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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그늘 Feb 07. 2022

허벅지 사이로 비치는 한줄기 빛!

44와 77이 리바이스 매장에 가면

"열여덟 살 땐 아무거나 먹어도 

똥 한 번 싸고 나면 

몸매가 그대로잖아요. 

허벅지 안쪽도 비어 있어요. 

그래서 발을 모으고 서면 

허벅지 사이 공간으로 

무한한 가능성의 빛이 밝게 비추죠."

- <앨리 웡: 베이비 코브라> 중에서 


<섹스 앤 더 4티> 2화 



시착만 했던 바지 팝니다?

나의 옷장엔 매장에서만 입어본, 집 밖에 나가지 못한, 사실상 새 바지라 할 만한 바지가 몇 벌 있다. 그 바지들의 역사는 대충 이렇다. 


1. 매장 피팅룸에서 입고 나와 거울 앞에 선다. 

  지퍼는 채웠지만 예상한 핏과 조금 (많이) 다르다. 

  배, 허벅지, 엉덩이 가운데 한 군데 이상이 곧 터질 것 같다.  

  하지만 평소답지 않게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  

  '조금만 살 빼면 예쁘겠는데?' 

2. 집에 돌아와 바지를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둔다.  

3. 새 바지를 개시하기로 마음먹는다.    

  설레는 맘으로 입다가 이상함을 느낀다. 

  바지가 줄어든 것 같다.   

4. 며칠 뒤 다시 입는다. 

  확실히 바지가 줄었다. 

5. 바지를 구석에 처박는다. 

6. 몇 년 뒤 옷장 정리를 하다 바지를 발견한다. 

   혹시나 하고 입어본다. 

   내 손을 오랫동안 타지 않은 옷은 나를 거부한다.  

7. 고민한다. 

   팔까, 기부할까, 살을 좀 뺄까?


... 나만 이래?



라지와 엑스라지, 스몰과 엑스스몰 

내가 L와 XL 사이에서 고민할 때, 친구 W는 S와 XS 사이에서 고민한다. 뭐, 그럴 수 있다. 세상엔 다양한 사이즈가 존재하니까, 웬만한 브랜드들은 한 디자인의 옷을 '대중소' 사이즈로 판매하겠지(이게 정말 '대자'인지 따지고 싶을 때도 있지만). 


나는 168cm의 키에 "어릴 때 수영했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안 했다!) 넓은 어깨와 등을 가졌다. 그래서 '적정 체중'이던 시절에도 S 사이즈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쇼핑할 때 넘사벽 케미를 자랑하는 W는 나와 신장'만' 같다. 작은 두상에 얇은 몸을 가졌고, 흔히 말하는 '콜라병' 몸매다.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친구들 사이에서 '모델 몸매'로 통한다. 출산 후 두 사이즈 이상 업그레이드한 친구들은 볼 때마다 악담 조로 경고했다. "너 진짜 애 낳고 안 퍼지기만 해 봐, 안 놀아!" 본인도 나잇살이 쪘다고 하지만, 그래 봤자 2~3kg? "2kg는 주말에 폭식만 해도 느는 무게야. 10kg 이상 찐 사람만 인정한다." 


며칠 전 우리는 아웃렛에 갔고, 대부분의 시간을 리바이스 매장에서 보냈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리바이스 상설 할인 매장은 개미지옥이다. "2개를 사면 1개 공짜"라는 '2+1' 상술은 하나만 살 걸 꼭 3개씩 사게 만드니까. 자칭 '스마트한 소비자'들은 "가격이 가장 저렴한 제품을 '+1'으로 계산합니다"란 안내를 받고 무한 리필 고깃집에 간 대식가처럼 자신한다. 그 말을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우리는 성공적인 '2+1'을 위해 달렸다. 입고 나와서 보(여주)고, 입고 나와서 보(여주)고...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한 가지 디자인의 아이템을 두 사이즈씩 챙겨 피팅룸에 들어가는 것까진 같은데, 우리 둘의 입는 순서가 달랐다. 


청바지를 예로 들어 보자. 


내가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청바지를 찾아 허리 사이즈 30과 32를 들고 들어갈 때, W는 25와 26을 들고 피팅룸에 들어갔다(워워, 벌써부터 동정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내가 32 사이즈 바지를 먼저 입을 때, 친구는 25 사이즈를 먼저 입었다. 


내가 32 사이즈를 입고 나와 거울 앞에 서서 '30은 굳이 안 입어봐도 되겠군' 생각할 때, 25 사이즈를 입고 나온 W가 물었다. "이게 잘 맞는 거야?" 나는 친구의 하체를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구석구석 바지핏을 체크했다. 가장 먼저 눈길이 간 건 잘록한 허리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곡선. 추억의 죠다쉬 청바지 광고가 떠오르는 예쁜 엉덩이였다. 허벅지는 또 어떤가? 오자 다리도 아니면서 두 발을 모으고 서면 허벅지 사이에 여유 공간이 있었다. 허벅지 사이로 쏟아지는 빛을 보며 나는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사랑하는 친구가 25 입는 것을 시샘 하지 않게 하시고, 제가 가진 '지방 많은 안다리 살'을 미워하지 않게 하시며...'   


친구는 "나이가 들어서 꽉 끼는 바지를 입으면 배가 아프다"라며 이번엔 26 사이즈를 입었다. 살짝 여유 있게 예쁜 핏.  


그나저나 우리는 왜 입는 순서가 달라? 생각해 보면 (아득하긴 하지만) 내게도 작은 사이즈부터 입던 때가 있었다. 작은 사이즈가 너무 꼭 맞으면 한 사이즈 더 크게 입어 보고 거울 앞에서 고민하던 적정 체중의 시절 말이다. 하지만 피팅룸 안에 붙어 있는 당최 안전거리 확보가 안 되는 거울 앞에 서서 집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두툼한 내 몸을 보며 한숨 쉬고, 아무리 숨을 참고 뱃살을 이리저리 팬츠 안에 넣어보아도 올라가지 않는 지퍼에 육두문자를 뱉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나는 큰 사이즈를 먼저 입기 시작했다.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한 조삼모사 쇼핑팁이랄까? 


먼저 입은 큰 사이즈가 잘 맞으면 안도했고, 때때로 좀 크다 싶을 땐 입 꼬리가 올라가기도 했다. '이거 너무 크네. 한 사이즈 작은 걸로 입어야겠다.'  



피팅룸에서 다지는 우정 

501 청바지가 제 주인을 찾은 듯 핏이 예쁘게 떨어지는 친구를 보다 '시착만 해 본' 나의 501 바지가 떠올랐다. 몇 년 전, 같은 매장에서 남편이 청바지와 청재킷을 살 때 '+1'으로 사서는 여태 팔지도, 기부하지도, 살을 빼지도 못해 옷장 구석에 처박히고 만 비운의 바지. 


25와 26 사이에서 한참 고민하던 친구는 살짝 여유 있는 26 사이즈를 샀다. 이날 나는 친구의 501 바지보다 2배 비싼 '리바이스 레드' 라인의 (남녀 공용) 바지를 샀다. 뱃살 부자가 편애하는 밑위가 긴 와이드 팬츠였다. 


위기는 있었지만 이날 우리 '사이'는 더 가까워졌다. 32와 25에서, 32와 26으로. 나도 '여유 있게' 32를 샀으니 (입어보진 않았지만 30도 '꼭' 맞았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 사이(즈)는 더 가까워질 것이다. 나는 친구의 허벅지 사이로 비치는 빛을 보며 기도했다. 


부디, 집에 있는 제 501 청바지가 잠기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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