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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키가 머문 풍경을 걷다

미즈무라 미나에 『엄마의 유산』배경여행

by moonee


그날 밤 나는 다 읽지 못해 도쿄까지 가져가게 된 『엄마의 유산』이라는 소설을, 무더운 도쿄의 밤하늘 아래에서 시원한 맥주를 곁에 두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곤 내일 아침 일찍 하코네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설 중간 무렵, 주인공 미쓰키가 엄마의 죽음 끝에 하코네에 있는 한 호텔에서 장기 투숙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에 그려진 호텔의 모습이 너무나도 신경이 쓰인 나머지, 도쿄에 있는 동안 가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몇 해 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가마쿠라 여행에 『본격소설』이라는 책을 가져갔는데, 이 소설 역시 『엄마의 유산』을 쓴 미즈무라 미나에의 작품이었다. 혼자 머문 호텔 방에서 밤새워 읽고는, 다음 날 소설의 배경이 된 가루이자와, 오이와케를 찾아갔다. (이 이야기는 나의 여행 에세이집 『다정한 여행의 배경』에 담았다.)


소설은 주인공 미쓰키와 언니 나쓰키가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실버타운에서 환급받을 수 있는 비용에 대해 전화 통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미쓰키는 파리로 유학을 가서 데쓰오를 만나 결혼했고, 대학 강사와 번역 일을 하며 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성장했고, 50대인 지금도 겉보기엔 행복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어릴 땐 주말마다 요코하마로 피아노 레슨을 가는 언니 나쓰키의 가방을 들게 하는 등 엄마 노리코로부터 차별을 받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간병을 모두 떠안았다. 엄마 노리코는 서구 귀족 문화를 동경하며 더 높은 계급에 속하기 위해 집착하는 삶을 살았고, 그녀의 어머니이자 미쓰키의 외할머니는 일본의 신문소설 『금색야차』에 빠져, 자신의 삶을 『금색야차』의 주인공의 삶에 투영시켜 버렸다. 3대에 거친 모녀간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어, 『본격소설』만큼은 아니지만 꽤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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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키가 머문 하코네의 야마노 호텔 주변은 한적하기 그지없는 평화로운 호반 마을이었다. 하코네 관광의 중심지인 아시노호(芦ノ湖)가 있고, 이 호수에 해적선 스타일의 유람선을 띄워 관광객을 부르고 있다. 미쓰키와 노리코는 이 해적선 유람선의 품위 없음에 대해 비웃었지만, 나는 꽤 오래전 이 해적선을 탄 적이 있고 당시엔 그렇게 촌스럽단 생각을 하진 않았는데, 다시 보니 무척 촌스러운 배다. (그날은 시간대가 안 맞았는지, 멀쩡한 크루즈선만이 오가고 있었다.) 기왕 하코네까지 온 김에 근처 들러볼 만한 곳이 있을까 싶어 구글 맵을 뒤져보니 ‘하코네 역전 뮤지엄’이 있었다. 하코네 역전은 일본에서 매년 연초에 열리는 대학생 릴레이 경주 대회로, 1월 2일과 3일에 도쿄와 하코네 사이를 왕복하는 장거리 경주. 10개 구간을 각 팀의 선수 10명이 릴레이 형식으로 달린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갈 때 가족 모두가 NHK의 ‘홍백가합전’을 보고, 2일과 3일에는 닛폰 TV의 하코네 역전 중계를 보는 것이 일본 사람들의 전형적인 연말연시 풍경이다. 나도 종종 TV로 본 적 있고, 몇 해 전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라는 소설을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조금의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역시 러너. 들어가 보기로 했다. 솔직한 감상으론 입장료 600엔이 아까울 정도로 너무 협소한 뮤지엄이었다.


역전 뮤지엄에서 나와 어슬렁어슬렁 걸어, 소설의 배경인 야마노 호텔까지 간다. 중간에 약 500미터 정도 되는 삼나무 산책로도 있다. 키 큰 삼나무들이 시원시원하게 뻗어 있어 무더위를 막아준다. 삼나무길에서 빠져나오면 아시노호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후지산 뷰포인트라 불리는 스폿에 서 보아도 후지산은 보이지 않는다. 날이 그리 흐리지 않았는데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목적지로 향했다.


