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면서, 살면서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거나 혹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거나 또는 애써 외면해왔던 윤리적인 질문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언제까지고 미룰 수 없고 마침내에는 하나의 관점, 구체적인 답변으로 정리해내야 한다는 명제와 같다. 사회 공동체 안에서 맺는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에티켓이라거나, 그 안에서 아이의 (성)역할에 대한 부분과 같이 아주 복잡한 문제부터 아주 사소한 순간, 예를 들어 아이가 꽃을 꺾고 싶어 한다거나 개미나 곤충을 손으로 뭉개거나 잡으려고 할 때에 이르기까지. 선명한 답은 없을지언정, 그나마 미리 준비하면 조금 덜 허둥댈 수 있을지 모른다.
러시아의 차가운 바다에 산다는 벨루가는 그늘막 하나 없는 ‘정화된’ 남해 바닷물이 담긴 수조에서 느리게 유영하고 있었다. 11시 공연 직전에 조련사들은 돌고래들에게 아이스박스에 담긴 생선을 먹였고, 짧은 식사를 한 이들은 고개를 내밀며 다음 식사를 위한 쇼를 준비했다. 돌핀 프레젠테이션이라는 이름을 한 쇼는 예상보다 더 자극적이고 가학적이었다. 지느러미를 움직이고 빙빙 돌며 춤을 추게 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좁은 수조에서 연속으로 점프하기, 장대높이뛰기, 링 던지면 받아서 돌리기를 시켰다. 하지만 가장 가관이었던 건 한 주간 인터넷을 달궜던 벨루가에 올라타는 장면, 조련사를 뒤에서 밀어 나아가게 하는 장면, 조련사를 밀어 올려 날아가게 하는 장면이었다. 많은 시민단체가 문제 제기를 했고 뉴스에도 올랐는데도 마치 보란 듯이 공연을 했고, 이 사실을 아는 듯한 관람객은 없어 보였다.|핫핑크돌핀스 페이스북
어제 거제씨월드라는 곳에 있는 조련사가 서핑보드처럼 벨루가 등을 타고 쇼를 하는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아 여기저기 카톡방에 퍼 나르며 소란을 떨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영상을 과연 처음 봤던 것일까? 10년 전쯤에도 제주 퍼시픽랜드에 억류된 남방큰돌고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지 않던가? 그럼에도 재작년 언제쯤 17개월 남짓된 아이를 데리고 오키나와까지 가서 돌고래쇼를 봤었다. 별생각 없이 수족관도 두 번이나 갔었다.
스무 살 무렵엔 부모님과 갔던 태국에서 코끼리 트래킹을 한 적 있다. 야생 코끼리를 날카로운 것으로 온몸을 찌르고 긁어가며 관광용으로 길들인다는 이야기를, 나는 코끼리 등에 올라타기 전까지 들어본 적 없던 걸까? 아님 내심 마음 불편한 이야기를 적당히 묻어뒀던 걸까? 전후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무감각하다. 하물며 성인이 된 이후였다. 그토록 무심코 지나쳐왔는데 어제 문득 처음으로, "코끼리 등에 태우고 돌고래와 입맞춤을 하는 '경험을 쉽게 구매하는 것'이 혹여나 아이에게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다고 여기게 되면 내 스스로가 너무 끔찍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변화의 촉매는 역시 아이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조금 다른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마침 주말에 우연히 아이와 본 영화 <니모를 찾아서>도 나에게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가족들을 잃은 트라우마 때문에 아들 니모를 과잉보호하는 아빠 말린. 뭐든 위험하다고 해보지 못하게 하는 아빠에 대한 반발감으로 바다 수면까지 올라갔다가 스쿠버 다이빙을 즐기던 인간에게 잡혀 어항 속 신세가 되는 니모. 말린은 바닷속을 용감하게 계속 헤엄쳐 오르고, 니모도 어항을 탈출해 다시 바다로 돌아가 재회한다는 말도 안 되게 드라마틱한 이야기. 만 4살도 안 된 아이는 니모가 그물로 잡히는 장면에서 "니모 집은 바다인데.. 나도 성미산에 있는 돌멩이나 달팽이 안 가져오는데"라고 말한다. 아이는 늘 그렇듯 나보다 먼저 답을 알고 있다.
