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무 Dec 29. 2019

모르겠고 일단 재봉틀을 샀다

휴직일기(17) 나는, 미싱을 구하러 다니는 크리스마스의 홍길동



크리스마스에 나는 산타할아버지도 아니면서 짐을 잔뜩 지고 다녔다
직거래로 중고 재봉틀을 구매하고, 동대문시장에서 천까지 사오는 여정을 했기 때문이다



문화센터에서 미싱 수업을 듣는 중이다

전부터 배우고 싶었지만 여건이 마땅치 않았는데, 병가 낸 참에 하고 싶었던 것을 배우고자 등록했다

첫 수업에서 파우치를 만든 그 날, 내 머릿속엔 '미싱의 방'이 생기고 말았다

시원하게 천을 박으며 나아가는 미싱의 속도를 맛본 내게 뜨개질의 느림이란 답답함이 되고 만 것이다

파우치, 가방, 필통, 커튼... 미싱이 있다면 내가 만들 수 있을 알록달록한 꿈의 물품들이 자꾸만 나를 유혹했다



하지만 나는 열심히 절제하고 있었다

강사님이 지금 사봤자 잘 쓰지도 못할 테니 많이 배운 뒤에 고급 미싱을 장만하는 것이 좋다고 했기 때문이다

난 초보니까, 그리고 선생님이 최소 50만 원짜리를 사야 한다고 했으니까 열심히 참고만 있었다



당근마켓이 문제였다

화개장터에는 없을 건 없지만, 당근마켓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초보자에게 딱 좋아 보이는 35,000원짜리 미싱이 올라온 것이다! 보지 말았어야 했어

'이건 나를 위한 것이야!'라는 생각과 '중고는 깎아야 맛이지'라는 생각이 겹쳐 나는 30,000원으로 가격제안을 보냈다

다음날까지도 답이 없던 판매자, 나는 판매자가 간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 기다렸다

하지만 내 머릿속 '미싱의 방'은 계속 커지기만 했고 결국 35,000원에 사기로 결심했다


나) 안녕하세요, 물건 판매되었나요?

판매자) 네, 완료되었습니다



응. 팔렸어요.



헐... 뭐야.. [예약중] 버튼도 안 띄워놨잖아요ㅠㅠ

후회 전문가인 나는 엄청난 허탈함에 휩싸이며 5,000원을 탐내 득템의 기회를 놓친 나를 원망했다

너무나 안타까운 맘이 강했던 탓에 잠이 오지 않았고, 나는 다른 미싱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당근마켓엔 내가 살만한 미싱이 없어 번개장터 앱을 설치해 물색하기 시작했다

보다 보니 이거 50,000원이어도 괜찮을 것 같아, 아니 100,000원도 괜찮을 것 같아.. 이러며 자꾸만 내 머릿속 최고가는 높아져 갔고 그러다 110,000원짜리 미싱 판매글을 만나게 됐다



응. 팔렸어요. 나한테!


검색해보니 소음도 적고, 힘이 좋아 두꺼운 천도 잘 박힌단다, 그리고 튼튼하단다!

후회와 한탄으로 YES맨이 되어있던 나는 바로 새벽에 채팅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상품 구매하고 싶은데(=일단 살 생각이니까 다른 사람한테 팔지 말아요) 구성품 좀 자세히 알 수 있나요?"

라는 앞뒤 안 맞는(선 구매의사 후 확인이라니) 다급한 채팅을 말이다



아침에 답이 왔고 상태도 어차피 볼 줄 모르는 나는 정상적으로 구동된다는 말에 "오늘 당장 살게요!"라고 했다

판매자는 집 근처까지 오면 1만 원을 깎아준다고 했고!

나는 "앗싸!"를 외치며 1시간 거리의 직거래 장소로 달려갔다


판매자) 혼자 들 수 있는 정도이긴 한데 그래도 무겁긴 하네요

나) 어떻게든 들고 가야죠!

라는 파이팅 넘치는 말과 함께



"혹시 미싱.."

