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무도 모른다]
도쿄의 낡은 아파트, 엄마와 네 남매가 이사를 옵니다. 하지만 이웃들에게 허락된 존재는 12살 큰아들 아키라뿐입니다. 나머지 아이들은 여행 가방 속에 숨어 들어왔거나 밤늦게 숨죽여 움직여야 하는 그림자들입니다.
"들키면 같이 살 수 없어."
엄마가 남긴 이 말은 아이들을 집안이라는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어느 날, 엄마는 크리스마스에 돌아오겠다는 약속 대신 약간의 돈과 쪽지만을 남긴 채 증발해 버립니다.
엄마가 떠난 후, 아키라는 가장이 됩니다. 편의점에서 유통기한 지난 김밥을 얻어오고, 동생들의 머리를 삐뚤빼뚤하게 깎아줍니다. 전기가 끊기고 수도가 멈추는 순간에도 아이들은 소리 내어 울지 않습니다. 울음소리가 벽을 넘어가는 순간, 이 위태로운 보금자리마저 빼앗길지 모른다는 공포를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일까요.
심리학에서는 이를 부모화된 아이라고 정의 내리곤 합니다. 아이가 아이답게 어리광 부릴 권리를 반납한 채 묵묵히 어른의 짐을 지는 그 표정. 그것은 어쩌면 강인함이 아니라 기댈 곳 없는 어린 영혼이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두를 수밖에 없었던 슬프고 단단한 방어막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영화 제목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몰랐을까요? 이웃들은 복도에서 마주치는 아키라의 지저분한 옷차림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굳이 말을 걸지 않습니다. 편의점 직원은 매일 밤 찾아오는 아이의 사정을 짐작하지만, 깊이 묻지 않습니다.
그들을 비난하기엔 우리의 모습도 너무 닮아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는 순간, 내 평온한 일상에 균열이 생길까 두려워 고개를 돌려본 적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나요?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건 거창한 악행이 아닙니다. 옆집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알면서도, 나의 편의를 위해 모른 척 지나가는 그 무심함. 어쩌면 그것이 아이들을 가장 춥게 만든 진짜 겨울바람이었을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란 진정한 악은 뿔 달린 괴물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기를 멈춘 평범한 사람들의 무사유(無思惟) 속에 깃들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아이들은 죽음이 문턱까지 차오른 순간에도 베란다에 버려진 컵라면 용기에 흙을 담고 꽃씨를 심습니다. 막내 유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도 아키라는 오열하는 대신 동생이 좋아했던 초콜릿을 가방에 함께 넣어줍니다. 그리고 비행기가 보이는 언덕에 가만히 묻어줍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끝내 아이들의 눈물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흙을 덮고 다시 터벅터벅 걸어가는 뒷모습을 비출 뿐입니다. 우리는 그 장면에서 희망을 읽고 싶어 하지만 척박한 흙 속에서도 기어코 피어나는 그 꽃은 희망이라기보다 그저 살아있기에 멈출 수 없는 서글픈 생명력에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처절한 몸짓 앞에서 우리가 섣불리 희망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려도 되는 것인지 망설여집니다.
영화가 끝나도 아이들은 여전히 도시 어딘가를 걷고 있습니다. 기적 같은 구원도, 극적인 해결도 없습니다. 화면은 꺼졌고 우리는 다시 따뜻한 방으로 돌아왔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해결되지 않은 돌멩이 하나가 얹힌 기분입니다. 길을 걷다 유난히 큰 옷을 입은 아이를 볼 때, 늦은 밤 편의점 앞을 서성이는 작은 등을 볼 때 우리는 이제 아키라와 동생들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만 이 영화를 본 우리의 시선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무심코 지나쳤던 풍경 속에 숨겨진 구조 신호를 이제는 읽어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러한 시선이야말로 우리가 아이들에게 건넬 수 있는 최소한의 따뜻함이 아닐까요?
Q. 오늘 당신의 눈길이 스쳐 지나간 곳에 혹시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이 숨어 있지는 않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