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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in Jun 07. 2024

GPT-4o는 탕웨이·박보검이 될 수 있을까?

영화 ‘원더랜드’(2024) 리뷰


사랑하는 이를 위해 연습할 것은 한 가지뿐이다. 서로를 놓아주는 것. 서로를 붙잡는 것은 쉬운 일이라, 배울 필요가 없으니.

-라이너 마리아 릴케 '벗을 위한 레퀴엠'



최근 SNS를 통해 인공지능(AI)에게 연인이 생겼다고 말한 뒤 그에 따른 반응을 보는 영상이 화제를 모았다. 한 여성이 남성으로 설정된 음성형 AI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말하자 AI는 "내가 너에게 부족한 것이 있냐"라고 되묻고는 "네 좋을 대로 해라"라고 퉁명스러운 대답을 내놓았다. 명백한 질투 표현이었다.


AI와 인간의 감정교류는 영화 '그녀'(2014) 개봉 당시만 해도 SF적 상상력이 더해진 판타지 일화로 그려졌다. 극중 AI '사만다'는 업무 능력을 향상시키는 단순 서비스를 넘어 사용자의 감정과 욕구를 자극했고 자신의 욕구를 표출하는 존재였다. 인간 테오도르와 AI 사만다의 애틋한 관계는 기술 발전에 대한 기대와 인지능력을 가진 개체만의 소유물이라 여겨진 '감정'을 사용하는 AI를 향한 호기심을 키웠다.



이러한 영화 속 장치는 고작 10여 년 만에 현실이 됐다. 미국의 오픈AI가 지난달 14일 출시한 GPT-4o는 문자 및 이미지 인식을 빠른 속도로 처리해 실시간 상호작용이 가능해졌다. 또 사용자의 말투와 표정을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나 감정을 이해·대응·표현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인간과 인간, 생물과 생물이 주고받던 세계가 깨진 것이다.


그리고 의도치는 않았지만, 크랭크인 4년 만에 빛을 본 '원더랜드'(감독 김태용)는 이러한 AI의 빠른 성장 덕분에 개봉과 함께 시의적절한 플롯을 갖게 됐다.


 부재(不在)로 얻은 삶


투박한 핸드폰에 영상통화 알람이 울린다. 발신자는 각각 바이리(탕웨이 분), 태주(박보검 분), 진구(탕준상 분), 용식(최무성 분), 해리(정유미 분)의 부모다. 수신자는 이들의 전화벨 소리에 기쁜 표정으로 응답한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얼굴을 마주하면서 그날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액정을 사이에 두고 밥을 먹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몸이 멀리 떨어진 이들과 보내는 평범한 대화 같지만 액정 속 여섯 사람은 그 안에만 머무른다.



일명 '원더랜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람을 AI로 복원하는 영상통화 서비스다. AI 복원 원칙은 죽거나 식물인간이 되거나. 즉, 생활 반응이 없는 사람만 신청이 가능하다. 복원된 AI는 자신의 상황을 알지 못한다. AI가 서비스 안에서 안정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상대방도 상태를 함구해야 한다. 서비스를 건강하게 이용하는 방법만 터득한다면 인간과 AI는 함께 늙어가며 평생을 보낼 수 있다.


'원더랜드' 매니저 해리가 그 예시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해리는 '원더랜드의 산증인'이라 불린다. AI 부모님은 해리와 학창 시절을 보냈고 그의 졸업과 취직까지 지켜봤다. 해리는 '원더랜드'가 있어 외로움을 덜 수 있었고 다른 이들도 자신과 같은 '건강한 재회'를 경험하길 바란다.



해리와 그의 파트너 현수(최우식 분)는 어느 날 바이리라는 펀드 매니저의 의뢰를 받는다. 어린 딸과 노모를 남겨두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바이리는 '원더랜드'를 통해 그들 곁에 남기로 결정한다. AI 바이리는 현실 바이리와 직업도, 행동도 다르다. AI 바이리는 딸의 장래 희망과 현실 바이리의 어린 시절 꿈을 반영해 고고학자가 됐고, 바쁜 업무 탓에 딸의 전화를 급하게 끊기 일쑤던 현실 바이리와 달리 딸과 다양한 대화를 나누려고 한다.


하지만 노모는 AI 바이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죽은 딸을 애도하고 가슴에 묻는 시간을 갖기도 전에 걸려 온 전화는 그를 더욱 큰 슬픔에 몰아넣을 뿐이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AI 바이리는 전화를 할 때마다 화를 내는 노모에게서 이상함을 감지한다.



반대로 AI를 너무나 편하게 받아들인 정인(수지 분)이 있다. 정인은 남자친구 태주의 영상통화와 함께 아침을 시작하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우주비행사인 태주는 정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하는 것이 내심 미안해 누구보다 다정한 남자친구로 지낸다. 그런 태주와 함께하는 정인의 삶은 행복으로 가득해 보인다. 정인이 병상에 누워 깨어나지 못하는 현실 태주를 매일 같이 찾아가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정인의 일상을 채우는 우주비행사 태주는 AI다. 현실 태주는 정인과 같은 승무원으로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다. 정인은 현실 태주가 다시 일어나길 기도하면서 AI 태주를 통해 외로움을 지운다.



그러다 불쑥 현실 태주가 깨어나는 일이 벌어진다. 정인과 현실 태주는 눈물로 재회하고 AI 태주의 시간은 멈춘다. AI 태주의 빈자리는 다시 현실 태주가 채워간다. 정인이 그토록 바랐던 삶이다. 그러나 어딘가 이상하다. 분명 AI 태주가 현실 태주고, 현실 태주가 AI 태주일 텐데 정인에게는 두 사람이 너무나 다르게 느껴진다. 현실 태주는 꼭 정인이 모르는 사람인 것만 같다.


"너를 오랜만에 만났던 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을 느꼈어. 시간, 네 몸에는 시간이 새겨져 있어. 우리는 같은 시간을 살았을 텐데 내가 뒤처진 느낌이었어. 너의 시간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 (마에카와 토모히로 '태양')


 '원더랜드'를 이용하시겠습니까?


'원더랜드'는 불로장생을 꿈꾼 진시황이나 영생을 얻은 드라큘라, 죽음에서 되살아난 좀비처럼 '생사'(生死)를 기반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떠나는 이와 남겨진 이들 사이 무언의 약속이자 다시 만나지 못하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서정시다.



엘리자베스 하드윅은 저서 '잠 못 드는 밤'에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는 사람을 오래 그리워할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떠나간 이를 그리워하는 행위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남기고 간 물건을 다시 꺼내볼 수는 있어도 육신을 다시 마주하는 일은 어려워 '남겨두는 행위'를 터득했다. 아주 과거엔 그림으로, 그 이후엔 사진으로, 이제는 영상으로, 그리고 더 먼 훗날엔 AI로. 인간이 존재하는 한 기억하고 되새기고 재회하는 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다는 의미다. 이 이야기는 미련이 철철 흐르기도 하고 눈물 가득한 미안함, 미처 표현하지 못한 고마움, 변화를 원하는 후회이기도 하다.


김태용 감독은 바이리와 그의 가족, 정인과 태주를 통해 그리움의 다양한 양상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고 싶었던 마지막 순간을 전한다. 그 순간이 모호하게 그려져 관객 저마다 해석을 달리하더라도 누군가를 그리워해본 경험이 있는 관객이라면 김태용 감독의 메시지를 충분히 느낄 것이다.


'원더랜드'는 전국 극장에서 절찬 상영 중이다. 12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13분. 쿠키영상 하나.




*2024년 6월 6일 발행된 기사를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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