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자존감을 사고 싶어요

by 기세

1부. ‘평범한 나’


하윤이는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듣고 있던 음악의 볼륨을 높였다.


“다른 애들은 다 하나씩 특기가 있잖아. 수연이는 피아노를 잘 치고, 민채는 자신감 있게 발표를 잘하고… 나는 뭐가 있지?”


요즘 하윤이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집에서 숙제를 하다가도, 주말에 거실에서 TV를 보다가도 이 질문을 반복했다. 거울 앞에 서도, 교실에 앉아 있어도, 단톡방을 봐도— 언제나 ‘나는 왜 이렇게 평범할까?’라는 물음이 생겨났다. 하윤이의 이런 고민을 들은 엄마는 하윤이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윤이 너도 네 장점이 있지. 우리 하윤이는 누구보다도 착하잖아.”


하지만 착하다는 건 실력도 아니고 능력도 아닌 걸! 뾰루퉁한 얼굴로 하윤이가 엄마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엄마. 난 그냥… 흔한 애야. 진짜 아무것도 잘하는 게 없어.”


하윤이의 엄마는 방까지 따라오셔서 하윤이의 어깨를 붙잡고 꼭 안아주셨다. 이런 고민을 한다는 건 하윤이가 멋진 어린이로 성장하려는 발판이라면서. 하지만 엄마의 다정한 말을 들어도 하윤이의 고민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답답해서 열어둔 창문 틈으로 서늘한 바람이 잠깐 불어오더니 책상 위의 독서등이 깜빡였다. 그리고— 스르륵. 창문 옆으로 작은 문이 열렸다.

“지식상점 헤윰 – ‘너 자신을 사랑하는 법’ 100% 세일 중.”



2부. 나를 담는 병


“너의 자존감이 지금 몇 %인지 아니?”


지식상점의 노인은 오늘도 방문객에게 어떠한 인사도 건네지 않은채 본론을 꺼내들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하윤이를 두고 노인은 검은색 나침반을 꺼내더니 하윤이의 심장 근처로 내밀었다.


“흠… 28%. 굉장히 낮구나.”

“그런 걸 숫자로 볼 수 있어요?”

“자존감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측정은 가능하단다. 넌 남의 눈에 비친 모습은 신경 쓰면서도, 정작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건 무서워하는 어린이구나.”


여기까지 말한 노인은 로브 깊숙한 곳에서 투명한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병 안에는 마찬가지로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고, 유리병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보조제


“이건 자존감 보조제란다. 매일 조금씩 마시면, 어느 순간 남이 뭐라 하든 너 스스로를 좋아하게 될 거야.”


하윤이는 노인의 이 말을 모두 이해하진 못했지만 조심스레 병을 받았다.


“그냥 마시기만 하면 괜찮아져요?”


줄곧 근엄한 모습을 보이던 노인은 하윤이에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물론 그렇게만 해선 안 되지. 이건 어디까지나 '깨진 자존감을 채우는 응급처치약' 같은 거니까. 진짜 너의 자존감은 ‘기억’ 속에서 만들어진단다.”

“기억이요?”

“네 자신이 빛났던 순간, 실패해도 다시 일어섰던 순간, 그걸 스스로 기록해두렴. 이런 순간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나는 별거 아니야’라는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어.”


지금까지 지식상점 헤윰에서 일하며 이렇게까지 방문객들과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노인은 기운 없이 추욱 늘어져있는 하윤이를 보며 자신이 조금은 오지랖을 부렸나, 하는 생각에 머쓱해졌다. 그리곤 서둘러 종이 한 장을 꺼내 하윤이에게 건넸다.

<나를 사랑하는 기록장>

오늘, 내가 잘한 일
오늘, 내가 웃은 순간
오늘, 내가 나를 지켜준 일


“이걸 매일 3줄씩만 써보렴. 약보다 강력한 건 '기록된 기억'이거든.”



