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짓고 삶이 달라졌다는 판타지
'무데뽀' 정신으로 집짓기를 향해 '돌진'한 원동력의 팔 할은 TV 프로그램이었다. 직장과 육아 퇴근까지 끝낸 흔한 밤이면 TV 앞에 몸을 구겨 누웠다. 오늘도 참 어제 같았다, 내일도 오늘 같겠지. 무기력한 표정으로 채널을 돌리다 눈길이 머무는 화면은 <나는 자연인이다>, <건축탐구 집>과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속세의 각종 욕망을 내려놓지 못할 내 수준이 뻔하기에, 산속에서 훌렁훌렁 날아다니는 '자연인'은 대리만족의 기쁨을 선사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흥미진진했다. 아파트가 아닌 다른 형태의 집에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성공 스토리'는 어떠한가. 그들은 고비마다 날 일으켜 세웠다 해도 과장이 아니다.
세상에 없는 싸고 좋은 땅을 찾아 삽질하고 다닐 때도, 남편과 의견 차이와 금전적 부담으로 집짓기를 포기해야 하나 싶던 순간에도 그들의 이야기는 날 채찍질했다. 포기하지 말고 달리라고, 행복이 바로 '저기'에 있다고.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전원주택에서 살게 되었는데, 사실 몇 달을 지내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이들은 마당에서 뛰어노는 것보다 게임과 유튜브를 더 좋아했다. 눈만 돌리면 창밖으로 펼쳐지는 근사한 풍경조차 끝내지 못한 오늘과 내일의 일들을 걱정하느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쓸모없는 물건을 두지 않겠다며 수납장도 없애고, 옷방도 한 사람이 겨우 오갈 정도로 작게 만든 결심이 무색하게 갈 곳을 잃은 물건과 옷이 집을 점령했다. 그 물건을 정리하고자 구입한 정리함을 다시 정리하기 위해 또 다른 수납함을 검색하고 있었다. 기똥찬 글을 뽑아내겠노라 야심차게 설계한 '서재'는 사고 싶은 비싼 책상과 의자를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창고로 변했다.
결혼 10년째니까, 주말이니까, 명절이니까 때맞춰 변함없이 부부싸움도 계속됐다. 어리둥절했다. 이게 아닌데. 집 짓고 살면 삶이 막, 확 달라진다면서요? 비둘기처럼 다정한 우리 집은 어디로 가고 왜 삶은 그대로인 거죠?
집짓기라는 판타지 여행
어쩌면 내게 집짓기란, 저기 어딘가에 있을 무지개를 찾아 떠난 판타지 여행이었는지 모르겠다. 집만 짓고 살면 드라마틱하게 행복한 인생이 짠하고 전개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집을 바꾸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은 페이크고 내심은 한 방에 삶을 바꾸고 싶은 얄팍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돌이켜보면 현재의 '꼬라지'가 만족스러웠던 순간은 별로 없었다.
취직하기 전에는 테이크아웃 커피를 폼 나게 들고 다니는 직장인이면 좋겠네 했지만, 막상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직장만 그만두면 원이 없겠네 노래를 불렀다. 아파트에 살 때는 아파트만 벗어나면 행복의 나라로 갈 줄 알았다. 삶을 바꾸려면 나를 바꿔야 하는데 나는 내버려 둔 채 '내 삶은 왜 이러나' 바보 같은 질문만 던지고 있었다.
어제처럼 별일 없이 사는 오늘의 고마움을 모르고, 이벤트처럼 '행복'이라는 '사건'이 벌어지는 '순간'을 갈망했다. 전원 속의 내 집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도깨비방망이가 아닌데 고작 집 한 채 짓고 인생이 절로 달라지길 바랐던 못난 도둑놈 심보를 겸허히 반성했다.
분명한 건 집을 짓고 조금 다르게 산다고 삶이 막 그렇게 저절로 바뀌진 않는다는 것이다. 집은 기회를 줄 뿐, 어떻게 살 것이냐는 내게 달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게 행복일까.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행복이란 게 저 먼 곳 너머에 있는 무지개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겠다. 무지개는 필요 없다.
'저게 행복이지'가 아니라 '이게 행복이야'라는 마음에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이제는 그 과정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텅' 비어 있는 줄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남겨 둔 배달 앱을 지우면서, 정리를 정리하기 위한 정리 상자의 가격비교 검색을 그만두면서. 집의 유일한 수납공간인 싱크대 하부장을 이사 2년이 다 되어 가는 오늘에야 마주하며 켜켜이 쌓아 올린, 집짓기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웅장한 욕심을 털어내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