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매일 아침 거울 앞에 선다

영화 <데블스 애드버킷> 해석리뷰

by 잇다

64전 64승. 단 한 번도 재판에서 져본 적 없는 플로리다의 젊은 변호사 케빈 로맥스(키아누 리브스)는 뉴욕 최고의 로펌 대표 존 밀튼(알 파치노)의 눈에 띄어 화려한 스카우트 제의를 받습니다. 부와 명예가 보장된 뉴욕에서의 삶은 달콤했지만, 성공의 꼭대기를 향해 치달을수록 그의 삶은 기괴한 환영과 피비린내 나는 비극으로 물들어갑니다. 영화가 진행되며 자신에게 이 선택의 삶을 쥐여준 밀튼의 진짜 정체가 다름 아닌 악마라는 진실을 마주하게 되죠. 영화 <데블스 애드버킷>은 오컬트 스릴러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우리 삶을 지배하는 자유의지와 선택의 책임이라는 질문을 현실적인 무대 위로 끌어올려 우리 삶에 악마가 어떤 식으로 다가오는지 보여줍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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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깊이 있게 읽어내기 위해,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실존주의의 핵심 명제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입니다. 이 철학에 따르면 가위나 연필 같은 사물은 무언가를 자르거나 쓰기 위한 분명한 목적(본질)을 가지고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우리는 아무런 목적이나 이유 없이 이 세상에 툭 던져진 존재(실존)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매 순간 스스로 내리는 선택과 행동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본질)를 스스로 정의해 나가야만 하죠.

선택과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내 삶을 주체적으로 완성해 갈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주지만, 동시에 가혹한 형벌이기도 합니다. 나의 선택이 올바를 때는 스스로 떳떳하고 빛나는 삶을 빚어낼 수 있지만, 반대로 그 선택이 어긋났을 때 벌어지는 모든 몰락과 파멸에 대해서는 환경이나 타인 등 그 누구에게도 핑계를 댈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케빈의 삶을 통해 이 자유의지의 무게를 처절하게 증명해 냅니다.





첫 번째 타협, 그리고 악행의 관성






자신의 본질을 절대 지지 않는 변호사로 규정한 케빈은 영화 초반 플로리다 법정에서 결정적인 시험대에 오릅니다. 제자를 성추행한 교사를 변호하던 그는 자신의 의뢰인이 명백한 유죄임을 직감하죠. 화장실 거울 앞에서 갈등하던 그는 결국 양심을 버리고, 피해 소녀를 무참히 짓밟아 승리를 쟁취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한 번의 비겁한 선택이 만들어내는 관성입니다. 악행은 처음이 어려울 뿐, 다음부터는 걷잡을 수 없이 쉬워지기 때문이죠.


뉴욕으로 무대가 옮겨진 후, 악행은 더욱 노골적인 민낯을 드러냅니다. 아내 메리 앤이 극심한 정신적 붕괴를 겪으며 절규할 때, 케빈은 거물급 살인마의 재판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이때 밀턴은 무척이나 자애로운 조력자의 얼굴을 하고 도덕적인 선택지를 내밉니다. 재판은 자신이 모두 책임질 테니, 당장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내의 곁으로 가라는 것이었죠. 하지만 이 선택 앞에서 케빈은 자신만의 논리로 스스로의 욕망을 합리화합니다. "만약 제가 재판을 포기했는데 아내가 무사히 낫는다면, 전 그 기회를 놓친 것 때문에 평생 아내를 원망하게 될 겁니다."


핑계 댈 수 없는 인간의 진짜 바닥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악마가 친절하게 옳은 길을 열어주었음에도, 무패의 변호사라는 껍데기에 완전히 잠식된 그의 자유의지는 스스로 이기적인 길을 선택합니다. 플로리다에서의 작은 타협으로 시작된 악행의 관성이 어떻게 인간의 영혼을 마비시키고, 사랑하는 이의 고통보다 자신의 명성을 우위에 두는 괴물로 만들어버리는지를 뼈아프게 증명하는 대목입니다.






