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나는 왜 친구가 없을까요?"

by 기세

사라지는 안경, 남는 마음1부. 혼자인 게 익숙한 아이


지민이는 쉬는 시간마다 책상 위에 턱을 괴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삼삼오오 모여 한쪽에서 수다를 떨거나 폰으로 게임을 하며 웃고 있었지만, 지민이는 그 무리에 끼지 못했다. 누가 따돌리는 건 아니었다. 새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마음을 다잡고 친구를 사귀어보려 했지만 학기가 끝나고 연말이 될 때까지 늘 혼자였다. 점심시간, 모두가 모여 떠들며 밥을 먹을 때에도, 쉬는 시간, 운동장에서 친구들이 모여 축구를 할 때에도, 지민이는 조용히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왜 나는 친구가 없을까?”


한 번은 괜히 문구점에 가서 유행하는 펜을 산 적이 있다. 필통도 눈에 띄는 변신로봇으로 바꿨다. 학교에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소소한 간식을 사서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고마워~” 하고는 돌아서 가버렸다.


“쟤는 왜 맨날 혼자야?”


옆반 아이가 지민이의 교실에 놀러왔다가 툭 내뱉은 말이 지민이의 귀에 꽂혔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여기서 말을 하면 싸움이 될 수도 있어. 나는 그냥 지나가는 바람인 거야.’ 점심시간이 지나자 하늘이 점점 흐려지더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산을 쓰고 집으로 돌아와 '이 상태로 중학생이 될 순 없어!'라는 생각에 머리를 감싸쥐고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왜 나한테는 친구가 없을까? 내가 이상한 사람인 것도 아닐 텐데…’

그때, 지민이의 침대 머리맡에 무지갯빛 나비 한 마리가 나타나 앉았다. 공중에서 날개를 펄럭이는 무지갯빛 나비는 고민에 집중하던 지민이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곧이어 나비가 앉은 자리에 책장이 열리고, 지식상점 헤윰의 문이 나타났다. '지식상점 헤윰'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2부. 마음의 거리 지도


지식상점의 주인, 헤윰의 노인은 밤이 아닌 초저녁에 헤윰을 방문하게 된 지민이를 반겼다.


“친구들과 마음의 거리를 잘 재지 못하고 있구나.”


노인은 작은 손거울처럼 생긴 물건을 꺼냈다. 어디서 꺼냈는지를 생각하며 노인의 손에 들린 물건에 시선을 고정하니 ‘마음 거리 측정기’라는 이름표가 보였다.


“이건 상대방과의 정서적 거리를 측정해주는 도구란다.”

“정서적 거리요?”


노인의 손에서 반짝이는 작은 거울 속에는 지민이와 반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친구들은 삼삼오오 모여있는데 역시나 지민이는 그들과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 웃으며 다가와도 지민이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물러서는 모습이었고, 누군가 먼저 말을 걸어도 지민이는 할말만 짧게 대답하고 돌아선다.


“먼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것 같은데?”

“괜히 친한 척 하며 다가갔다가 이상한 애로 보일까 봐요…”

“친구는 완벽하게 다가가야 생기는 게 아니란다. 서툰 걸 함께 겪으면서 형성되는관계가 친구지.”


헤윰의 노인은 지민이를 더욱 안쪽으로 들이며 말을 이었다.


“관계라는 건, 아주 미세한 ‘간격’에서 태어나는 법이야. 그래서 이 간격을 보는 안경이 네게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노인의 손엔 어느새 작은 손거울 대신 동그란 안경 하나가 있었다.


“이건 사이보기 안경이야. 이걸 쓰면 사람 사이의 온도와 거리를 볼 수 있지.”

“…그런 게 이 세상에 존재해요?”


지민이가 못 믿겠다는 듯 안경을 받아 쓰자, 앞에 서 있는 노인의 머리 위에 푸른 빛이 떠올랐다. 노인의 말에 따르면 푸른 빛은 멀고, 주황색은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자… 회색. 아주 흐린 회색이었다.


“너는 아직 누구에게도 마음을 내보이지 않은 거야.”


지민이는 변명처럼 말했다. 아까도 비슷한 말을 한 것 같았지만 상관 없었다.


“하지만 먼저 다가가기 무섭잖아요. 거절당하면 어떡해요?”

