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날이면
집 안의 소리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난다
다만
창문 유리에 가만히 떨어지는 빗방울이
오늘의 문장을 대신 쓴다
나는 그 앞에서
별 생각 없이 물을 끓이고
식탁에 컵 하나 내려놓는다
그저 평소와 같은 아침인데
비의 리듬이
네 생각을 먼저 불러 세운다
빗소리는 항상
지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되살리는 소리 같기도 해서
사라져야 할 기억을 한 번 더 비추고
잠든 마음을 아주 살짝 흔들어 놓는다
창밖 골목이 젖어가는 동안
나는 오래전
우산을 함께 쓰던 너의 어깨를 떠올렸다
어깨에 닿던 빗물과
그 사이사이 떨어지던
조용한 웃음들까지
비가 대신 기억해 주는 듯했다
유리는 점점 흐려졌지만
마음은 오히려 선명해졌다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네가 내 곁 한쪽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 느낌
비가 내리는 날만 열리는
아주 작은 착각
시간이 덧 없이 흐르고
빗소리는 낮아지고
방 안엔 얇은 적막이 번졌다
나는 그 적막의 온도를 손으로 더듬었다
그 온도 속에서
네 생각은 천천히 자리 잡았다
조금도 요란하지 않게
그저 내 하루에 스며드는 방식으로
오늘의 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침묵 안에서
너를 한 번 더 떠올렸다
나를 적시지 않는 비가
네 생각만 조용히 적셔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