친애하는 돌고래들아! 너희는 나름대로 완벽한 존재들이야. 자연은 너희에게 관대한 예외를 허용했어. 그 증거로, 너희는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며 여생을 보내지 않아도 되지.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만 하는 각종 고난으로부터 자유롭고, 성숙기가 되어도 아무 이해관계없이 순수한 호기심을 간직한 채 놀이를 할 수 있어. 동물 중에 너희처럼 특권을 누리는 종은 거의 없을 거야. 그 어떤 동물도 너희처럼 자유롭고, 개방적으로, 그리고 독창적으로 놀이를 즐기는 법을 알지 못하니까. 너희는 하루 종일 우리의 배들을 따라다니며 우리 앞에서 재주와 재롱, 에너지를 뽐낼 수도 있어. 너희가 누리는 생의 즐거움은 바라봐줄 관객을 원하지. 인간 세상과의 접촉은 너희에게는 또 다른 기발한 놀이의 일종일 거야. (중략)
사랑하는 돌고래들아,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에 부디 화내지 말았으면 해. 사실 너희의 지능에는 한계가 있단다. 너희가 우리 인간에게 주는 신뢰, 그게 바로 너희의 한계인 거야. 너희는 우리를 훌륭한 놀이 상대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런데 그 놀이들이 언제라도 소름 끼치는 나쁜 짓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걸, 아마 너희는 상상도 못 할 거야. 경고하건대, 이미 어떤 인간들은 너희를 해군의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길들이기 시작했어. 너희에게 군함 A와 군함 B를 구별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지. 어떤 군함이 지나가면 무심히 지나치고, 강력 폭탄이 실린 다른 군함과 맞닥뜨리면 전속력으로 돌진해서 온몸으로 부딪히게 만드는 거야. 이와 관련된 모의실험에서 너희는 이미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다고 해.
너희가 그렇게도 신뢰하는 인간들을 고발하는 것. 이게 바로 내가 너희에게 편지를 쓰려고 마음먹은 이유야. 지금 이 순간, 문득 <콰이 강의 다리>라는 영화가 떠올라. 군인들이 야생의 섬에다 무거운 대포를 설치하려 하고, 일손이 필요한 군인들은 이웃 마을에 사는 원주민 소녀들을 부르지. 소녀들은 일렬로 늘어서서, 쇠로 만든 포탄을 손에서 손으로 건네어 나르게 돼. 구릿빛 피부에 반나체로, 머리에는 꽃을 단 아름다운 소녀들. 우습지 않아? 소녀들의 손에서 운반되고 있는 게 살상 무기가 아니라 과일 바구니 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들의 손짓은 마치 춤을 추듯 부드럽고, 눈빛에는 이게 뭔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기대치 않았던 놀이에 참여하게 된 데 대한 순수한 기쁨이 담겨 있어. 사랑하는 돌고래들아, 너희에게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게 전부란다. 태평스런 바다의 어린 영혼, 절대 읽지 않을 이 편지의 선량한 수신인이여.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읽거나 말거나> 중, 엘지비에타 부라코프스카의 <돌고래의 모든 것>에 대한 서평
거제씨월드 영상을 보고 난 후 우연히 집어 든 책에서 이 글귀를 접했다. 균열은 기존의 균형을 깨고 생각을 확장시킨다. 비단 돌고래쇼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고래를 바다에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존엄(존중)에 대한 문제까지 가닿는다. 차마 가닥이 정리되지 못해 엉킨 고민을 텍스트로 옮겨놓았더니, 한 카톡방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적어도 모든 존재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다른 존재를 일정하게 먹는 것까지 잘못되었다 하기는 무리죠. 유라시아의 한 부족인 곰족의 풍습이 생각납니다. 살기 위해 곰을 먹기는 하지만 곰을 죽일 때 그 곰에 대해 엄숙한 의식을 치른다는 이야기. 슬퍼하고 감사해하고 곰 영령을 위해 기원하고. 적어도 그 사람들은 유희를 위해 누굴 죽이거나 하지 않는 것이죠."
그래, 답을 정했다. 어떤 생명이든 유희를 목적으로 직접 다루거나 방치 혹은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고. 그래서 돌고래쇼는 보러 갈 수 없다고. 거기서 나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뭐가 있을지 생각해보자고. 나는 아이에게 준비한 답을 언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아이는 무슨 답을 내게 다시 내어줄까. 복잡한 생각으로 집에 오니 아이가 뜬금없이 이런 노래를 부른다. "푸른 바다 보고 싶다 / 아주 멀리 가보고 싶다 / 내가 고래라면 / 미국도 가보고 인도도 가보고 중국도 아프리카도 가볼 텐데 / 내가 고래라면 아니 상어라면 아니 고래라면 빠밤! (무한반복) (내용불분명 출처미상)" 하루가 온통 고래라는 메타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