악마를 묘사하는 방식





이 영화가 수많은 오컬트 장르 중에서도 독보적인 이유는, 파멸의 흑막인 악마 존 밀튼을 묘사하는 알 파치노의 섬뜩한 디테일에 있습니다. 극 중 밀튼은 뿔 달린 괴물이 아니라, 우아한 슈트를 입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신사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무서운 지점은 밀튼이 단 한 번도 케빈의 멱살을 쥐고 악행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의 악마 역시 억지로 죄를 짓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가 가장 취약한 욕망을 자극하는 화려한 무대(명예, 부, 승리)를 세팅해 두고, 스스로 걸어 들어오기를 여유롭게 기다릴 뿐이죠. 심지어 도덕적인 핑곗거리까지 제거해 주며 인간이 스스로 선택의 맨얼굴을 마주하게 만듭니다.

"자유의지, 그거 정말 골칫거리야."라는 밀튼의 대사는 파멸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이라는 인간의 뼈아픈 나약함을 조롱합니다. 악마는 그저 우리가 스스로 핑계 대지 못하도록 선택지를 쥐여주며, 인간이 허영심을 위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빙그레 웃으며 관망하는 지독한 방관자일 뿐입니다.





두 번째 선택, 떠나지 않은 악마






모든 비극의 전말을 깨달은 케빈은 밀튼이 설계한 거대한 판을 엎어버리기 위해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쏩니다. 악마의 꼭두각시가 되느니 죽음으로 자유의지를 증명하겠다는 숭고한 결단이었죠. 그리고 방아쇠를 당긴 순간, 영화는 기막힌 반전을 보여줍니다. 생을 마감한 케빈이 다시 번쩍 눈을 뜬 곳은 지옥이 아니라 영화의 첫 장면이었던 플로리다 법정의 화장실이었습니다. 손에 묻은 세면대의 물기조차 마르지 않은 그곳은, 그가 처음 양심과 승리 사이에서 비겁한 타협을 고민하던 바로 그 시작점이었습니다. 앞서 겪은 그 파멸의 시간들이 잘못된 선택이 불러올 거대한 환영이었는지, 아니면 악마가 시간을 되감아 그를 다시 시험대에 올린 것인지 모를 기묘한 리셋이 벌어진 것입니다.

지옥 같은 파멸의 끝을 엿보고 돌아온 케빈은 이번에는 거울 앞에서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당당히 법정으로 걸어 나가 의뢰인의 변호를 포기하며 마침내 양심을 택하죠. 하지만 이 극적인 카타르시스는 너무나도 짧습니다. 올바른 선택을 내렸다는 안도감에 재판장을 나서는 그에게 한 기자가 다가와 속삭입니다. "내일 신문 1면에 당신을 실어 아주 유명하게 만들어 주겠다"라고 말이죠. 그러자 케빈은 다시 씩 웃으며 그 유혹에 넘어가 인터뷰를 수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기자의 얼굴이 곧 밀튼으로 바뀌며 짧게 읊조리죠.


"허영심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죄악이지." 거대한 악마와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안도하는 순간, 악마는 타인의 인정과 명성이라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허영심의 옷을 입고 다시 우리 곁에 서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위대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자부하더라도, 내일 아침이면 또다시 누군가의 한마디에 얄팍하게 흔들리고 마는 모순적인 존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진짜 나를 지켜내는 일






결국 <데블스 애드버킷>은 지옥이나 종말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직장에서 내 실수를 슬쩍 남의 탓으로 덮고 싶은 순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나의 삶을 과장되게 포장하고 싶은 유혹, 혹은 다들 이렇게 사니까 라며 편안함을 택하려는 우리들의 평범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겠다는 붉은 피의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번 한 번만,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야 라는 달콤하고 합리적인 핑계 앞에서 매일 조금씩 양심을 떼어 낼 뿐이죠.


우리는 완벽하지 않기에 내일 아침에도 칭찬 한마디에 우쭐해지고, 위기가 닥치면 비겁한 타협의 길을 힐끗거리며 숱하게 흔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나약함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내 맨얼굴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다시금 떳떳한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디뎌 보려는 용기입니다. 스스로에게 쥐여주는 거창한 변명들을 걷어내고, 내 선택이 불러올 결과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해 내는 일. 때로는 손해를 보더라도 화장실 거울 앞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길을 묵묵히 고심하는 그 치열함만이,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우리 삶의 깊은 곳을 터치하며 진짜 나라는 단단한 본질을 지켜내는 유일한 방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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