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 와 <관상>
1453년 계유정난,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권력을 찬탈한 이 사건은 조선 역사상 인간의 욕망이 노골적으로 부딪힌 피의 폭풍이었습니다. 최근 천만 관객의 마음을 울리고 있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바로 이 비극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죠. 또한 10여 년 전, 이 역사적 사건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담아냈던 한재림 감독의 명작 <관상>이 떠오릅니다. 동일한 역사를 공유하지만, 두 영화가 역사의 굽이치는 길목에서 카메라를 포커싱 한 지점은 완벽하게 다릅니다.
<관상>은 역사의 폭풍 중심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갑니다. 수양대군의 이리 같은 얼굴과 내경의 관상을 보는 능력을 통해, 왕좌를 차지하려는 인간의 지독한 탐욕을 시각화했습니다. 피가 튀는 한양의 궁궐 안에서 역사는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냉혹한 체스판으로 묘사되죠.
반면, <왕과 사는 남자>는 피바람이 부는 한양을 과감히 버리고, 폭풍에 밀려난 자들이 닿은 변방 강원도 영월로 카메라를 돌립니다. 놀랍게도 이 영화에는 권력의 중심인 수양대군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권력의 폭력에 삶의 터전을 짓밟힌 평범한 백성들과 어린 왕이 그 척박한 변방에서 어떻게 일상을 견뎌내는가에 주목합니다. 야심의 역사를 생존의 역사로 치환해 낸 것이죠.
역사 속 단종의 죽음은 늘 비극의 절정으로 기록되지만, 두 영화가 이 소년을 스크린에 묘사하는 방식과 그 시사점은 완전히 다릅니다.
<관상>의 단종은 마냥 나약하기만 한 희생양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김종서의 충언과 내경의 관상을 통해 수양대군의 야심을 꿰뚫어 보고 역모를 막기 위한 선제공격을 허락하는 단호한 신념과 결단력을 보여주죠. 하지만 영화는 이렇게 굳은 의지를 지녔던 왕조차 수양대군이라는 압도적인 무력과 대신들의 기만적인 권력 투쟁 앞에서는 결국 무력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는 시대의 잔혹함을 조명합니다.
하지만 <왕과 사는 남자>는 영월 청령포에 버려진 소년 이홍위에게 인간의 체온과 주체성을 불어넣습니다. 영화 속 이홍위는 마냥 울기만 하는 폐주가 아닙니다. 백성들과 나란히 앉아 평안한 웃음을 나누고, 산에서 호랑이를 맞닥뜨렸을 때 뒷걸음질 치는 대신 직접 목궁의 시위를 당겨 마을 사람들을 구해내는 단단한 기개를 보여줍니다. 촌장 엄흥도(유해진) 역시 멸문지화의 공포 앞에서도 그와 투박한 밥술을 나누고, 마지막 순간 사약을 거부하는 왕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해 밧줄을 잡아당겨 기꺼이 슬픈 조력자가 되기를 자처하죠. <관상>이 운명에 휩쓸린 자의 덧없음을 말했다면, <왕과 사는 남자>는 벼랑 끝에서도 타인을 구하고 스스로의 마지막을 선택하려 했던 인간의 존엄을 말합니다. 신분을 넘어 서로의 바닥을 기꺼이 안아준 두 사람의 연대는, 궁궐의 화려한 지략보다 우리 삶의 깊숙한 곳을 훨씬 더 강렬하게 터치합니다.
두 영화는 계유정난이라는 비극을 설계한 진짜 흑막, 한명회를 완전히 다른 질감으로 스크린에 불러내며 또 하나의 강렬한 대비를 보여줍니다. 공통적으로 그는 피바람을 일으킨 권력의 화신이자, 평범했던 우리의 주인공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 차갑고 잔혹한 빌런입니다. 하지만 그 절대적인 악을 시각화하는 방식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관상>에서의 한명회(김의성)는 철저히 어둠 속에 숨은 그림자입니다. 영화 내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장막 뒤에서 수양대군의 판을 짜는 그는, 천재 관상가 내경의 날카로운 시선마저 교묘하게 빗겨갑니다. 극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늘한 낯빛을 드러내는 그의 모습은, 인간이 아무리 흐름(얼굴)을 읽어내려 발버둥 쳐도 결코 그 형태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바람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반면, <왕과 사는 남자>에서의 한명회(유지태)는 어둠 속에 숨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양대군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그는 숨통을 조이는 거대한 산처럼 화면 전체를 압도합니다. 유지태 배우 특유의 거대한 풍채와 묵직한 위압감은, 그 자체로 권력을 상실한 자들을 짓누르는 폭력적인 국가 시스템의 실체를 시각적으로 증명해 냅니다. 영월의 척박한 산골에서 겨우 밥술을 나누며 온기를 찾으려는 이홍위와 엄흥도 앞에 그가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나타날 때, 관객은 권력의 무자비한 무게를 피부로 느끼게 되죠.