“물론 거절은 상처가 되겠지만,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은 감정을 얼려버리지. 친구는 서로의 마음이 느껴질 때 생길 거란 것쯤은 너도 알겠지?”



3부. 대화를 키우는 씨앗


노인은 검은색의 로브 속에서 또 다른 물건을 꺼냈다. 알록달록한 작은 구슬처럼 생긴 씨앗이었다.


“이건 말 한마디를 ‘이야기’로 키워주는 씨앗이에요.”


묘하게 들뜬 목소리 톤이라 생각했지만 이내 지민이의 관심은 그 씨앗에 집중되었다. 노인이 건네준 씨앗을 소중한 것을 다루듯 손에 꽉 쥔 채 노인에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오늘 제가 여기에 올 걸 알고 있었나요?”


그러자 지민이의 손에 있던 씨앗이 말풍선처럼 커지며 어떤 이야기를 이어가면 될 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너를 위해 여러가지 물건들을 준비해놓고 있었지. 너를 기다린 시간이 3주나 되었단다.”


씨앗은 대화를 천천히 이어질 수 있게 해주었고, 덕분에 대화가 끊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랐다. 처음 만난 의문의 노인과 의문의 장소에서 대화를 하는데 이렇게 편한 마음이 들다니, 지민이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생각했다.


“말을 잘한다고 친구가 생기는 게 아니었네요. 그냥, 말을 ‘이어가려는 마음’이 중요한 거였어요. 친구가 말을 걸면 대답만 띡 해주고 돌아서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경청해주고 대화를 이어가려고 노력 해봐야겠어요.”


그렇게 지민이는 처음으로 누군가와 점심시간을 함께 보낼 생각에 들떠 있었다.



4부. 회색이던 감정이?


지민이는 헤윰의 노인과 헤어진 다음 날, 상기된 표정으로 학교에 갔다. 씨앗을 손에 꼭 쥔 채로. 그리고 노인에게 받은 동그란 안경을 쓴 채 조심스럽게 교실 안의 친구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도윤: 노란빛. 가끔 눈을 마주친다.

서우: 연초록. 옆자리에 앉아 조용히 공부.

연서: 연분홍. 자주 웃지만 금세 돌아선다.


지민이는 친구들 가운데 그나마 친밀감을 느껴왔던 도윤이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저기, 도윤아. 너 어제 말한 그 게임… 나도 해봤어.”


도윤이의 머리 위에 보이던 색이 노란색에서 주황색으로 바뀌었다.


“진짜? 와, 너 그거 막판 깼어?”


처음으로, 지민이의 색도 아주 흐린 회색에서 연한 하늘빛이 돌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에는 늘 조용히 공부하던 서우가 말을 걸어왔다.


“지민아, 네 샤프 귀엽다. 그거 어디서 샀어?”


지민이는 집 앞 문구에서 샀다고 대답하며 여러 군데 돌아다니면서 봤는데 그 문구점이 가장 종류가 많더라는 이야기도 서우에게 전해주었다.


그날 밤, 헤윰의 허공에 고운 입자들이 모이며 저울이 나타났다. 저울에는 지민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고립’의 무게가 줄고, ‘용기’의 무게가 올라갔음을 노인에게 알려주었다.


“회색이던 감정이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었구나.”



5부. 사라진 안경, 남은 마음


며칠 후, 지민이는 잊고 지내던 것이 떠올라 황급히 책상 서랍을 열었다. ‘사이보기 안경’과 씨앗이 사라졌다. 황당한 마음과 후련한 마음이 동시에 지민이를 덮쳤다. 조금 떨리는 손으로, 서랍에 남아있는 노란 카드를 집어들었다.


“지민 – 말의 힘을 배운 아이”


지민이는 왠지 노인이 어디선가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찬찬히 방을 둘러보았다. 처음 헤윰의 나비를 만났던 벽도, 그 근처에 놓인 침대와 벽장 뒤까지 살펴보았다. 헤윰의 문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이내 마음의 안정을 찾은 지민이는 노인에게 닿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친구가 없었던 게 아니라, 저는 친구가 될 기회를 계속 지나쳐 왔었나 봐요. 이제는 조금씩 변하고 있고, 이 모든 건 할아버지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지민이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지민이의 머리 위에는 헤윰의 무지갯빛 나비가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헤윰의 문이 조용히 닫혔다.


다음 손님: 정우 – “칭찬을 들으면 부담스러워요.”





5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