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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그늘 Aug 09. 2023

넌 나의 처음은 아니지만 마지막이야?

당신은 나의 끝사랑, 영원한 나의 끝사랑.

<섹스 앤 더 4티> 16화


나는 ‘에친자’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에 미친 자. 극장에서 N차 관람을 했고, VOD는 평생 소장용으로 구매했으며, 지난 입춘에는 부적처럼 집에 눈알 포스터를 들였다. 양자경 언니의 오스카 수상을 기원하고 축하하며 몇 달을 보냈고, 봄부터 8월만 기다렸다. 선주문 제작하는 OST LP가 8월에 배송되기 때문이다.  


양자경이 연기한 ‘에블린’의 현재는 ‘이생망’이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선택한 미국 이민. 하지만 아메리칸드림도, 두 사람은 평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엔딩도 현실에는 없었다. 꾸역꾸역 운영 중인 코인 세탁소는 세무당국의 조사에 시달리다 압류될 판이고, 하나뿐인 딸은 살이 찌고, 옷은 ‘놈처럼’ 입고 다니며, 애인은 ‘백인’ ‘여자’다.


이 와중에 남편 웨이먼드는 희희낙락이다. 세탁물을 비롯한 곳곳에 인형 눈알을 붙여 놓고 “행복할 거 같아서” 타령을 하는 남자, 2년 동안이나 시달리다 가게가 가압류에 걸린 상황에 세무조사원에게 한가하게 쿠키나 갖다 주는 남자. 세탁기 속 빨래만큼이나 지겹게 돌아가는 삶 속에서 에블린의 눈은 텅 비어 있다.


“나의 에블린, 난 당신을 알아.

늘 뭔가를 이룰 기회를 놓쳤을까 전전긍긍하지.

이 말을 해주러 온 거야. 그 모든 거절과 그 모든 실망이 당신을 여기로 이끌었어.

이 순간으로. 절대 잊으면 안 돼.”


다중우주 속 수많은 에블린 가운데 최악의 에블린. 만약에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이 남자를 따라가지 않고 수많은 꿈 중 하나를 펼쳤더라면? 에블린은 ‘버스 점프’를 통해 다른 우주에서 무술을 연마해 (현실의 양자경처럼) 액션 스타가 된 에블린을 보고 마음이 요동친다. 이렇게 멋진 세계가 있었는데, 나는 왜 이 세계에서 내가 선택한 남자를 매일매일 지긋지긋해하며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지?


“당신이 없는 내 삶을 봤어. 너무 근사했어.

아버지 말씀대로 따라가지 말 걸.”


인생은 선택의 연속. 주먹을 쥐고 “그래 결심했어!”라고 비장하게 선언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실패의 길을 택한 최악의 에블린. 알파 웨이먼드는 말한다.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무엇이든 너무 못하니까.” 감동해야 하는 건지 약 올라야 하는 건지, 어쨌거나 주먹을 꼭 쥐게 만드는 결정적인 말.


남편은 극장이 아닌 거실 소파에서 나와 함께 <에에올>을 봤다.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나는 나의 웨이먼드에게 물었다.


그대는 다시 ‘선택’해도 나야?



#만약에 말이야, 우리

<에에올>의 다중우주 가운데 <화양연화>풍 우주, ‘화양버스’에서 에블린은 스타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웨이먼드와 헤어지고 무술을 연마해 액션배우가 되었다.

플래시 세례 속 레드카펫을 밟고 들어간 시사회장. 에블린은 계단 끝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웨이먼드를 발견한다. 예상과 달리 성공한 사업가가 된 웨이먼드. ‘데이지’ 앞에 다시 등장한 위대한 ‘개츠비’처럼 광채가 난다. 아무리 다른 우주라지만, 빨래방 웨이먼드와 너무 다른 화양버스 웨이먼드. 에블린은 다시 설렌다.


하지만 화양버스 웨이먼드가 그 옛날 두 사람이 헤어지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묻자 찬물을 얻어맞은 표정을 짓는다. 그 결과를 너무 잘 아니까, 그랬다면 빨래방이나 하면서 세금을 내느라 허덕거릴 거라고.


경험해 보지 못해서일까? 같은 경험도 다르게 받아들일 사람인 걸까? 화양버스 웨이먼드의 반응은 에블린의 예상을 뒤엎는다.       


당신이 또다시 내게 상처를 준대도 이 말은 하고 싶어.
다른 생에선 당신과 함께 빨래방도 하고 세금도 내며 살고 싶어.




#나 가거든

몇 년 전 방영했던 싱글 부모님 친구 만들어주기 예능을 봤다.


배우 A는 오랜 시간 엄마를 병간호하다 혼자가 된 아빠에게 친구가 생기길 바란다고 했다. 엄마의 마지막 편지에 “너희 아빠 짝 찾아줘”라고 쓰여 있었다나. 눈이 그렁그렁해서 말하는 A를 보며 코끝이 시큰하다가 갑자기 찜찜해졌다.


아빠였어도 딸에게 그런 편지를 썼을까? 나 가거든, 부디 너희 엄마 짝 찾아주라고? 글쎄.


강원도로 여행을 가던 길. 뒷좌석 쌍둥이의 재잘거림이 멈추고 실로 오랜만에 둘만의 대화. 나는 며칠째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을 했다.


자기 집 부엌에 소금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남편아, 날씨가 덥다고 나한테 여름 바지 좀 사달라는 남편아. 있잖아, 나 정말 궁금한 게 있어. 나 가거든, 너 어떡할래?


만약에, 로 시작하는 가정법 대화를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다고 여기는 극 I 남자는 ‘또 시작이군’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은 듯 나를 보며 말했다.   


“이거 하나는 믿어도 돼.”


오랜만에 보는 보조개 미소, 살짝 설렜다. 뭔데? 뭘 믿어도 돼?


“난 절대 결혼은 안 해.”


그러니 걱정 말고 편히 눈 감아라? 웬일로 다정하다 했다, 이걸 그냥!




#아무튼 해피엔딩

내가 바라는 ‘나 가거든’의 해피엔딩은 영화 <엽기적인 그녀>(2001) 속 <소나기> 패러디다.

“여자애가 죽으면서 추억이 담긴 옷을 같이 묻어달라는데 그게 안 슬프니?” ‘견우(차태현)’의 말에 ‘그녀(전지현)’는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뒤가 맘에 안 든다고 말이다.  


‘그녀’는 <소나기>의 엔딩을 다음처럼 바꾼다.


밤중 부모님의 대화를 듣다 소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고 눈물을 훔치는 소년. 그런데 이어지는 아버지의 말에 소설의 장르는 공포로 바뀐다.


“그런데 참 이번 계집애는 어린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지가 죽거든 저를 업어줬던 사내애를 같이 묻어달라고, 그것도 산 채로 묻어달라고 했대.”


그렇게 산 채로 묻힌 나의 첫사랑(끝사랑?)…. 내 맘 알지? 나 가거든, 너도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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