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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Jan 14. 2018

볕이 바람을 마주할 때면  나무는 무거운 짐을 던다

미우라 아야코 <빙점>의 배경, 홋카이도 아사히카와


겨울방학 끝무렵 곰돌이가 그려진 이불 안에 들어가 방학숙제를 한다.

따뜻한 방바닥의 온도가 금세 배에 전해진다.

점점 어깨와 팔이 아파온다.


조금 쉬었다 할까?

어느새 스르르 잠에 들어버린다.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에 위치한 미우라 아야코 문학관에 도착한 것은 어느 겨울밤이었다. 시간이 그리 늦지 않았지만, 홋카이도의 겨울은 4시면 해가 모습을 감춰버리기 때문에 이미 한밤중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비에이 료칸에서 이틀을 머물며 하루는 아사히카와까지 올라가 보기로 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후라노의 한 카페에 들렀다가 아사히카와에 도착했다. 늦게까지 자버린 것도 문제지만, 화로가 곁에 있던 카페의 따뜻한 공기 때문에 엉덩이가 무거워져 버린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문학관 건물이 따뜻한 노란빛을 내고 있었다. 아직 들어가 볼 수 있겠다.



1922년에 태어나 1999년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미우라 아야코는 여러 병에 시달렸다. 결핵, 척추 골양, 심장발작, 직장암, 파킨슨병까지...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글을 써내려 갔고, 그중 <빙점>은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문학관에 걸린 여러 사진과 설명 중 ‘추위가 극심한 겨울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빙점>을 써 내려갔다’고 쓰여 있는 패널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겨울날 매서운 바깥 날씨, 따뜻하고 아늑한 작은 공간. 같은 자세로 겨울방학 숙제를 했던 기억이 떠올라, 그때의 온기가 온몸을 감싸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미우라 아야코가 쓴 <빙점>은 ‘인간의 원죄’를 다루는 소설이다. 아사히카와 시에 살고 있는 주인공 요코는 갓난아기 때 쓰지구치 게이조와 나쓰에의 집에 입양된다. 이 집엔 원래 루리코라는 딸이 있었지만, 나쓰에가 게이조의 후배 무라이와 불륜을 벌이는 사이 유괴를 당하고 살해당했다. 게이조는 자신의 아내를 용서하지 못하고 보육원에 맡겨져 있던 유괴범의 딸을 양녀로 들여 나쓰에에게 키우게 한다. 물론 나쓰에는 양녀 요코가 유괴범의 딸인지 알지 못한 채 정성스레 사랑을 주며 키운다.


바람이라곤 한점도 없다. 동녘 하늘 높이 햇빛에 반짝이며 떠있는 뭉게구름은 한 폭의 그림인 양 꼼짝도 하지 않는다. 땅 위엔 스트롬스소나무*들의 짧은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리워져 있다. 그림자는 마치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만 같다. 아사히카와 시 교외 가쿠라 읍에 있는 이 소나무 숲 바로 옆엔 쓰지구치 병원장의 저택이 조용히 서 있다. 반 양옥으로 지어진 이 집 근처에는 집이라곤 단 몇 채뿐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 <빙점>의 시작
(* 스트로브 잣나무를 칭하는 것으로 생각됨.)


미우라 아야코 기념문학관 ©istandby4u2


미우라 아야코 문학관이 반가운 이유는 소설의 주요 무대인 스트로브 잣나무 숲이 바로 곁에 있기 때문이다. 또 소설의 묘사처럼 스트로브 잣나무 숲을 지나 견본림에 들어서고, 300미터 정도 걸어가면 비에이 강이 보인다. 루리꼬가 눈을 감은 그 강변이다. 루리꼬의 죽음으로 이어져 있지만 요코에게는 추억이 깃든 숲이다. 숲에서 친구들과 줄넘기를 넘다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오기도 했고, 요코가 우유배달을 시작하며 매일 아침 5시에 눈을 떠서 제일 먼저 바라 본 창 밖 풍경이기도 했다. 나쓰에는 요코의 실제 아버지가 루리코를 죽인 사이시란 사실을 알게 되자 급식비를 제때 주지 않는 등 요코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넉넉한 집에 살고 있는 초등학생 요코가 우유배달을 다닌 것은 이 때문이다. 또 오빠 도오루의 친구 기다하라와 요코가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이던 제방을 넘어, 요코 손에 들린 소설 <폭풍의 언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걸은 오솔길이 이어져 있다.




그리고 내가 다시 미우라 아야코 문학관을 찾아간 것은 2년 뒤였다. 처음 찾아간 날 밤이 너무 깊어 있어 요코가 걸었던 숲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외국수종 견본림 外樹種見本林 ’이란 이름을 가진 이곳은 1898년 스트로브 잣나무 등의 외국 나무들을 홋카이도에서 키울 수 있을까 살펴보기 위해 조성한 인공 숲이라고 한다. 현재는 약 52종 6,00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2년 전 이곳에 왔을 때도 굉장히 고요한 느낌을 받았지만, 아침에 찾아간 숲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겨울의 햇살이 나뭇가지 위에 한 움큼씩 앉아 있는 눈덩이를 내리쬐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게 했다. 가끔 그 볕이 겨울의 바람을 마주할 때면 나무는 무거운 짐을 덜어 낼 수 있었다. 햇살을 좇아 나무 곁에 서 있던 남편은 몇 번이나 눈사람이 될 뻔했다.


비에이 강을 향해 나있는 산책로를 따라 혼자 걸어 보았다. 이렇게 많은 눈이 쌓인 아침인데, 발자국이 찍혀 있다. 두세 사람 정도가 먼저 걸어간 듯했다. 얽힌 나무 사이로 강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발자국이 끊겼다. 지금부터는 내가 길을 내며 걸어가야 했다. 세 발자국 정도 내디뎌 보았지만 운동화가 금세 축축해져서 그만두고 돌아섰다.


제방에 가까워지니 어느덧 정수리 위까지 올라선 햇살 아래 여전히 서 있는 남편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눈 뭉텅이가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은데... 그늘에선 도저히 있을 수 없었나 보다.



도오루는 요오꼬의 얼굴이 몹시 쓸쓸해 보여 몹시 놀랐다.

"눈은 참 깨끗하지, 오빠?"
"응……."
"그렇지만 향기가 없어."
"이렇게 많이 쌓여 있는 눈에서 향기가 난다면 큰일이야, 요오꼬."

도오루가 웃자 요오꼬도 덩달아 웃었다.

- “빙점” 중에서






INFORMATION

미우라 아야코 기념 문학관 三浦綾子記念文学館


개관 시간 : 9:00~17:00 (입장은 16:30까지)

*휴관일 : 6월~9월은 무휴 / 10월~5월은 월요일 (월요일이 휴일인 경우 다음날), 연말연시(12/30~1/4)

홈페이지 : http://www.hyouten.com/

위치  : 北海道旭川市神楽7条8丁目2番15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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