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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Oct 09. 2022

<로스트 인 더스트> 강도를 간절하게 응원하게 되는..

삼류관객, 빛나는 영화

승용차를 몰고가던 두 사람이 은행을 털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복면을 쓴 두 사람은 권총으로 은행직원을 위협한다. 은행을 터는 장면이 다른 영화들에 비해 정적이다. 출근시간이라 사람이라곤 직원과 보안관 한명이 전부고 흉기라고 해봐야 소박한 권총 두자루가 전부다. 기관총과 버스와 폭탄이 동원되는 '다크나이트' 조커의  은행털이 장면에 비하면 구멍가게에서 츄파춥스 훔쳐나오는 거나 다름없다. 이 영화는 액션장면이 그다지 화려하다고 볼 순 없지만 세부사항 하나하나를 챙긴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이야기에 몰입하게 한다.


이 강도 한쌍은 형제다. 형은 출소한지 얼마 안된, 인생의 1/3을 감옥에서 보낸 양아치다. 동생은 석유회사에서 노동자로 일하다 실직했다. 아내와는 이혼했고 둘사이에 고등학생인 아들이 한 명 있다.


은행을 터는 데에는 사연이 있다. 형제에게 재산이라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겨놓은, 비쩍 마른 소 한마리가 있는 농장이 전부다. 형편이 어려웠던 어머니는 생전에 농장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는데 원금과 이자를 갚지 못해서 조만간 은행에 농장을 빼앗기게 된다. 어머니가 죽은 뒤에 이 땅에 석유가 매장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형제는 대출금을 갚고 농장을 지키기 위해 은행을 털기로 한 것이다. 형제가 은행을 털기로 한 건 동생의 아이들을 위해서다. 아이들이 자신처럼 못 배운 노동자, 전과자로 살지 않길 바라서이다.


이 영화는 공공연하게 미국의 은행을 비난한다. 텍사스 미들랜즈 은행은 단돈 몇만달러로 수백만달러의 잠재적 값어치가 있는 농장을 꿀꺽 삼키려 했다. 은행이 금융제도를 통해 합법적으로 서민을 수탈하는 건 아무도 문제삼지 않지만, 은행으로부터 재산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은행강도는 범죄가 된다. 이 영화는 은행을 터는 두 형제를 통해 진짜 악랄한 강도는 누구인지 관객에게 묻는다. 영화 내내 모래바람만 날리는 텍사스의 황량한 풍경이 펼쳐진다. 제자리를 그악스럽게 지키고 있는 은행 주변에서는 지역의 활기도, 사람들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은행건물이 주변의 모든 생명력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만 같다.


은행은 사람하고 달라요. 사실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은행이 하는 일을 싫어하지만 은행은 상관 안합니다. 은행은 사람보다 더 강해요. 괴물이라고요. 사람이 은행을 만들었지만, 은행을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분노의 포도>중에서


은행의 손아귀에서 그리 쉽게 벗어날 수 있을리 없다. 마지막으로 털러 간 은행에서 동생은 지역 자경대가 쏜 총에 배가 뚫리는 관통상을 당한다. 차를 타고 달아나는 형제를 총을 소지한 지역주민들이 차가 뒤쫓는다. 피를 너무 흘려 조수석에 앉은 동생의 의식이 혼미해져갈 때 형은 손바닥으로 동생의 뒷통수며 뺨을 철썩철썩 친다. 어떻게든 정신차리고 이 고통을 꾹 견뎌내야 넌더리나는 가난을 끊을 수 있다. 자식에게 진짜 삶을 물려줄 수 있다.


영화는 은행강도 형제와 둘을 좇는 보안관 둘을 번갈아가며 보여주는데 두 쌍 다 성격이 상극이다. 동생은 이성적이고 침착한 반면에 형은 다혈질에 즉흥적이다. 은행에서 훔친 돈으로 은행빚을 탕감한다는 기발한 전략은 머리 좋은 동생에게서 나왔다. 형은 밥을 먹다 예정에도 없이 식당 근처에 있는 은행을 털거나 사람들과 싸워서 동생을 곤란하게 만든다. 인물의 성격과 이야기의 전개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어 이야기에 설득력이 있다.


정년퇴임을 앞둔 늙은 보안관 마커스와 인디언 혈통의 보안관 알베르토가 나누는 대화가 흥미롭다. 마커스는 성격이 짖궃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알베르토에게 인디언과 관련된 인종차별적 농담을 하는데, 알베르토는 마커스의 짖궃은 성격에는 이골이 나있을 뿐더러 이 심술궃은 할아버지가 속으로는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아서 농담을 무던하게 받아넘긴다. 심지어는 마커스가 '인디언 함성 발사!' 했을때 '아우~!!'하며 늑대 울음을 흉내내기까지 한다. 


평생동안 보안관으로 살아온 마커스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있다. 두뇌회전이 빠른데다 연륜까지 있어 현장의 작은 단서에서 사건의 큰 그림을 읽어낸다. 제프 브리지스는 '더 브레이브'와 '헤이트풀 8'에서 늙은 현상금사냥꾼 역을 맡았는데 이 영화의 역할과 유사한 분위기를 풍긴다. 꼬장꼬장한 성격에 말 하나는 청산유수고, 냉소적인 농담을 툭툭 던지고, 그러면서도 실력하나는 으뜸인 이런 역할에는 '제프 브리지스'가 딱이다. 그는 평생 맡은 역을 잘해내기 위해 애써온 연기의 장인이다.


영화는 강도와 보안관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은 채 비정하고 비통한 현실를 묵묵히 보여준다. 영화가 끝나면 허무하기보다 막막한 마음이 든다. 4년에 한번 정도 나오는 명작이라 생각한다.

※<분노의 포도>를 읽은 적은 없지만 우연히 보게 된 위 구절이 뇌리에 남았다. 이따금씩 은행에 들를 때마다 창구에 앉아있는 직원에게 '혹시 선생님도 은행을 싫어하세요?'라고 물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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