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모순> 속 편린들

by 익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시 읽은, 애정하는 양귀자님의 <모순>.

작가님의 창작노트에 붙박여 있는 편린들처럼, 내 마음에 담고 싶은 문장들을 담아본다.




어쨌든, 나는 꽃 피는 3월의 어느 아침 느닷없이 나를 설명해 보라는 스스로의 요구에 사로잡혔다. -11p


내 인생의 볼륨이 이토록이나 빈약하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망한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量感)이 없다는 것이다. -15p


우유가 그런 놀라운 일을 해치웠다. 우유가…….

이번에 빈혈이 그런 놀라운 일을 해치운 것이었다. 빈혈이…….


이십 대의 젊음에게는 온갖 것이 다 사랑의 묘약일 수 있다. 이십 대란 나이는 무언가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대다.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하나씩은 필히 사로잡힐 수 있어야 인생의 부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 17p


아주 조금씩, 마치 실금이 간 항아리에서 물이 새듯 그렇게 조금씩 내 마음을 적시기 시작했을 것. 항아리의 균열은 점점 더 커지고 물은 걷잡을 수 없이 새들어오고, 마침내 마음자리에 홍수가 나버려서 이 아침 절박한 부르짖음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렇게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18p


홍수가 나버리도록 마음자리가 불편할 때까지 나를 참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인생을 방기하고 있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면서까지 무위한 삶을 견디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18p


나는 똑같은 조건 속에서 출발한 두 사람이 왜 이다지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만 삶에 대한 다른 호기심까지도 다 거두어버렸다. 인생은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이것이 사춘기의 내가 삶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 20p


그러나, 그러나, 이런 말은 어떤가.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 21p


그랬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삶에 대해 졸렬했다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가는 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22p


가난한 삶이란 말하자면 우리들 생활에 절박한 포즈 외엔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 삶이란 뜻이다. -28p


5월의 밤은 아름답다. 어제 내린 비로 밤하늘은 모처럼 총총 빛나는 별들을 보여주고, 먼 곳에서 흘러오는 라일락 향기는 너무 진하지도 너무 연하지도 않아 이 밤의 그윽함을 더해준다.-43p


형이랑 같이 살 때 난 밤마다 기다렸다가 형이 벗어둔 양말을 깨끗이 빨아서 널어놓은 뒤에야 잠을 잤지. 냄새나는 형의 양말, 나 때문에 더욱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그 양말을 주물러 빨고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했어. 지금도 형 집에 가면 형수 몰래 가끔 형 양말을 빨아주고 돌아와- 119p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 127p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불행의 과장법 - p152


참말이지, 이모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모는 전화선 저쪽에서 몰랐을 것이다. 이모의 마지막 말 때문에 내가 그 순간 왈칵 울어버렸다는 것을. 나는 울음을 감추기 위해서 얼른 전화를 끊었다. 벌써 가득 고여 흐르고 있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나는 창밖을 보았다. 거기 가을을 건너가고 있는 높고 푸른 하늘이 무심하게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180p


사랑이란,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고 무심히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무엇이다. 자신의 얼굴에 대해 생애 처음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의 눈과 코와 입을 그윽하게 들여다보는 나. 한없이 들여다보는 나.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생긴 사람을 사랑해 준 그가 고맙다고. 사랑하지 않고 스쳐 갈 수도 있었는데,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걸음을 멈춰준 그 사람이 정녕 고맙다고. - p210


어머니는 이미 돌아온 아버지를 용서하고 있었다. 엉뚱한 짓을 저지르고 벌벌 떨고 있는 아버지한테 고래고래 소리는 질렀지만, 나에게 아버지에 대해 여전히 포악한 어휘만 골라 사용하는 과장법을 잊지 않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진모 때처럼 또 슬슬 힘을 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 확실한 증거가 바로 어머니의 독서였다. '정신분열증의 이해와 치료'라는 의학서적에서 일본어 회화책으로, 그리고 느닷없이 딱딱한 법률서적을 읽어야 했던 어머니는 요즘 다시 '중풍, 이렇게 치료한다'나 '가정을 파괴하는 병, 치매'같은 의학서적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포기하지도 않은 것이었다.-p274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p296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p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