외관에서부터 역사와 기품이 느껴지는 호텔이었다. 『본격소설』 배경 여행으로 찾아갔던 가루이자와의 만페이 호텔 느낌도 났다. 만페이 호텔보다는 세련됨이 묻어났지만, 북적이는 관광지의 호텔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소설에는 이 호텔의 역사에 대해서도 꽤 자세히 적혀 있는데, 아시노호에 면한 이 호텔 부지에는 스위스 호반의 별장을 모방해 지은 한 남작의 별장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호텔 설명문을 읽어보니 미쓰비시 재벌의 4대 총수였던 이와사키 고야타(岩崎 小彌太)의 별장이었고, 전용 골프장까지 있었다. 지금도 이곳 야마노 호텔은 철쭉 정원으로 유명해서 매년 봄 많은 사람들이 찾아간다고 하는데, 이와사키의 별장 시절부터 30종이 넘는 철쭉을 심은 정원이 있었다고 한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둘러본 정원은 철쭉 시즌이 아닌지라 볼거리가 많진 않았지만, 소설에 나온 결혼식장이 있어 살짝 웃음이 났다. “성서 따위는 읽어본 적도 없는 수많은 일본인이 어느새 십자가를 내건 예배당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중략)… 이 호텔도 시대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이런 묘한 것을 세웠겠지만” 하며 냉소적인 시선으로 이 공간을 둘러본 미쓰키가 생각났기 때문. 정원 근처, 기분 좋게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에 노부부(가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미쓰키 역시 이곳에서 호감을 느낀 마쓰바라 씨와 마주쳐 이야기를 나눴으니까)가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 광경이 소설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이 호텔의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걷는다. (특히 스마트폰이 아니라 문고본 책이라는 점에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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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키의 외할머니는 고베의 게이샤 출신으로, 운 좋게 부잣집에 시집을 가놓고 아들의 가정교사와 사랑의 도피를 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외할머니 역시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야마노호텔로 변모하기 전 남작의 별장이었던 시절이다. 이곳은 몇 번의 개조를 거쳐, 현재의 모습은 프랑스의 고성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문득문득 이곳이 일본이 아니라 유럽인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역시 이유가 있었다.


철쭉 시즌도 아니고 여름휴가로도 좀 이른 시기여서인지, 투숙객은 많지 않아 보였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 등장하는 라운지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이 라운지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내가 방문했을 때도 노년의 부부 몇 커플과 초로의 여성 그룹이 있었다. 소설에 그려진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아니 완전히 똑같았고), 미쓰키가 젊은 여자와 바람난 남편을 떠올리며 노려보던 난로도 있었다.


“요는 장기 체류객 중에서 제대로 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거네요.”
가오루 씨가 시시덕거리는 어투로 선언했다.
미쓰키는 약간 놀라서 말했다.
“저도 제대로 된 게 아닌가요?”
“하지만 당신은 어젯밤에도 온몸이 빨간 도깨비처럼 무서운 얼굴로 난로를 노려보고 있었잖아요.”
— 『엄마의 유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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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대로라면 홍차를 시켜 마시는 것이 마땅하지만(실제로 이곳은 홍차가 맛있기로 유명한 호텔이다), 푹푹 찌는 이 날씨에 어쩔 수 없이 맥주를 시키고 말았다. 이곳 호텔의 오리지널 알트비어라는데, 캐러멜 맥아를 듬뿍 사용했고, 호텔에서 나는 천연수를 사용했다는 이 맥주는 굉장히 맛있었다. 평소 일본 소도시를 구석구석 다니며, 지역마다 반드시 있기 마련인 지역 맥주(‘지비루’라 부르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꼭 한 번은 마셔본다) 나도 이 호텔의 맥주는 충분히 마셔볼 가치가 있다고 느꼈을 정도로 제대로 된 맥주였다. 단맛이 강하지만 쓴맛도 함께 강해서, 다른 안주가 전혀 필요 없을 정도. 맥주만으로 완성체란 느낌이 들었다.


야마노 호텔을 다녀온 다음 날, 나는 미쓰키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지토세후나바시역에서 내려 마을을 걸었다. 지토세후나바시는 『본격소설』에도 등장하는 지명인데, 근처 지역엔 몇 차례나 왔음에도 지토세후나바시역에 내린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 작가 미즈무라 미나에의 본가가 근처였으리라. 그렇지 않고선 이곳의 과거와 현재를 그렇게 생생히 묘사할 순 없다.


역에서 내려 마을을 걸으며, 남아 있을 리 없는 미쓰키와 나쓰키의 집을 찾아본다. 언니 나쓰키를 좋은 집에 시집보내기 위해, 혼담이 들어왔을 때 체면을 세우기 위해 어머니가 좋아하는 서양풍으로 개축한 집이 있을까? 찾아보는 일이 생각보다 즐겁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야마노 호텔을 다녀온 후에도 『엄마의 유산』을 다 읽지 못한 상태였는데, 지토세후나바시를 걸으며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산책의 최종 목적지로 삼은 고마자와대학 근처 식당에 도착했을 무렵, 귀에서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흘러나왔고, 소설의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그렇게 안 해도 되는데.”
“네가 궁상맞은 데서 쪼들린 생활을 하는 게 싫어. 엄마의 유산은 역시 집을 마련하는 데 써. 2,100만 엔의 여분이 있으면 꽤 편해지지 않을까?”
고개를 끄덕이는 여동생의 볼에, 어른이 되고 나서는 언니에게 거의 보여준 적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 『엄마의 유산』 중에서


이 장면은 이 동네 풍경과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식당에 들어가, 내 생애 먹어본 피자 중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 시라스시소피자(잔멸치와 일본의 깻잎인 시소 그리고 치즈가 듬뿍 올라가 있다)와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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