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기억
무언가를 끊임없이 쓰는 행위는 내가 계속 반복했던 것이지만, 더 다양한 사람과 세상에 노출될수록 나는 빈 화면을 켜두게 되는 일이 잦아졌다. 레고 상자를 바닥에 쏟았지만, 몇 개 쌓다가 말아버리게 되는 모습이 중첩됐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데, 나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다소 교만하게 스스로에 취해 있던 유년시절에 비해 이젠 너무 많은 것을 잰다. 아무 생각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흰 곳에 채우던 때와 다르게, 자꾸만 잰다. 이 이야기가 나오면 누가 어떻게 생각할 것이고, 별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고, 얼마나 완성도가 있을 것이며 같은. 내가 좋아했던 행위는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꺼내는 그 자체였는데, 이제는 꺼내지도 않아 놓고 꺼낸 이야기가 완성되었을 때의 모양을 미리 걱정하고는 '그러니까 꺼내지 말자'라고 몇 글자 써지지 않은 흰 창의 '저장하지 않음'을 눌러버리고 만다.
나는 아직도 글을 쓰고 싶은 걸까.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걸까. 이런 계산 없이 마구잡이로 글을 쓰던 시절의 서인석은 몇몇 큰 칭찬과, 잦은 작은 칭찬들을 받았던 것 같은데, 계산하고 생각하기 시작해 버리니 아무것도 쓰지 못하게 됐다. 어른이 되면 그렇게 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그런 사람인 걸까. 그래도 나는 뭔가 쓰고 싶은 모양이다.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발생하는 건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멈추거나 하질 않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레고블록을 손 가는 대로 쌓는 것은 노력으로 되는 건 아니다. 그저 그렇게 움직였을 뿐이고, 그것에는 어떤 계산이 없다. 계산 없이 글을 써내기로 나는 계산해야 하나? 그럴 수 없다. 그저 계산 없이 글을 써 내려가는 그 순간이 언젠가 있으리라 막연히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