 정원은 아버지에게 비디오테이프 사용법을 알려주지만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는 모습에 속상해 버럭 화를 낸다. 방으로 들어온 그는 자신이 죽은 후 홀로 남겨질 아버지를 걱정하며 비디오테이프 사용법을 적어 놓는다. 수없이 마음을 다스렸겠지만 두고 가야 할 사람을 생각하다 목이 메어 결국 울고 마는 정원과 불 꺼진 아들의 방 앞에서 담배를 입에 문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이별을 앞둔 부자의 아픈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혼자 웃어보는 수밖에

 첫 데이트를 했던 그 날 이후, 정원은 사라진다. 그는 병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하고, 다림은 영문도 모른 채 그를 기다리며 매일 문 닫힌 초원사진관을 찾아온다. 잠시 회복한 정원은 사진관으로 돌아와 홀로 영정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다림이 자신에게 남긴 편지를 읽고 그녀에게 편지를 쓰지만, 끝내 상자에 담아버린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다. 시간은 지나고 어느덧 한겨울이 되었다. 다림은 한여름의 따뜻하고 편안했던, 그리고 사랑했던 그 ‘아저씨’에 대한 기억으로 다시 초원사진관을 찾아온다. 정원의 옛사랑 추억이 서렸던 그 자리, 사진관 바깥쪽에 이제는 다림의 사진이 걸려있다. 어딘가 성숙해져 보이는 그녀는 그의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 전처럼 슬퍼하거나 울지도 않는다. 그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도 않는다. 남겨진 자신의 사진을 보며 이제는 그와 그의 사랑법을 이해한 듯 그저 미소 짓는다. 그 미소에는 그사이에 깃든 공백, 앞으로 있을 공백들이 선하게 담겨 있어 보는 이들의 가슴이 지근지근 저며오게 한다. 그리고 다림의 미소 위로, 정원의 목소리가 흐른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어김없이 8월은 지나갔고, 크리스마스는 다가왔다. 그는 말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랑을 하고 있다.” 그들의 만남은 끝이 났지만 그들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정원은 세상에 없지만 다림의 미소는 그의 사랑이 여전히 세상에 머물러 있음을 알려준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 사랑이 지속되는 죽음은 이런 모습으로도 존재한다. 어쩌면 사랑할 때의 기억으로 다림과 정원은 각자의 시간을 견뎌냈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20분은 대사 없이 장면이 흘러간다. 이는 그들의 사랑과 이별의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게 하며, 정원의 마지막을 보는 이들도 함께 맞이하게 한다. 동시에 우리 삶 속에서 이제는 가질 수 없는, 사라질, 소멸할 것들에 대한 ‘안녕’을 준비하게 한다. 이 영화는 슬프지만 슬프지 않은 척하는 걸까, 슬프지 않지만 슬픈 척하는 걸까. 무한한 의문을 던진 채, 그러나 ‘간직하다’의 모든 의미를 담아낸 채 끝이 난다.


8월의 크리스마스 - 한석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OST)

이젠 너를 남겨두고 나 떠나야 해

사랑도 그리움도 잊은 채로

고운 너의 모습만은 가져가고 싶지만

널 추억하면 할수록 자꾸만 희미해져

태연한 척 웃고 있어도

너의 마음 알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나의 손을 잡아주렴

지금 이대로 잠들고 싶어

가슴으로 널 느끼며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을 꾸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