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건 참으로 마음 고된 일이다.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내 경우엔) 휘갈기는 대로 한 번에 완성되는 글이란 없고, 그런 과정을 매번 확인하면서 속이 상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중단할 수 없는 것이 글쓰기다.
나는 자존감이 높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글에 관해서는 늘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지금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서로 작문을 첨삭한다고 주고받을 때면 늘 부러운 마음이 들곤 했다. 특히 다른 것보다 '지역'이나 '군대'와 같이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을 소재로 생각을 확장하는 그가, 그걸 또 본인만의 글투로 정돈해내는 것에 시샘이 났다. 요즘 내 질투의 대상은 '비혼' 여성이다. 좀 더 정확히 비혼 여성에 고양이까지 기르고 있는 프리랜서로 이런 글들을 자유롭게 쓰는 사람들.
결혼과 출산이 친구 사이에 미치는 영향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결혼한 직장 여성이자 일하는 엄마, 또 고양이 공포증이 있는 사람으로선 참 부러운 고민(글감)을 가지고 산다 여겨진다. 내가 속한 세계에 안락함을 느끼고 또 나름의 치열함을 즐기면서도 내가 겪어보지 못한, 결코 경험해볼 수 없는 이야기들(사람들)에 대한 동경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함부로 속단하기 어렵지만 ‘오롯이 나 혼자’로 간명하게 삶을 살고자 하는 태도 또한 멋져 보인다.
글이란 결국 내가 가닿을 수 없는 세계까지 상상하고 풀어낼 수 있는 재주일 텐데 나는 그런 게 없다는 걸 인정한 지 오래다. 그래서 그냥 나의 이야기를 적고자 한다. 그런데 요즘은 이마저도 주저함이 많아졌다.
타고난 글쟁이이자 영화감독인 고레아다 히로카즈는 아버지가 빚을 진 이야기를 썼을 때, 누나가 "우리의 추억은 너만의 것이 아니라 가족의 것이야"라고 매섭게 말하는 순간에도 ‘나중에 대사에 써먹어야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영화 <태풍은 지나가고>에도 한 장면으로 등장한다.
글 잘 쓰는 사람은 원래 쌔고 쌨다고 하지만, 요샌 정말 '자기'와 여기서 뻗어나간 '주변'의 세계에 대해 거칠 것 없이 드러내는 사람들까지 널리고 널렸다. 그런 사람들을 절제 없이 훔쳐보면서, 불현듯 나의 이 망설임은 지금 내가 움켜쥐고 있는 것들이 10대, 20대의 나보다 훨씬 많아졌기 때문 아닌가 깨닫는다. 이미 나 개인으로만 충분치 않은 삶이 되었고 내가 아는 것, 보고 듣는 것, 말하고 싶은 것에는 너무 많은 관계들이 얽혀 있는 것이다.
제일 사랑하지만 치부 역시 가장 노골적으로 알고 있는 부모형제 또 배우자라는 가족, 출산과 육아를 기점으로 멀어져 버린 오랜 친구 몇몇, 생판 남이었으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집을 함께 짓기로 결정하고 계속 마주하는 이웃, 적절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누구보다 서로에게 친절함을 베푸는 직장동료들.. 모두가 내 삶일지언대 낱낱이 있는 그대로 쓰기에는 참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나는 내 말과 글을 실타래처럼 풀어놓은 이 공간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들추면서 다시 접어두고 만다. 그러다 또 이내 돌아와 이 글을 정리하고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내가 닿고자 하는 것은 누구일까. 여전히 모르겠다.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슬픔을 먹고 살고, 이야기를 먹고산다. 그 이야기가 열어 주는 널찍한 공간에서 우리는 한계를 넘어 상상력을 여행한다. 이야기가 우리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우리의 불완전하고 조각난, 미완의 자아의 가능성을 넓혀 보라고 재촉한다. 남동생이 종이 박스 세 개에 담아온 살구 더미, 그것도 눈물이었을까, 이 책도 눈물일까. 누가 당신의 눈물을 마시는 걸까. 누가 당신의 날개를 가지고, 누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걸까.
<리베카 솔닛|멀고도 가까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