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여수의 사랑> 속 소제마을
<채식주의자>를 먼저 읽은 남편이 정말 좋은 소설이지만 권하진 않는다고 했다. 울적해질 수 있다고. 게다가 나는 어떤 작가가 상을 받고 나면 모두가 우르르 같은 작품을 읽는 일을 싫어한다. 그렇다고 상 받은 작품을 싫어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한동안 멀리 하다가 나중에야 읽고는 뒷북을 둥둥 두드린다. 남들은 이미 감흥이 식어버렸는데 나 혼자 ‘너무 좋다’며 흥분하여 떠들어 대곤 한다. 물론 호응을 얻지 못한다. 어쨌든 한강의 작품을 아직 읽고 싶지 않은 시기였는데, 여수 여행을 가려고 자료조사를 하다가 한강의 <여수의 사랑>이란 소설집을 발견했다. 그리고 몇 장을 넘기곤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한강의 문장을 읽지 않았던 나 자신이 안쓰러웠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나의 모국어가 이토록 아름답고 다채로운 표현을 품고 있었음을 그의 작품을 읽고 깨달았다. 꽤 섬뜩한 경험이었다. 지난 30년간 써온 나의 언어가 얼마나 미천한지 알게 된 사건이니까.
소설집 안엔 총 여섯 편의 단편소설이 담겨있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소설이 ‘여수의 사랑’이고. 나는 여수로 떠나기 전날 밤 ‘여수의 사랑’을 다 읽고 나서, 바로 지도 앱을 켜서 소설 속 지명을 검색해보았다. 가상의 지명일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곳은 실재했다. 여수에서 가보고 싶은 곳은 오로지 한 곳으로 좁혀졌다. 그리고 가을의 문턱에서 나는 여수에 도착했다. 소설 속 정선이 여수로 향하던 날처럼 폭우가 쏟아지진 않았다. 새벽에 약한 비가 잠시 내리고 지나간 시간이었다.
‘여수의 사랑’엔 두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자흔과 정선. 정선은 어릴 때 엄마를 잃고, 술주정꾼인 아버지에 의해 동생과 함께 바다에 내던져졌다. 자신만이 살아남았고, 그 기억은 극심한 결벽증을 낳았다. 집세를 나눠낼 룸메이트가 필요하지만 모두 정선의 끔찍한 결벽증을 보고 집을 떠났다. 그리고 어릴 때 기차에 버려진 사생아 자흔이 들어온다. 둘은 ‘여수’란 공간의 기억을 공유하게 된다.
여수에서 가봐야 하는, 가고 싶은 유일한 곳은 소제마을. 사람들이 북적이기 전에 가자고 새벽부터 집을 나선 우리는 너무 일찍 여수에 도착해버려 아침으로 게장을 먹고, 우선 향일암에 가보기로 했다. 그러나 향일암 진입로에서만 30,40분을 서있었을 정도로 사람이 많고, 주차할 곳이 한 곳도 없었다. 향일암을 눈앞에 두고 올라가 보기를 포기했다. 다시 여수항 근처로 와서 점심을 먹었다. 애초에 다른 일정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단 태도였다. 그러나 소제마을 방문만큼은 완전해야 했고 반드시 저녁 무렵 이어야 했다. 시간을 더 죽이려고 마을 입구에 차를 대고 긴 낮잠을 잤다. 눈을 뜨니 곧 해가 넘어갈 것 같은 시간이 되어 있었고 마을로 들어섰다. ‘여수의 사랑’ 속 자흔의 묘사처럼 ‘진짜 시골’이었다. 돌로 쌓은 담벼락을 타고 덩굴식물이 기고 있고, 대문들은 녹이 슬어 있다. 집마다 있는 감나무엔 탱글탱글한 감이 한가득 달려 있었다. 저녁밥 짓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동네에 사람이 많진 않아 보였지만 몇 명의 사내아이들이 마을회관 앞에서 축구공을 차며 놀다가 우리를 보고는 의젓하게 꾸벅 인사를 했다. 평범한 시골 풍경인데 어딘지 모르게 곰살궃다. 자흔이 이야기한 대로 마을은 앞에 둥그런 만과 바다를 두었고, 뒤로는 산이 부드럽게 이어져 있었다. 참 살기 좋은 곳이구나 생각했는데, 곧 이 지역에 휴양시설, 상업시설, 대규모 공동주택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역시나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구나.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고개를 넘어 내려가던 중 우린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너무나도 따뜻하고 강렬한 석양의 빛이 갑자기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이렇게 아름답고 노오란 황혼을 본 적이 있던가. 그것은 자흔의 눈시울을 붉게 만든 빛이었다.
그때가 저녁 무렵이었는데…… 완만한 뒷산 능선에는 해가 지고 있었고 그 주위로 새 깃털 같은 구름이 노다지처럼 노랗게 번쩍이고 있었어요. 그 풍경이 어쩐지 마음에 들어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대신 마을 길을 따라 올라가 봤지요.
…… (중략) ……
그냥 ‘아름답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다시 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 ‘여수의 사랑’ (한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