관상의 한명회가 형태를 알 수 없어 두려운 심연이라면, 왕과 사는 남자의 한명회는 눈앞에서 삶의 온기를 앗아가는 차가운 현실의 벽입니다. 두 감독이 이 설계자를 묘사하는 상반된 방식은, 결국 거대한 권력의 폭풍 앞에서 투박한 체온 하나로 서로를 끌어안아야 했던 힘없는 자들의 맨얼굴을 더욱 처절하고 눈부시게 만들어 줍니다.
두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자 어린 왕의 조력자인 <관상>의 내경과 <왕과 사는 남자>의 엄흥도를 들여다보면, 인간이 비극적 운명에 대처하는 두 가지 뚜렷한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관상의 내경은 사람의 앞날을 읽어내는 비범한 재주를 가진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피바람이 부는 한양 권력의 중심부로 뛰어들죠. 수양대군의 역모를 막고 단종을 지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려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그 흐름을 막지 못한 채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처절하게 붕괴합니다. 세상을 구하려 했던 천재의 웅대한 시도는 결국 "나는 파도를 만드는 바람을 보지 못했다"는 뼈아픈 회한의 독백으로 끝맺습니다.
반면, 왕과 사는 남자의 엄흥도는 시대를 읽을 줄 아는 거창한 재주나 정치적 힘이 전혀 없는 평범하고 무력한 산골 촌장일 뿐입니다. 그는 내경처럼 역사의 흐름을 뒤집어 단종을 다시 왕좌에 앉힐 능력도, 들이닥친 사약을 막아낼 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거대한 폭풍을 막아내는 대신, 비를 맞고 있는 소년의 곁에 다가가 기꺼이 함께 비를 맞는 우산이 되어주는 길을 택합니다. 엄흥도는 신분의 격차와 멸문지화의 공포를 넘어 이홍위와 투박한 밥술을 나누고, 마지막 순간 목숨을 걸고 소년의 시신을 거두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켜냅니다. 세상을 바꾸진 못했지만 내 눈앞에 있는 한 사람의 세계를 온전히 안아준 것이죠.
내경이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에 깔린 인간의 비극을 보여준다면, 엄흥도는 그 무자비한 역사 속에서도 끝내 잃지 말아야 할 깊고 따뜻한 인간의 맨얼굴을 증명해 냅니다.
우리는 결국 두 영화를 통해 동일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거대한 역사의 폭풍 앞에서 한낱 인간인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관상은 우리에게 시대의 바람을 응시하라고 말합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지금 불어오는 바람이 나를 어디로 싣고 가는지 읽어내는 통찰은 유한한 인간이 운명에 맞서 가질 수 있는 정교한 무기입니다. 비록 내경이 파도를 막지는 못했을지라도, 그가 읽어낸 관상은 역사의 민낯을 직시하려는 인간의 투쟁이자 지혜였습니다. 반면 왕과 사는 남자는 그 폭풍에 휩쓸려 내려간 밑바닥에도 여전히 삶이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운명을 바꾸지는 못했을지라도, 서로의 맨얼굴을 마주하며 체온을 나누는 행위는 권력이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영토입니다. 엄흥도가 지켜낸 것은 왕의 자리가 아니라, 비극 속에서도 훼손되지 않는 인간의 존엄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두 영화를 통합하는 단 하나의 진실은, 역사는 비범한 자들의 지략으로 설계되지만 그 역사를 견디고 완성하는 것은 평범한 자들의 진심이라는 점입니다. 시대를 읽는 날카로운 눈과 타인의 아픔을 품는 다정한 마음은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거대한 파도의 방향을 바꿀 수 없을 때, 우리는 내경처럼 시대의 허망함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동시에 엄흥도처럼 곁에 있는 이의 손을 더욱 꽉 잡아야 합니다. 두 영화가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비극을 건너는 법을 배웁니다. 운명은 읽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맨얼굴을 쓰다듬는 그 손길 사이에서 매일 새롭게 쓰여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