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가족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by 기세

1부. 투명인간이 되긴 싫어!


도현이는 밥을 먹을 때마다 말이 없었다. 불편함에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게 첫 번째 이유고, 도현이가 말을 하면 꼭 싸움이 났기 때문에 최소한의 방어로 침묵한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중학생인 누나가 말을 하면 엄마아빠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했다. 몇 마디의 말을 덧붙이며 거들기도 했다. 하지만 도현이가 말을 하면, 잠깐 정적이 흐를 때도 있었고 갑자기 화제가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도현이, 숙제 다 했어?”

“응.”

“…이번에 누나 중간고사 1등 했다더라! 대단하지 않아?”


이런 대화의 흐름에서 도현이는 자연스럽게 투명해짐을 느꼈다. 가족이 본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끼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겠다. ‘잘못 태어난 건가?’ 하는 나쁜 생각도 많이 했다. 일기를 쓰며 내가 무언가 말실수를 한 건가, 고민해본 밤도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투명인간 취급을 받을 만한 적당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오늘도 착잡한 마음으로 짧은 일기를 쓰고 침대에 누웠다.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때, 침대에 닿아있던 벽 너머에서 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스르륵. 벽 뒤로 헤윰의 문이 열렸다.


“지식상점 헤윰 – 가족이라는 미로에서 길을 찾는 법, 한정 판매 중.”



2부. 마음을 말하게 해주는 펜


도현이는 조심스럽게 헤윰에 들어선 후, 그곳에 태초부터 있었을 것만 같은 노인을 향해 물었다.


“죄송하지만… 여긴 어디인가요?”

“지식을 판매하는 상점, 헤윰이란다. 넌 가족이라는 미로에서 길을 찾고 있구나.”

“……가족들이 날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고 느껴질 만큼요.”


어두운 검은색의 눈동자를 가진 노인은 도현이를 한참 바라본 뒤, 벽에 붙은 책장에서 오래된 지도를 꺼냈다.


“이건 ‘가족 감정 지도’란다. 가족 구성원 각자의 마음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보여주지.”


지도에는 엄마와 아빠, 누나, 도현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각각의 사이를 복잡하게 얽힌 선들이 지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도현이의 선은 얇고, 끊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여기 보이지? 너의 선은 감정을 솔직히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지. 따라서 너의 가족들도 너의 진짜 감정을 알지 못하고, 존재를 인식하기 어려운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그런 취급 받고 싶지 않다고 말해볼까요?”


노인은 작은 펜을 꺼냈다. 펜의 한편엔 각인이 있었다.

‘마음을 말하는 연습’


“이건 너의 마음을 표현하는 걸 도와줄 수 있는 펜이야. 단, 이 방법은 임시방편이라는 걸 꼭 기억하렴. 정말 효과를 보려면, 네가 직접 이 펜으로 편지를 써야 해.”

“편지요? 누구한테요?”

“스스로에게 적어도 좋고, 아니면 나에게 쓴다고 생각하고 적어도 좋겠지. 속마음을 솔직하게 적되, 누구도 탓하지 말아야 해. 그저 ‘나’의 기분, 감정, 상처만을 정직하게 쓰는 거다. 할 수 있겠니?”



3부. 목소리가 되기까지


도현이는 헤윰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펜을 들었다.


“엄마, 아빠, 누나. 내가 잘못된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누나만 칭찬받고, 난 그냥 짐짝처럼 느껴졌어요. 이런 제 감정을 말하면 분위기 이상해질까 봐 아무 말도 못 했고요. 근데 속으로는 매일 울고 있어요.”


도현이는 담백하게 편지를 쓴 다음,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불을 끄고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도현이의 책상 위에 있어야 할 편지가 사라져 있었다. 놀란 마음에 거실로 나가보았지만 엄마도, 아빠도, 그리고 누나조차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날 하루가 조용히 지나갔다.

‘아무 일도 안 생겼어. 역시 무의미했나.’ 하지만 그날 밤, 누나가 도현이의 방문 앞에 앉아 조용히 말을 건넸다.


“미안. 난 네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 줄 몰랐어.”


문 너머로 듣고 있던 도현이의 얼굴에 반가움과 고마움이 섞인 눈물이 흘렀다. 정말 감정을 전달하니 들어주는 사람이 있구나!



4부. 감정 지도 다시 그리기


며칠 뒤, 도현의 아빠가 저녁밥을 먹다 말고 물었다.


“도현아, 너 요즘 읽고 있는 책 있니?”

“어… 그냥 SF소설 같은 거?”

“오, 아빠도 SF 장르 좋아하는데 추천 좀 해 줘. 읽어보게. 폰으로 보는 거야?”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도현이는 잘하던 숟가락질을 멈췄다. 엄마도, 누나도 도현이를 보며 가볍게 웃고 있었다. 식탁 위엔 더 이상 정적이 없었다. 지금의 이 정적은 도현이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니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왜 가족들이 나를 싫어한다고 느꼈을까? 정작 나의 일상을 털어놓지 않은 건 나였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던 건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의 탓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었음을 인지하는 순간이었다.


한편, 지식상점 헤윰의 노인은 도현이의 감정 지도를 꺼내 들었다. 지도 위 도현이의 감정 점선은 아직 얇긴 했지만 실선이 되어있었다. 감정적인 연결이 아직 완전하지는 않아도, 분명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결국 누군가가 시작을 해줘야 한다는 걸 배웠구나.”



5부. 자신의 존재를 꺼내는 힘


지금껏 하루의 시작과 끝이 내내 우울한 이야기로 가득했던 도현이의 일기장에, 오늘은 이런 문장이 남았다. 헤윰에서 받은 펜의 뚜껑을 열며, 도현이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가족들을 원망하며 지냈던 시간이 아쉬웠고 아까웠다.


“가족은 어쩌면 나를 꺼내는 연습장일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편한 건 아니지만, 마음을 표현하고 말하는 걸 반복하다보면 언젠간 굵고 단단한 실선으로 가득한 지도를 완성할 수 있겠지?”


도현이가 일기장을 덮고 펜의 뚜껑을 닫자, 헤윰의 벽장 선반에 새로운 펜이 나타났다. 도현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각인이 새겨져 있는 펜이었다. ‘관계는 표현에서 시작된다’ 헤윰의 노인은 그것을 꺼내어 유심히 살펴보곤 다시 선반 위에 올려두며 중얼거렸다.

“자신의 존재를 직접 꺼낸 아이.”


그리고 공중에 흩날리는 한장의 카드를 잡아 살펴보았다.

“지민 – 나에게는 왜 친구가 없을까요?”


헤윰의 문이 어느 곳에선가 또 열리려 하고 있었다.





4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