3부. 반짝이기 위한 실패


하윤이는 처음 며칠 동안 노인이 내준 숙제를 하는 게 괴로웠다. 기록장에 무엇을 써야 할 지 고민하는 것도 괴로웠기 때문이다. ‘내가 잘한 일이 뭐가 있지?’, ‘최근에 웃은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났다. 그렇게 며칠을 억지로 쓰다 보니, 조금씩 문장들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친구가 슬퍼할 때 말없이 손을 잡아줌
웃긴 밈 보고 한참 웃음
국어 시간에 발표 못했지만 끝까지 손 들었음


남들이 보기엔 별 것 아니라고 웃어 넘길 수 있는 것들이지만, 스스로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는 게 필요했던 하윤이에겐 커다란 성과였다. 며칠 전 기록한 걸 읽고 또 읽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내가 이런 것도 했구나?', '나 꽤 용감했구나?' 하며 조금씩 웃을 수 있었다. 매일 기록장을 작성하다보니 자존감 보조제 안에 들어있던 액체도 다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2주가 지났을 무렵, 급식 시간에 친구 지호가 말했다.


“하윤아, 넌 은근 끈질긴 면이 있어. 매일 발표하려고 손 드는 거, 멋있더라. 예습을 엄청 열심히 하는 구나?”


그날 하윤이의 기록장엔 ‘나에 대한 친구의 좋은 평가를 들었다’ 라고 적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까지는 스스로가 나의 장점을 억지로 찾아내서 파헤치는 느낌이었는데, 지호의 말을 적고보니 내가 정말 멋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4부. 흔하다는 말은 나쁜 게 아니야


오늘은 학교에서 주최하는 영어 스피치 대회 예선에 하윤이가 참가하기로 한 날이다. 사실 하윤이는 연설을 잘하지도 못했고, 영어 발음이 뛰어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원고를 직접 쓰고, 연습에 연습을 반복했다. 부모님의 응원을 받아 무대에 올라 열심히 자존감을 뽐내보았으나 결과는 탈락이었다. 심지어 심사평에는 ‘연설의 개성이 부족하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하윤이는 집에 와서 멍하게 있었다. 실망하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만 구석에 숨고 싶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뭔가 이뤄보려는 게 나쁜 건가? 나는 그냥 흔한 어린이로 살아야 하는 걸까?’ 그때, 하윤이의 책상 위에 있던 자존감 보조제 유리병이 빛났다. 그리곤 어디선가 기록장이 펄럭이가 들렸다. 기록장을 넣어둔 서랍을 열었더니 한 페이지가 저절로 펼쳐져 있었다.

[그날의 기록 – 내가 끝까지 해낸 순간]
“떨렸지만 끝까지 연설을 마친 나. 아무도 몰라주겠지만 그래도 나는 기억한다. 나는 오늘, 또 무언가를 해낸 것이다.”


그 순간, 투명한 유리병 안의 액체가 반짝이며 병 밖으로 퍼져 나왔다. 공기 중에 흩어진 반짝이는 입자들이 하윤의 눈앞에 퍼져 있었다. 동시에 가슴속에서 따뜻한 게 올라왔다. 그래, 이건 실패가 아니야. 나는 오늘 또 무언가를 하나 해낸 거야.



5부. 자존감은 스스로의 발명품


며칠 뒤, 민채가 하윤이에게 다가와 말했다.


“요즘 너 표정이 되게 좋아보여. 혼자 멍하게 있을 때도 많았는데.”


하윤이는 그렇게 말하는 민채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 그냥 매일 나한테 칭찬 하나씩 하기로 했어. ‘하윤아, 오늘도 잘 버텼어’ 이런 식으로.”

“혼자 그런 거 해?”

“응. 근데, 이거 되게 효과 있다?”


지식상점 헤윰의 노인은 거울을 통해 먼 곳에 있는 하윤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스스로의 마음을 읽고, 기록하고, 사랑하기 시작했구나. 이 아이는 자존감을 직접 만들어낸 거야.”


그리고 조용히, 병에 붙은 라벨이 바뀌었다.

하윤 – 평범함 속에서 빛나는 자존감의 발명가


그리고 또 다른 카드 한 장이 바람에 흩날렸다.

“도현 – 왜 우리 가족은 나만 미워하는 걸까?”

헤윰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다음 아이의 이야기가 준비되고 있었다.





3화 끝.