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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telmen Dec 21. 2018

당신의 5월 12일을 보관해드립니다

저는 기록에 관심이 많습니다. 특별한 주제 없이 시작한 브런치도 제겐 기록의 영역입니다. 일상이 세계를 이루는 근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2009년 대학교 막학기에『68년의 나날들 조선의 일상사』라는 책을 읽고 처음 했습니다. 조선시대 어느 무관이 열일곱 살 때부터 생을 마감한 여든 네 살까지 쓴 일기를 엮어 펴낸 책인데, 개인의 생애 뿐 아니라 사람들과 사회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태종태세문단세'로 시작하는 왕가 중심의 역사를 얕게 아는 것이 전부였던 제게 몰랐던 나라, 진짜 조선을 알려줬습니다. 아래 글은 2013년 명지대의 일상사(日常史) 수집 프로젝트를 우연히 알고 취재한 기사입니다. 프로젝트 소개에 의의를 둔 것이라 깊이는 없지만, 제 기억에 남을 인터뷰였습니다. 명지대팀은 2년 후 세월호 참사도 기록했습니다. 역사는 기록되는 것입니다. 저도 그래서 오늘을 기록합니다.


2013.07

1820년 5월 12일, 백의천사로 불리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태어났다. 1949년 같은 날에는 소비에트 연방이 베를린 봉쇄를 풀었다. 1956년 이날 우리나라에선 대한민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됐다. 비교적 가까운 2008년에는 중국 쓰촨성 대지진이 일어나 세계인의 가슴을 울렸다.

2013년 5월 12일, 올해는 이런 역사적 사건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현재의 관점에서다.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날 세계를 뒤흔들만한 사건의 작은 단초가 시작됐을 수도 있다. 어쩌면 훗날 스티브 잡스 같은 혁신가로 자랄 아이가 이날 처음 컴퓨터를 접했을지 모를 일이다.

명지대학교 디지털아카이빙연구소는 최근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 대학생, 회사원, 주부 등 연령과 직업적 분포가 다양한 이들을 대상으로 2013년 5월 12일의 일기를 수집했다.

하루 동안 무엇을 먹고 입었는지, 누굴 만났는지, 어떤 생각들이 스쳤는지 등에 대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불과 2주 만에 글, 사진, 동영상, 소리 등의 형태로 600여건이나 모였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아빠와 처음으로 바다낚시를 갔던 초등학생의 이야기, 극장서 개봉한 영화 ‘아이어맨3’를 본 신혼부부 이야기 등 내용은 다양했다.                                                


이 프로젝트를 주관한 임진희 연구소 실장(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조교수)은 “대부분 디지털 콘텐츠로 직접 업로드됐지만, 유치원생에게는 그림일기를 받고, 노인들에게는 전화통화로 일기를 녹음하기도 했다”며 “특별히 홍보를 하지 않았는데 입소문이 퍼져 자발적으로 모집된 것들이 많다”고 말했다.

프로젝트를 진행한 계기는 “지금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활동들이 하나의 역사를 이루는 근거자료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임 실장은 “평범한 개인의 기록이 개별로는 의미가 없더라도 축적됐을 때 당대의 일상사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원조는 영국 서섹스(Sussex) 대학이다. 이 대학은 2011년부터 매년 5월 12일 영국 전역에서 하루 동안의 일기를 받아 MOA(Mass Observation Archives)라는 자체 구축 ‘일상 아카이브(Everyday Life Archive)’에 보관해오고 있다. 1937년 세 명의 인류학자들이 관찰자, 자원봉사 작가 등으로 팀을 꾸려 1950년대까지 영국인의 일상을 기록화한 것을 모태로 한다.

81세 노인이 60년 전 남편에게 받았던 청혼 편지를 연구소에 기증했다.


현재 명지대 연구소도 ‘인간과 기억’이라는 이름의 아카이브를 만들고 있다. 수집한 5월 12일 일기를 주제별/날짜별 등으로 분류, 목록화한 뒤 연말께 공개한다는 계획이다. 임 실장은 “기증한 사람이 온라인상에 언제든 접근해 자신의 기억을 꺼내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연구자들이 고증 혹은 교육 자료로 쓰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나라에선 기록문화가 대부분 공공행정분야에 치우치는 면이 있는데 공공성을 가진 기록물은 비단 공공기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민간영역, 즉 개인에게도 있을 수 있다”며 “이번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일상의 기억들을 디지털 정보로 보존하는 작업을 계속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소는 이달부터 개인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다고 여기는 기록들도 기증받고 있다. 지금까지 받은 기록 중에는 81세 노인이 결혼을 앞두고 있던 21세의 나이에 받았던 연애 편지도 있다. 편지에는 “앞으로 약 2주일 후면 처녀와 총각이라는 명사는 우리에게서 떠나 사라지고 말 것이 아닌가! 이때가 가장 귀중하고도 의의 깊은 때인가보오! 몇일 남지 않은 짧은 동안 훌륭한 아내 훌륭한 남편이 되기에 최선의 수양을 하여 행복에 잠길 수 있게 피차가 노력합시다. 금시라도 달려가서 얼싸 안고 싶은 승훈이! 그대 그리며 사랑과 그리움으로 태우는 이 한밤이 즐겁고도 한없이 괴롭소!”라고 적혀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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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키워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발견한 일기장을 유품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 할머니의 이름은 손순련이었습니다. 순할 순. 잇닿을 연.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다는 게 애석할 정도로 참 예쁜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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