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보내는 다른 방법 1

by 쓰는 사람

최근 몇년간 쉴 때 주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았다. 평소에 글을 자주 쓰다보니까 쉴 때까지 책을 읽거나 쓰려면 피로하고 부대낀다고 느껴졌다. 읽을 기력이 없달까? 이것은 내가 스스로에 대해 가진 믿음, '나는 쓸 수 있는 에너지가 보통사람보다 적고, 사발에 담긴 물의 양처럼 딱 한정돼있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내 현실의 일을 잊고 머리를 안쓰고 몇시간을 보내야 힘이 충전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현상인 것 같다. 나한테 실제로 힘이 없어서 무기력했다기보다, 내가 스스로를 무기력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저번주 목요일은 영상을 보거나 휴대폰으로 쓸데없는 걸 하지 말고 시간을 보내보잔 생각이 들었다. 생텍쥐베리의 '야간비행'을 읽는데 90년대 초반즈음의 번역어로 느끼는 작가의 생각의 흐름이 취나물, 시금치나물처럼 담담하게 느껴졌다. 음, 좋아. 나쁘지 않은데. 그런데 너무 담담하고 건강한 맛이라 자극적인게 끌렸다. 아... 어제 아침에 밥먹을 때 보다말았던 SNL 리부트 7 현봉식 편을 다시볼까? 잠자기 30분전이라 보고 자면 딱인데. 현봉식(본명 현보람)은 나이보다 10살, 20살 많은 배역도 자연스럽게 소화해내는 배우인데 연기를 참 감칠맛나게 한다.

아니야, 그래도 오늘은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보기로 했잖아.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숙주나물을 먹어보려 한다. 아, 이 감칠맛이 나쁘진 않은데, 너무 지루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SNL을 봐선 안돼. 그 프로그램은 바탕에 깔려있는 정서가 지나치게 물질만능주의적이고, 외모지상주의적이고, 필요없는 욕설이 많아. 이것들을 웃음으로 포장되기때문에 폭력적인 생각들이 별거 아닌 것처럼 돼버려.

이 번역은 지나치게 옛날말 같은데. 요새 번역본은 없나? 나는 어느새 휴대폰을 쥐고 있었고 전원을 켰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으로 다른 번역본을 검색해보던 나는 어느새 바닥에 모로 누워있었고 번개장터앱에서 예쁜 옷이 없는지 검색해보고 있었다. 와... 스마트폰의 힘이 정말 세네, 그리고 습관이란 게 정말 무섭네. 한번 봉지를 뜯은 양파링을 딱히 먹고싶지 않은데도 계속 집어먹게 되는 것처럼 스마트폰을 한번 키니 한정없이 의미없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가끔씩 결론이 나지 않는 이런 저런 생각에 시달리다보면 가만히 있는 것 자체를 못견딜 것 같은 때가 있다. 머릿속에서만 계속 부정적인 쪽으로만 내닫는 생각들. 혼자 있을 때 머릿속 내 생각이 시끄럽게 이어질때면 나도 모르게 유튜브를 튼다. 보지도 않으면서 썸네일만 계속 넘겨본다거나, 내가 이런 걸 왜보는지도 모르는, 이비인후과 의사가 귀파는 영상같은 걸 틀어서 본다. 일종의 도피행위같은데 나는 도피를 무척 자주 하는 것 같다.

금요일에 잠잘 시간이 30분쯤 남았을 때 생텍쥐베리의 야간비행을 다시 잡았다. 비행장 총책임자 리비에르가 비행사들이 무사히 복귀를 못할까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눈이 감기고 피곤해서 책이 잘 안 읽힌다. 잠들기 전까지 영상을 안보고 시간을 보내보고 싶다.

'뭔가를 안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에는 '뭔가를 하고싶다'가 빠져있다. '나는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싶지?' 스스로도 좀 어이가 없지만 나는 이 생각을 안 가지고 있을 때가 많다. 어쩌면 스마트폰을 하냐, 안하느냐보다, '나는 어떤사람이고 어떻게 살고싶은가'에 대해 내가 나름의 생각을 안 가지고 있는것이 훨씬 본질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에 자주 묻지만 대답은 적극적으로 안하는 질문.

나는 그냥 거실바닥 한가운데 양반다리로 앉았다.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다. 눈 앞으로 화장실 문과 책장에 꽂힌 책들이 보인다. 의식적으로 호흡을 조절하며 명상을 하진 않는다. 그냥 앉아서 숨을 쉰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편하다. 내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영상은 티비 프로그램처럼 자극적이진 않지만 나름의 소소한 재미가 있는, 현실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쉴 때 꼭 뭔가를 안해도 되고,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쉼이란 생각이 든다. 가만히 앉아있는 건 꽤 멋진 일이란 생각이 든다.

어제 자기 전에는 머리 안쓰고 편히 있고싶단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웃다가'란 채널에서 진행자'최욱'이 여성 세명과 소개팅하는 개그영상을 보았다. 최욱씨가 방송인으로서의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해 아무도 선택하지 않고 또 욕은 안먹으려고 어정쩡한 핑계를 대는 걸 보며 혼자 깔깔깔 웃었다. 또 양파링 봉지를 뜯은 셈인데 그래도 이번엔 죄책감없이 맛나게 먹었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좀 어중간하고, 경계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 같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는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철저하게 실행하기보다는 편하고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내 삶에 해가 되는 것에 휩쓸릴 때도 많다.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확실히 추구하지도 않고, 의미없다고 생각되는 것에도 완전히 휩쓸리지도 않는다. 이쪽으로 가려 했다가, 다시 주춤주춤 저쪽에 빠졌다가, 이러면 안된다며 다시 바른 쪽으로 가보려고 애쓴다. 왜 이렇게 힘들게 사나 싶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나를 보존하고 지켜온 방식이기도 하다. 나는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면이 있어서 내가 완전히 망가지도록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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