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삿포로의 여인'을 따라
소설은 사실 삿포로가 아니라 대관령의 이야기다. 요즘 유독 우리나라 소설을 많이 읽고 있다. 이태준의 달밤을 보러 가기도 했고, 한강이 그린 여수도 만났다. 그리고 책장에 꽂혀있던 이순원의 작품을 얼핏 보고 나서 대관령에 다녀왔다. 책의 띠지 뒤에 적힌 황정은 작가의 ‘고백한 적은 없지만, 선생을 이룬 것 중에 내가 은밀하게 샘내는 것이 있다. 선생의 대관령이다’란 고백을 듣고 일단 가본 것이다.
다녀와서 ‘삿포로의 여인’을 읽어 내려간 시간이 좋았다. 서울에 있지만 머릿속은 이미 대관령의 사계가 가득 담겨 있기 때문에 (나와 남편은 강원도를 자주 가기 때문에 대관령의 사계절을 모두 만나본 듯하다) 그 배경 안에 주인공들이 하나둘 들어섰다. 주호, 연희, 주호의 이모부, 길 아저씨, 그리고 동네 사람들...
‘삿포로의 여인’ 주인공 주호는 군대에 다녀와 학비를 벌기 위해 대관령에서 구판장을 하는 이모부 집에 2년 동안 머물게 된다. 그곳에서 구판장 맞은편에 있는 미라노 패션에서 일을 하는 연희를 만난다. 연희는 어딘가 이국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17살의 여자아이로, 주호는 중학생 때 어린 연희를 횡계 버스정류소에서 본 적이 있다. 그곳엔 국가대표 스키선수였던 연희의 아버지 유강표와 그를 사랑한 시라키 레이란 여자도 함께 있었다. 소설은 그들에 관한 기억을 더듬어가는 이야기다.
한강의 글을 읽었을 때처럼 한글의 아름다움에 탄복하는 경험은 없었지만, 나는 ‘삿포로의 여인’을 통해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얻었다. 삶에 대한 생각과 생활 태도, 생의 존엄 등에 대해. 소설엔 내가 요 직전까지도 몇 명이나 지나쳤을 법한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을 범인 凡人 으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짧은 몇 문장 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소설 속 인물들을 보다가 내 생각에 빠져 잠시 책을 덮어두는 시간이 필요했다. '난 누구처럼 살고 있지', '이 사람과 참 닮은 사람이 있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어.' 특히 도배일을 하는 자유인 길 아저씨가 등장할 때마다 책은 어김없이 닫혔다.
“이 사람은 수중에 돈이 떨어져야 연락이 되는구먼. 돈 있으면 어디 놀러 가고.”
그건 길 아저씨와 삶의 규범이 완전히 다른 이모부의 어법이었다.
(… 중략…)
주호는 앞으로도 자신은 절대 따라갈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길 아저씨의 생활 태도가 조금도 나쁘게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사는 사람이 귀해 이모부 앞에서도 은근히 역성 들어 응원하는 쪽이었다.
- ‘삿포로의 여인’ 중에서
그리고 나는 소설을 읽으며 거창한 풍경이 아니라 앙증맞은 열매 하나가 반가웠다. 마가목. 대관령엔 깊은 산속에 있다는 마가목이 삿포로에는 가로수로 있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르겠다던 연희의 편지글처럼 나는 마가목이란 단어를 보자마자 미소를 지었다. 지난해 홋카이도에서 결혼식을 올린 우린 이 마가목과 관련된 재미난 기억을 하나 갖고 있다. 29년 만에 홋카이도에 폭설이 내린 결혼식날 야외 촬영을 하러 웨딩드레스를 입고, 웨딩슈즈를 신고 밖으로 나간 나는 나가자마자 눈에 미끄러져 길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간신히 일어나 다시 걷고 있는데 뒤따라 오던 엄마가 내가 피를 뚝뚝 흘리며 걷고 있다 했다. 몸이 다 얼어버려 아무 감각이 없던 나는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빠른 시간 내에 촬영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야겠단 생각만으로 사진을 찍고, 다사다난한 결혼식을 마쳤다. 다음 날 남편과 나는 길을 따라 서있는 나무를 보고, 또 그 나무가 바닥에 떨어뜨린 열매를 보고 웃었다. 마가목 열매들이 새하얀 눈 위에 새빨간 점을 찍고 있었다. 연희는 모든 것이 낯설었던 삿포로 생활에서 유일하게 안심하게 만든 것이 마가목이었다고 말한다. 우리도 마가목 열매를 보고 어찌나 마음이 놓이던지… 연희와 같은 풍경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겠구나.
(마가목, 자세한 이야기는)
주호가 기억하는 연희의 첫 모습이 담긴 횡계 버스정류장에 들렀다가 서울로 돌아와 삿포로행 비행기표를 샀다. 그리고 ‘삿포로의 여인’을 다 읽었다. 아쉽게도 주호와 연희가 함께 기억하는 소중한 추억은 삿포로가 아닌 강원도 안에만 있다. 삿포로에 다녀와서 주호와 연희가 길 아저씨의 차를 타고 대관령에서 강릉으로 가서 다시 7번 해안 국도를 따라 양양까지 갔던 여정을 따라 가보고 싶다 생각했다.
내 기억 속에 잊을 수 없는 눈이 있어요.
눈이 내리면 오빠는 어떤 일이 가장 먼저 떠오르나요?
나는 첫눈이든 한겨울 눈이든 봄눈이든 내 기억 속 대관령의 어떤 눈이 떠올라요.
그 눈은 내 나이 열일곱 살 봄에 내렸어요.
ー‘삿포로의 여인’ 중에서
물론 가는 길엔 연희 기억 속 가장 소중한 눈이 있는 하늘목장도 들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