"네..!"

"들고 가실 수 있으시겠어요?"

"네 ㅎㅎ"

"네 감사합니다"

"여기 돈.. 확인해보세요"

"네 맞네요, 조심히 가세요"


직거래 장소에서 숨 막히는 어색함과 함께 미싱을 손에 넣었다!

여보시오 사람들! 나 이제 미싱 있는 여자라고요!




미싱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내게 온 것은 재봉틀과 기타 부품들이 함께 있어 부피가 무척 큰 박스였다

들어보니 너무 무거워서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나에겐 천이 필요했다

미싱은 있는데 천이 없어서 당장 사용할 수 없는 답답함은 견딜 수 없으니까!

그래서 그 길로 곧장 동대문시장으로 향했다



예전에 커튼 천을 사러 갔을 땐 지하철을 타고 갔는데 이 날은 동선이 달라져서 버스를 타고 갔다

정류장에서 시장 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천을 잔뜩 쌓아놓은 노점이 보였다

천 종류도 많고 왠지 저렴할 것 같아서 시장투어를 끝내고 들르려고 했는데,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5시까지만 연다고 했다

당시 시각 3시, 고민 대장인 내가 5시 이전에 시장투어를 끝낼 리 없으니 이곳을 먼저 공략하자는 생각에 천을 살펴보니 시작했다



"사장님, 저거요!"

"사장님, 이것도 꺼내 주세요"

"사장님 지퍼는 얼마씩 해요?"


그렇다, 그곳은 노다지였다

동묘시장 옷더미를 파헤치는 것처럼 천 더미를 파헤치며 원단을 득템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 맘에 쏙 도는 알록달록한 천들이 한가득이었던 탓에 나는 장사하는 사람처럼 천을 많이 샀다



그렇게 얻게 된 커다란 짐 하나 더..


미싱을 오늘 당장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그 짐까지 이고 지고 찾아간 동대문시장은 휴일(크리스마스)이라는 이유로 3시부터 문을 닫기 시작했다고 했다

겨우 원단 자르는 가위와 단추 2개만 살 수 있었다

그 노점을 알게 된 것이 신의 한 수였던 것이다..!



시장을 샅샅이 돌아보지 못했지만 마음에 드는 원단을 잔뜩 산 나는

세상 어린이들의 모든 선물을 횡령한 못된 산타가 된 듯이 커다란 짐 2개를 기쁘게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열심히 박스를 풀고, 엄청난 양의 종이로 보호받고 있던 미싱과 다른 물품들을 꺼냈다..!

그리고 가득 담아온 원단과 부자재들도!



알... 아니 종이 속에서 태어난 나의 미싱!


열심히 쓸어담아 온 원단과 부자재들, 원단 높이만 두 뼘이다





작동 잘 되나 테스트해보려고 하다가 바늘만 3개 부러뜨리고.. 밑실이 안 올라와 헤매고..

결국 어찌어찌 성공해서 감격스럽게 첫 작동 시작 ㅠㅠㅠㅠㅠ!

신나서 이것저것 하다 보니 집은 난장판이 되었다!



저는 강아지를 키우지 않습니다





이틀 후,

본격적으로 열심히 해보려고 집 구조도 바꿨다..!



before-after순



[미싱용 책상] 아이템이 추가되었습니다.   [작업공간]이 강화되었습니다.



계속 여러 물품들을 만들어보는 중인데 실패의 연속이다

(사실상 성공한 것이 없는 수준, 나중에 재봉틀 실패 작품전 게시물도 만들어 올려야지)

어쨌든 지금까지는(좀 늦게 글을 쓰는 오늘은 12월 29일이다) 재봉틀이 무척 재미있다!



무엇이든 제 구실을 하는 물건을 속히 완성하는 날이 오길 바라며

재봉틀을 사기 위해 서울을 횡단한 크리스마스의 이야기 끝..!




잘 돌아가는 미싱을 자랑하는 영상












매거진의 이전글 왜 회사에선 성취감을 원하면 안 되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